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17화 (117/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11. 친구와 친구(1)

품에 안긴 책의 무게를에 어쩔 줄을 모르고 서있던 아시엘은 곧 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럼 이 책들을 정리하기만 하면 되나요?"

"네. 그럼 부탁해요."

비안은 미소지으며 그와 카이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아직까지는 익숙해지지 않는 온기에 두 소년은 머쓱한 표정을 짓고는 몸을 빙글 돌려 안쪽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흡, 하고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는 책의 무게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또 다른 홀에, 책상과 의자들이 2사람이 마주볼 수 있는 구조로 둥글게 배열되어 있었다. 한 자리에 하나씩 고급스러운 랜턴이 자리잡고 있었고 의자에는 푹신한 쿠션이 놓여 있었다. 바닥에는 소음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이때까지와 마찬가지로 두터운 카펫이 깔려 있었다.

정말로 아시엘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책들을 껴안고 서있는 서가들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천장까지 닿아 있는 고동색의 나무 서가에는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갖가지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손이 닿지 않는 곳의 도서들을 꺼낼 수 있도록 벽면을 따라 이동식 사다리가 여러 개 설치되어 있었다.

둥근 모양의 드넓은 공간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서가들의 향연이란 웅장한 모습에 아시엘은 넋을 잃고 또다시 감탄사를 내뱉았다.

"와.. 이런 건 처음이야. 굉장하다."

"촌놈 티 그만 내. 정신 차리고 얼른 정리나 해."

카이스의 목소리에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헤헤 쑥쓰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아, 미안. 도서관은 처음 와보는 거라."

"뭐? 진짜?"

카이스는 황당하다는듯 눈썹을 휘었다. 하지만 곧 그가평민이란 것을 상기하고는 대충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책 정리하는 방법은 알고 있어?"

"아까 비안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하면 되는거 아냐?"

"선생님도 설마 네가 도서관도 못 와본 녀석이라곤 예상 못 하셨겠지. 이리 와 봐."

아시엘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카이스는 자신의 몫의 책을 바닥에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네 책 제목 위에 표시된 알파벳. 그건 구역을 알려주는 거야. 이건 A니까, 저쪽이겠네."

아시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확실히, 서가 위에 A 라는 알파벳이 새겨진 팻말이 달려 있었다. 그 옆에는 B, C, D가 차례대로 이어졌다. 몇 개의 알파벳은 아예 서고 하나를 다 차지하고 있는지 다른 쪽 홀로 통하는 문 위에 붙어있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알파벳 아래에 표시된 숫자랑, 서가에 있는 숫자를 봐 가면서 정리하면 편할 거야."

"잘 알고 있네, 카이스. 전에도 해본 적 있는 거야?"

아시엘이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하자 카이스는 시선을 피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다른 도서관에서 원하는 책을 찾는 요령이랑 비슷하니까. 책 읽는 걸 좋아하진 않았지만."

"흐응.."

아시엘은 대답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소리를 내며 카이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멀뚱히 서 있기만 하자 의아해진 카이스는 슬쩍 그쪽으로 돌아보았다. 그리고, 똘망똘망한 붉은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

그가 흠칫했지만, 아시엘은 상관하지 않고 씨익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리고는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 고마워!"

제 할 말만 하고 종종걸음으로 자신이 가리켰던 곳으로 가 버리는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던 카이스는 픽, 힘빠진 소리를 내고 아무렇게나 뒀던 책들을 다시 들어올렸다.

솔직한 녀석.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두 소년은 각자 책을 한아름씩 들고 바쁘게 도서관 내부를 오갔다. 워낙 넓고 책의 종류도 많아 한 권의 자리를 찾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사다리를 오르락 내리락 하고 여기저기를 누비다 두 시간여가 지났을 때, 카이스는 곡소리를 내며 카펫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으으!"

아직 어린 소년에게 책의 무게는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팔이 욱씬거리고 허리까지 아파왔다. 영지에 머물때 형들과 함께 훈련을 받았었지만 아직까지 여물지 못한 근육들이 비명을 질렀다.

