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14화 (114/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08. 소년과 아버지(1)

그 남자를 데려온 장본인인 베리스온과 데인의 말에 의하면, 두 사람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겁이 나서 곧바로 교수님을 모시러 갔다고 했다. 그러던 와중에 가장 먼저 만난 것이 바로 저 낯선 교수였다. 가슴에 달린 하얀 명표에는 '루이스 아르셰인' 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아르셰인..'

어디선가 들었던 이름 같은데- 카이스는 떨떠름한 시선으로 앞장서서 걷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 보았다. 그는 자신의 발로 갈테니 놔 달라며 버둥거리는 아시엘을 마치 새끼고양이 다루듯 이리저리 흔들며 안돼, 하고 딱 잘라 대꾸하고 있었다. 옆구리에 짐짝처럼 끼워진 니스는 초반에는 도망치는 것을 시도하다 세 번째로 붙잡힌 이후로는 포기한듯 얌전히 축 늘어져 있었다.

카이스는 다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아시엘에게 구해진 평민 소년은 잔뜩 움츠러들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한심해. 카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적어도 아카데미에 입학했다면 평민이라도 꽤 부잣집의 아들일텐데 귀족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생각에 모순을 느꼈다.

'아니지, 오히려 저게 정상인가?'

확실히, 같은 평민인데도 한없이 당당한 아시엘이 이상하다면 이상한 것이었지 귀족 아이들 틈에 끼인 평민 아이가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옳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어째 아시엘과 만난 이후로 머릿속이 복잡해져가는 기분이었다.

평소같으면 누군가가 괴롭힘을 당하건 말건, 싸우건 죽이건 신경도 쓰지 않았을 그였다. 더군다나 상대가 평민라면. 저 녀석의 오지랖이 옮은 건가? 카이스는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자문했다. 하지만 답이 쉽게 나올 리가 없었다.

그렇게 그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중에 그들은 교무실에 도착했다. 그 때,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아-"

"걱정 마. 너네는 설교가 먼저니까."

아시엘이 살짝 인상을 쓰자 교수가 한마디 툭 내뱉았다. 화려한 문양으로 조각이 새겨진 고풍스러운 나무문을 쾅, 발로 차서 연 그는 자신의 책상까지 가서야 아시엘과 니스를 툭 던지듯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따악, 딱! 두 소년의 머리에 아프게 꿀밤을 먹였다.

"익!"

"으악!"

아시엘과 니스는 짧게 비명을 지르며 맞은 곳을 감싸쥐었다. 그런 그들을 한심하게 내려다보던 교수- 루이스는 고개를절레절레 내저으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자, 이제 설명 좀 들어보실까? 입학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햇병아리들이 왜 벌써부터 사고를 치고 난리야?"

"이건 사고가 아니라-"

아시엘은 억울한 목소리로 무어라 항변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다시 한 번 딱, 하고 매섭게 쥐어박는 바람에 신음을 삼키며 입을 다물어야 했다.

"시끄러워, 임마. 넌 어째 얌전하게 잘 있는다 했더니 얼마 가지를 못하냐?"

"제가 뭘 했다구요."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그의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교수는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양심은 있나 봐?"

"....끙."

아시엘은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그들을 가만이 바라보던 카이스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며 끼어들었다.

"저.. 죄송하지만, 교수님. 이 녀석을 아십니까?"

"뭐?"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어째 서로 잘 아는 사이인듯 한 느낌이었다. 교수는 생각지 못한 질문에 허를 찔린듯 음- 하는 소리를 내다 머쓱하게 뒷목을 긁적였다.

"그 꼬마가 말을 안 해 줬나 보군. 간단히 말하자면, 아시엘의 보호자야. 나도 올해 아카데미에 들어와서 이 녀석을 같이 입학시켰지. 다음 주부터 신입생 검술 수업에도 들어갈거야."

"...네?"

카이스는 조금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시엘이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피하면서 했던 말 중에 너희들도 곧 만나게 될 테니까, 라는 것이 있었던 것도 같았다. 아르셰인이라는 성 역시 처음에 아시엘이 자신을 소개하며 지나가듯 했던 것이었다.

"무슨 반응이 그래. 정말로 한 마디도 못 들었어?"

