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09. 소년과 아버지(2)
"야, 너. 너도 평민이었냐?"
교무실에서 나온 카이스가 가장 먼저 들은 것은 니스가 아시엘에게 툭 내뱉은 한 마디였다. 대충 예상했던 바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꿀릴 게 전혀 없던 아시엘은 고개를 비틀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런데?"
"이제야 알겠네. 너도 똑같은 처지니까 저 새끼가 안쓰러워서 끼어든 거지? 천한 것들이 모여서 끼리끼리 노는군."
그가 폭언을 퍼부었지만 아시엘은 심드렁하게 허공을 바라보며 들은척 만척 귀를 후벼팠다. 그게 또 얄미워, 니스는 얼굴을 와락 구기며 버럭 소리를 쳤다.
"야! 듣고 있냐?"
"내가 귀 하나는 밝은데 네 말은 이상하게 잘 들리지가 않네. 들을 가치가 없어서인가."
하아. 카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탁 짚었다. 확실히 먼저 룸메이트로 만난 것이 아시엘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니스와 같은 처지였다면 그를 한 대 때리고도 남았을 것 같았다. 물론 그 이전에 때릴 수 있는지부터가 문제였지만.
"야, 그만해. 교무실 앞에서 뭐하는 거야."
그가 조용히 하는 말에 니스는 끙, 하며 입을 꾹 다물고는 아시엘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분한듯 이를 꽉 악문 그는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렀다.
"너. 절대로 가만 안둬."
"......"
아시엘은 대꾸하지 않고 무심한 눈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뭐 더 할 말이 있냐는듯 그가 어깨를 으쓱하자 니스는 사납게 몸을 팩 돌려 뚜벅뚜벅 반대편 복도로 걸어가버렸다.
점점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던 아시엘은 고개를 돌려 레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소심한 평민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며 뒤로 몇 걸음 주춤주춤 물러섰다.
"왜, 왜..?"
"내가 묻고 싶은데 말이야. 왜 피해?"
아시엘은 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 바람에 차마 도망치지도 못한 레이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코앞까지 바싹 가까워진 깨끗하고 앳된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할까, 저 아이는. 말려들게 했다고 화를 낼까? 조마조마해하던 그는 갑자기 아시엘이 빙그레 웃자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에?"
"다음에 보자, 레이 베르튼. 일 크게 만들어서 미안해."
사과했어? 뜻밖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 레이는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고 미소짓는 아시엘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아시엘은 킥 웃으며 구부정한 자세로 서 있는 그의 허리를 곧게 펴 주었다.
"가슴은 쫙 펴고 있어. 아무 이유도 없이 움츠리고 살면 억울하잖아?"
그는 그럼 안녕, 하고 레이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카이스의 팔을 잡아끌었다.
"우리도 가자."
"..아아. 어."
마찬가지로 예상 외의 상황에 얼이 빠져 멍하니 있던 카이스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그를 따라 나섰다.
레이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듯 서서 아까 니스가 도망치듯 사라졌던 복도와는 반대쪽으로 걸어가는 아시엘과 카이스를 응시했다. 작게 들리는 그들의 대화소리는 대충 귀찮은 일에 말려들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상관 없다고 대꾸하는 것 같았다.
사과는 내가 해야 하는 거였는데. 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로 귀찮게 만든 건 자신이었고, 벌까지 받게 만든 것 역시 자신이었다.
어째서일까. 레이는 생각했다. 같은 평민인데도 어째서 그는 다른 귀족 아이들 사이에서 당당할 수 있고 심지어는 사랑까지 받고 있는 것일까. 절대로 그 아름다운 얼굴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 그는 확신했다.
어째서 나는 당당할 수 없는 것일까. 왜 나는 당당하지 못한 거지? 그럴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아버지도 계시고 집 역시 다른 아이들 못지않게 잘 사는 편이었다. 거대 상단의 유일한 직계 후손이기도 했다.
레이는 눈을 살짝 감았다가 떴다. 잠깐 가려졌다가 다시 드러난 그의 갈색 눈동자는 전에 없던 일종의 의지가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시엘과 카이스는 새로운 소식 하나를 듣게 되었다. 4교시가 끝난 후의 쉬는 시간 잠깐 나갔다가 헐레벌떡 교실로 돌아온 데인은 곧장 두 사람의 자리로 달려와 애꿎은 책상을 콰앙! 쳤다.
"우왓, 깜짝이야. 왜 그래?"
