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14. 친구와 친구(4)
"....."
카이스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 어버버거리다 고개를 푹 숙였다. 어쩐지 물어서는 안 될 것을 물었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 안이 쿡쿡 쑤셨다. 하지만 정작 아시엘은 시원스레 웃어보였다.
"야, 야. 왜 그렇게 심각해? 이러면 말한 내가 민망해지잖아."
"저기, 그..미안."
카이스가 더듬더듬 사과하자 그는 이럴 줄 알았다는듯 한숨을 폭 내쉬고 자신의 팔을 베개삼아 다시 벽에 몸을 기댔다.
"내가 이럴까 봐 얘기를 안 한 건데. 카이스, 너희 귀족들에겐 익숙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천에 널린 게 나같은 고아야. 새삼스럽게 미안할 일이 아니지."
"...하지만 고아는 보통 귀족들이 설립한 제단이나 시설에서 돌봐주잖아. 그런데 나이를 모른다니?"
카이스는 무안함을 지우려 마음에 걸리던 다른 이아야기를 꺼냈다. 그가 알기로는 불쌍한 평민들을 구제하기위해 발벗고 나서는 선량한 귀족들이 있고, 또 그들 덕분에 수많은 어린이들이 구제되었다고 했다. 그가 그렇게 하는 말에 아시엘은 하,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왜?"
"다른 녀석들과 좀 다른 것 같긴 했는데, 그래도 역시 너도 도련님이네. 아, 화내지 마. 네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니까."
카이스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자 그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는 잠깐 복잡한 표정으로 카이스의 무뚝뚝한 얼굴을 마주보다 후우, 하고 김빠진 소리를 냈다.
"너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까 모르겠지만.. 그런 곳에 갈 수 있는 아이들은 얼마 없어. 대부분 갑자기 부모를 잃은 중산층 아이들이나 돌봐줄 사람이 없어진 귀족 꼬마들 뿐이지. 그 녀석들이 물려받은 돈을 꿀꺽하고 그 대신에 지극정성으로 돌봐주는 거야."
"넌?"
"안됐지만, 그런 녀석들보다 처음부터 부모에게 버려져서 길거리에서 살아가는 애들이 더 많아. 나도 정신차리고 보니 거리에 있었고."
길거리? 처음 듣는 이야기에 카이스는 눈을 조금 크게 뜨고 입을 열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데?"
"음.. 너한테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아시엘은 조금 꺼려지는 얼굴로 웃으며 뒷통수를 긁적였다. 하지만 그의 검은 눈동자가 전에 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끙 하는 신음소리를 흘렸다.
"너도 참 끈질기네. 뭐, 딱히 숨기는 건 아니니까 상관 없지만."
"...."
카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조금 머쓱해졌는지 괜스레 손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아시엘은 그런 그를 말끄러미 응시하다 곧 뭐 됐나, 하고 작게 웅얼거리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는 입가에 작게 미소를 드리웠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질긴 목숨을 하루하루 이어가는 것, 그게 제일 큰 과제야."
"....!"
카이스는 고개를 들었다. 벽에 기댄 자그마한 소년의 허공 머너의 것을 보는듯한 붉은 눈동자는 달빛 때문인지 뿌옇게 반짝이고 있었다. 눈 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답지 않은 미소도, 아름다운 얼굴도 창백한 달빛을 머금어 새하얗게 물들었다.
"뒷골목 상점에서 도둑질을 하거나, 푼돈을 받고 일을 해주거나. 난 가끔 거리나 식당같은 곳에서 노래를 하고 돈을 받기도 했지. 물건을 훔치다 들키면 흠씬 두들겨 맞고. 일을 해도 떼먹고 안 주려는 어른들도 많았어."
아시엘은 힛, 하고 웃으며 옆에 앉은 친구를 바라보았다. 카이스의 붉은 머리칼 위에도 은색의 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실례가 될까 자제하고 있었지만 그 검은 눈에는 호기심과 세상의 부조리를 처음 접한 충격이 머물러 있었다.
"밤에는 대충 바람만 피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서 아무데나 드러누워 보내는 거지. 겨울에는 옆에 같이 누웠던 사람이 눈을 떠보면 딱딱하게 얼어서 움직이지 않을 때도 있고."
어린아이들을 노리고 찾아오는 불법 인신매매자나 노예상들도 있었다. 잠깐 졸다보면 금세 겨우 벌었던 돈을 빼앗기기 일수였고 그게 아니더라도 나이가 어린 꼬마들은 질 나쁜 어른들에게 돈을 갈취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소연할 곳도 없었고 원망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다 여기며 다시 일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사람 취급도 못 받으면서 대충 그렇게 필사적으로 사는거야."