"후우.."

카이스는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새삼 자신이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시엘의 탓으로 전가하자니, 지켜보고만 있어도 될 것을 자신이 굳이 끼어들었던 것이 찔려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어울리지 않는 오지랖을 부린 것이 죄라면 죄였다. 카이스는 다시 한 번 에휴, 하고 한숨을 내뱉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이 일의 주범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농땡이라도 피우는 거냐?"

전혀 그럴 스타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카이스는 잠시쉴 겸 아시엘을 찾아볼 요량으로 몸을 일으키고 바지를 툭툭 털었다. 그는 허리를 우드득 편 후 주변을 대강 살폈다. 적어도 이 서고에는 없는지 금발의 작은 뒤통수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카이스는 터덜터덜 지친 걸음을 옮겨 D실에 갔다가, 또 R실에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허탕치고  H서고에 발을 들여서야 겨우 아시엘을 찾을 수 있었다. 정리하던 책은 옆에 쌓아두고, 바닥에 앉은 채로 책 한 권을 펼쳐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그 꼴이 마치 책 속에 파묻힌 작은 동물 같아, 카이스는 헛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하지만 곧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야, 정리 안 하고 뭐 하고 있는 거야."

"응..? 아, 카이스."

아시엘은 그제야 그의 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고 겸연쩍게 웃었다.

"언제 왔어?"

"방금. 그것보다 뭘 그렇게 봐?"

카이스가 옆으로 와 쭈그려앉으며 묻자 그는 책을 들어  보여주었다. 가죽으로 된 고급스러운 표지에 금박으로 [데히트만의 마법 입문] 이라는 제목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마법서? 너 마법사가 되려고?"

"아니. 그냥 재미있어 보여서. 물론 배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힘들 테니까."

아시엘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카이스는 무심한 눈으로 그에게서 건네받은 책을 이리저리 살폈다. 옛날부터 마법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 그였다. 어렸을 때 잠시 고급 마법의 화려함에 매료되어 배우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우연히 마주친 한 마법사가 "넌 가망이 없다" 고 딱 잘라 한 말에 마음을 접었었다.

".. 확실히. 마법은 최근에는 크게 쇠퇴하고 있고, 특별한 재능이 있어야 하니까."

"그렇지."

아시엘은 씁쓸하게 미소짓고는 그에게서 돌려받은 책의 표지를 장난스럽게 톡톡 두드렸다. 하지만 마법서를 바라보는 아시엘의 눈동자는, 일종의 갈증이 느껴지는 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이스는 곧 고개를 돌리며 지나가는 말처럼 툭 내뱉았다.

"혹시나 알아? 네가 그 소수 중에 한 명일지. 난 아니었지만."

"에?"

전혀 뜻밖의 말이었는지 아시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곧 그 안에 숨은 뜻을 알아차리고는 픽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고마워."

"별 말씀을."

카이스 역시 얼굴에 미미한 미소를 띄우며 짧게 대꾸했다.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아시엘은 그의 검은색 눈동자가 분명히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 그는 싱긋 입가에 곡선을 그리며 마법서를 원래 자리에 꽂아넣었다. 그리고는 옆에 쌓아둔 다른 책을 한 권 집어들고 사다리에 올랐다.

"뭔가, 도서관이란 곳 좋네. 책이 이렇게나 많으니까 공부도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

"넌 공부가 재밌냐?"

카이스는 어느새 자신의 키보다도 더 높이 올라간 아시엘을 올려다보며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산뜻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 재밌어."

"..별난 녀석."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놓인 책을 집어들었다. 카이스는 책에 표시된 숫자와 서가에 달린 팻말을 곰곰히 살펴보며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 때, 입구 쪽에서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두 소년은 의아해져 그쪽으로 돌아보았다. 비안이 빙그레 웃는 얼굴로 활짝 열린 문을 두드린 손을 그대로 들어올린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심히 하고 계시네요. 잠시 쉬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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