"큰일 났어, 큰일!"
아시엘이 놀란 목소리로 묻자 데인은 잠시 씨근덕거리며 숨을 골랐다. 하지만 도저히 진정을 할 수가 없었는지 곧 잔뜩 흥분해 외쳤다.
"C 클래스의 니스 녀석 말이야! 어제 얻어맞고 실려나갔대!"
"뭐? 누구한테?"
카이스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데인은 정말로 혼란스러운 얼굴로 손짓 발짓을 다 해가며 말을 이었다.
"어제 너네들이랑 그러고 나서, 니스 녀석이 또 그 평민 애한테 화풀이를 하려고 했나 봐. 그런데 그, 이름이 레이랬나? 어쨌든 그 평민이 있는 힘껏 그 놈한테 주먹을 휘둘렀대."
"뭐? 레이가?"
정신이 사나워져 조금은 짜증스레 뒷통수를 긁적이던 아시엘은 믿을 수가 없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베리스온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 그 뒤에 나자빠진 니스 앞에서 한번만 더 허튼짓 하면 퇴학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가만 있지 않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았대!"
"......"
아시엘과 카이스는 멀뚱멀뚱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레이라면 분명히 그 어제의 소심의 극치를 달리던 소년의 이름이었다. 잠시 데인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는듯 눈만 끔뻑이던 아시엘은 곧 푸큭,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 아시엘?"
"푸하하하! 하하하하하! 아이고, 배야! 하하하하!"
베리스온이 의아하게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들리지도 않는지 책상까지 쾅쾅 때려가며 크게 웃어댔다. 아시엘은 정말로 숨이 넘어갈 것처럼 간간히 캑캑거리는 소리를 내면서도 한번 터진 웃음을 좀처럼 멈추지 못했다.
그런 그를 어이없이 바라보던 카이스는 영문을 몰라 황망하게 서 있는 데인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아- 이때까지 지속적인 괴롭힘이 있었다는 게 입증되서 따로 처벌은 없었다나 봐. 그래도 앞으로의 문제 때문인지 레이 녀석만 반을 다른 데로 옮긴다고 하던데?"
데인이 그렇게 대답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앞으로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주먹질을 했다니-
"애한테 이상한 거나 가르치고. 잘 하는 짓이다."
"하하, 하아- 내가 뭘?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카이스가 약간 힐난을 담아서 하는 말에 아시엘은 겨우 웃음을 멈추고 눈가에 찔끔 맺힌 눈물을 닦으며 대꾸했다. 얼마나 웃었는지 얼굴까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 그래도 축 처져 있는 것보다는 낫지 뭐. 아- 숨차."
"... 그건 동의하지만."
아시엘이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는 채로 대꾸했다. 카이스 역시 피식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갑자기 곁에서 지켜보던 베리스온과 데인의 표정이 묘해졌다.
"....? 왜?"
이상함을 느낀 카이스는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아시엘까지 웃음을 멈추고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 것을 본 그는 조금 인상을 썼다.
"뭐야? 왜?"
"아니, 너.... 방금 웃었, 어?"
데인이 더듬더듬 힘들게 말을 꺼내자 그제야 무엇이 문제인지 깨달은 카이스는 뜨끔해 입을 꾹 다물었다. 딱히 일부러 무뚝뚝하게 굴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쩐지 굉장히 뻘쭘했다.
"아, 아니. 방금은 그냥.."
"아니긴 무슨! 방금 웃었어! 웃었지? 와, 나 이 녀석 웃는거 입학하고 나서 처음 봤다고?"
베리스온이 호들갑을 떨며 데인과 아시엘의 어깨를 퍽퍽 치기 시작하자 카이스는 얼굴이 조금씩 뜨거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국 그는 고개를 숙이며 짜증스럽게 외쳤다.
"아니라니까!"
"아니긴. 쑥쓰러워 하지 않아도 - 쿡."
아시엘은 결국 입가를 살짝 가리며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웃지 마! 카이스가 달아오른 얼굴로 그의 입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고 아시엘은 교묘하게 그의 손을 피하면서 깔깔거렸다. 데인과 베리스온 역시 두 사람이 앞치락 뒤치락 하는 것을 보며 킬킬 웃기 시작했다.
때 아닌 소란에 반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그들에게로 쏠렸다. 하지만 네 사람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 작은 소동은 종이 울리고 들어온 교수가 시끄럽다며 신경질적으로 호통을 칠 때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