아시엘은 다시 미소지으며 턱을 괴었다. 카이스는 말없이 바닥만 뚫어져라 노려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루이스 교수님이랑은 어떻게 만났어?"
"음.. 좀 창피한 얘기지만 말이지, 길가에 뻗어 있는데 아저씨가 주워주셨어. 생명의 은인이야. 안 그랬으면 얼어 죽었을걸?"
여전히 아시엘의 어조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가볍고 밝았다. 하지만 그 속에 있는 삶과 이야기는 어둡고 무겁기 그지없었다. 귀족으로서는 상상도 못한 생활이었다.그의 조숙한 행동과 특이한 미소, 그리고 간간히 눈동자에 비치는 독특한 빛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아, 카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가슴 속에 응어리져있던 것 하나가 조금씩 움직여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귀족 사회에서의 명예가 삶의 전부라면, 어째서 둘째 형은 바깥으로 나도는 것일까.
전 메르티스 백작, 아버지는 왜 정부인인 어머니를 멀리했는지.
그날, 자상하기만 하던 아버지에게 생전 처음으로 뺨을 맞은 이유는 무엇인지.
".....아."
카이스는 살짝 미소지었다. 어렴풋하게나마 답이 나온 느낌이었다. 옆에서 아시엘이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는 그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듯 했다.
아버지는 유난히 평민을 각별하게 아꼈었다. 어쩌면 그들을 동경하는 것 같기도 했다. 연민 같은 어쭙잖은 것이 아니었다.
"야, 아시엘."
"왜?"
"... 원망하지는 않았어? 귀족들을."
난데없는 질문에 아시엘은 곰곰히 생각에 빠져들었다가 곧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니. 하지만 좋아하지는 않아, 지금도. 옛날에는 사람 자체를 싫어했으니까."
"그래?"
첫눈에 봐도 사람들과 섞이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던 그가 그렇게 말하자 카이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납득이 가는 것도 같았다. 자신이 그런 처지였다고 해도 당연히 그랬을 터였으니까. 불신과 불안함이 마음 속에서부터 첩첩히 쌓여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 엄두도 내지 못했을테지.
"그래도 지금은 익숙해졌기도 했고 세상엔 착한 사람들도 많더라고. 그리고 나쁜 녀석들이 수작을 걸어도 뭐, 난 무력하지 않으니까. 얼마든지 상대해 주면 그만이야."
"......"
카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아버지 생각이 났다.
유난히 평민들을 아꼈던 아버지와 유독 평민들을 싫어하는 어머니. 두 사람의 사이가 멀었던 것은 아마도 그것 때문. 그리고 그럴수록 더욱 자신들의 가치관에 집착하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아버지도 만났던 것일까, 이런 녀석을. 카이스는 새삼스럽게 아시엘을 살폈다. 비단 아름다운 외모 뿐만이 아니라 그에게는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아직 어린 그가 이해할 수도 없고 콕 찝어 말할 수도 없지만 사람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버지에게 뺨을 맞았던 날, 그때는 카이스의 생일날이었다. 그 날 어머니의 주최 하에 성대한 파티가 열렸었고 아버지는 마지못해 참석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창 파티가 진행되던 중 접시를 옮기던 어느 어린 하녀가 실수로 카이스의 옷자락에 얼룩을 묻혔고, 별 생각 없이 그냥 그녀를 보내려던 그에게 백작 부인이 다가왔다. 백작 부인은 아들에게 천한 하녀를 벌할 것을 명령했고, 난데없는 소동에 백작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그는 벌벌 떨면서 울고 있는 하녀를 위로하고, 백작 부인에게 호통을 쳤다. 어린 아이에게 무슨 짓이냐고. 하지만 백작 부인 역시 지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교육을 시키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냐며.
그 사이에 끼였던 카이스가 선택한 것은 결국 하녀의 뺨을 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곧장 그의 얼굴에 아버지의 손찌검이 날아들었다.
".....그래서였나."
카이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 때 그는 영주이면서도 자주 자리를 비우는 백작, 아버지를 탐탁찮게 여겼다. 그것은 아마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 어머니와 첫째, 카스란의 영향이 클 터였다. 하지만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서 아이같이 들뜬 얼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버지의 얼굴은, 진실로 행복하게 보였다.
"-그리고 말이야."
"어?"
그는 갑자기 아시엘이 다시 입을 열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음, 말하기 좀 뭐하지만."
아시엘은 킥킥 숨죽여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보는 쑥쓰럽다는 얼굴로, 뺨까지 살짝 붉힌 그는 기분좋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난-"
카이스는 거기에서 말을 끊었다. 흥미롭게 듣고 있던 루이카엔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아닙니다. 그냥.."
그는 그렇게 얼버무리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라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잠시 후 카이스는 약간 들뜬 것 같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이제 그 녀석이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요."
"......?"
무슨 소리인지 알 리가 없는 루이카엔은 두 눈을 꿈뻑거리기만 했다. 하지만 카이스는 더이상 그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해 줄 생각이 없는지 말머리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국 밤을 완전히 새 버렸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고 데인과 베리스온이 다행히 다른 교수님들을 모시고 와서 나갈 수 있었죠."
"그런데 그 니스란 녀석, 이번에 루아 이클립스에 입단한 하노빌 백작의 장남 아닌가?"
루이카엔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묻는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엘에게 지난번에 만났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것이었다.
"이를 북북 갈고 있지 않을까요. 그때부터 아시엘이랑 악연이 꽤 질겼거든요. 2년 전에 한번 엄청나게 깨지고 나서는 조용해졌지만."
"크핫! 알 만 하네."
루이카엔은 웃음을 터뜨렸다. 카이스 역시 그때 일을 떠올리는듯 뒷목을 주무르며 눈을 작게 반짝였다.
"정말, 그때는 굉장했습니다. 니스가 작정하고 집안의 힘까지 끌어들여서 아시엘의 뒤를 캤었거든요. 덕분에 아시엘도 열이 제대로 받아서.."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쪽을 도발해 대련을 하게 만들어 놓고 그것을 빌미로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니스를 '두들겨' 패고 2차로 특유의 말솜씨로 그를 거의 회생 불가능으로 만들었었다. 그 후로 니스 일당은 차마 다시 덤빌 엄두도 내지 못했고, 그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학생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결국 그 사건 때문에 아시엘의 출신이 밝혀지게 되어 버렸지만 니스가 바라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은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라면, 그 때 저희 어머니의 귀에 그 사건이 들어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알 만 하네. 아시엘이 일을 벌였다면 분명히 너도 개입되었을 테니까."
여전히 웃음을 거두지 못하고 루이카엔이 끅끅거리는 소리를 내며 겨우 말했다. 카이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제가 아카데미 안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에 징계를 받았다는 사실보다 평민과 어울려 다닌다는 사실이 더욱 마음에 안 드셨다고.. 그 뒤로부터 이 모양이죠. 큰형님이나 어머니나. 작은 형님은 오히려 그 때문에 아시엘이랑 사이가 더 돈독해졌지만."
"그렇군. 참, 뭐라고 해야 하나. 역시 네놈들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그때 도서관 사건 후에 니스는 어떻게 됐는데? 아시엘이 그냥 넘어갔을 리는 없잖아."
루이카엔은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너무 웃었더니 이마에 땀까지 맻힐 지경이었다. 카이스는 음- 하고 잠시 곰곰히 기억을 더듬었다.
"아마 그냥 넘어갔을겁니다."
"뭐?"
예상치 못한 대답에 루이카엔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처음과 같았다.
"그냥 넘어갔어요. 갇혔던 것도 그냥 실수로 넘겼고.."
"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엘의 의도가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 그 니스는 그 후로 아시엘과 마주칠 때마다 오금이 떨렸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재미있어 루이카엔은 또다시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걸작이네."
"그렇죠. 그것보다 이제 슬슬 가 봐야 하지 않을까요."
어디로,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이카엔은 카이스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고 먼저 몸을 일으키고 기지개를 쭉 켰다.
"그럴까.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쯤 돌아와 있겠지."
"부엌에서 과자라도 몇 개 챙겨가죠."
카이스 역시 오래 앉아있어 찌뿌둥해진 어깨를 휘휘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생각이야. 사실 나도 배고팠거든."
루이카엔은 킥킥 웃으며 배를 움켜쥐는 시늉을 해보이고는 먼저 방을 나갔다. 잠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던 카이스는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아시엘의 마지막 한 마디. 아마 그것이 지금의 카이스가 그의 옆을 고집하는 가장 큰 이유일 터였다.
다시 혼자가 되는 것은 역시 싫다, 라고.
옛날 케케묵었지만 여전히 선명한 기억 속의, 아시엘이 말했던 것을 떠올린 그는 픽 입가에 곡선을 그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겉옷을 챙겨 재빨리
단장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