루이스는 어이가 없다는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의 양아들을 바라보았다. 그 속에 있는 비난 섞인 빛에 아시엘은 어색하게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루이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도대체 왜 그러고 있었던 건지 말해 주면 좋겠는데."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니스와, 무어라 꿍얼거리는 아시엘 그리고 눈치만 살피고 있는 평민 소년을 훝어보고 다시 니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대답을 원한다는 그 갈색 눈동자에 니스는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그럼 그쪽 꼬마가 말해볼까. 어디보자, 이름이-"

루이스는 고개를 숙여 아까 괴롭힘으로 지저분해진 교복에 달린 명찰을 읽었다.

"레이 베르튼, 이로군. 자세히 설명 좀 해 주겠니?"

"아.."

소년, 레이는 우물쭈물하며 눈을 내리깔았다가 힐끔 니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와 눈을 딱 마주치고는 움찔하고 말았다. 니스는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면 죽어, 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

레이는 이번에는 시선을 살짝 돌려 아시엘을 바라보았다. 아시엘은 씨익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붉은색 눈동자는 괜찮다고 격려하는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결심한듯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그, 니스 군이 저를 정원으로 불러내서, 갔는데.."

"야!"

니스는 결국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그는 으르렁거리는 것같은 사나운 얼굴로 레이를 쏘아보았다. 레이는 겁을 먹은듯 흠칫했지만 곧 입술을 한 번 악물었다가 다시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다.

"그, 나갔는데.. 애들이 있어서요.. 교과서를 빼앗고, 아카데미에서 나가라면서.. 하고 있었는데. 저, 저 애가 갑자기 달려와서.."

"말렸다고?"

자신의 말에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바라보며, 루이스는 흐음- 하며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대충 그 뒤 이야기는 예상이 가는데. 아시엘이 끼어들어서 저 니스 군의 약을 살살 올렸고 거기에 곧이곧대로  걸려든 너는 흥분해서 화를 펄펄 낸 거고. 안 봐도 상상이 간다."

"......"

아시엘과 니스는 차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다 고개를 푹 숙였다. 루이스는 하, 하고 기가 차 헛웃음을 터뜨렸다.

"오, 순순히 인정하시겠다? 기특하네. 그럼 무슨 벌이 좋을까?"

"저.. 아시엘 군은 저를 도와주느라고.. 그랬을 뿐인데요.."

여전히 눈치를 살피던 레이는 아까보다는 조금 커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루이스는 흠- 하고 턱을 쓰다듬으며 곰곰히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러면서도 뚱한 얼굴을 한 니스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시엘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글쎄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엔, 속 뒤집어졌을 니스 군이 너무 불쌍해서 말이지. 더러운 성질머리도 좀 고쳐 놓긴 해야 하고."

"윽.."

그가 빙그레 입가에 곡선을 드리우며 말하자 아시엘은 몸을 긴장시키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루이스는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넌 일단 도서관 청소 일주일."

"네에?!"

아시엘은 입을 벌리며 울상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루이스는 이번에는 니스를 응시했다. 젊은 교수의 눈길이 자신에게 닿자 그는 불안한듯 고개를 아예 홱 돌려 시선을 피해버렸다.

"니스 군. 내 기억으로는 교칙에 신분으로 인한 차별을 금지한다는 조항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

니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루이스는 얼굴에 있던 미소를 지우고 하아- 하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는 다리를 꼬며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는 고집쟁이 악동을 내려다보았다.

"네가 어느 가문에서 어떻게 떠받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카데미에 온 이상 너는 그저 학생일 뿐이야. 그리고 특히 여기는 기사 양성 특수 아카데미인데 기사도를 배운다는 녀석이 그러면 어떻게 해."

"....."

니스는 여전히 입을 꾸욱 다물고 있었다. 그의 원망과 짜증이 서린 시선이 잠깐 아시엘에게 향했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루이스는 골치가 아프다는듯 뒷목을 긁적거렸다.

"나 참. 일단 너는 벌점 20점이다. 그리고 기사의 정신에 대한 것부터 공부하는 게 좋겠군. 앞으로 한달간 매일 한 장씩 기사도에 관한 글을 찾아서 배껴 와. 레이 베르튼, 너도."

"네? 저, 저도요?"

레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차마 어째서, 라는 말을 내뱉지는 못했지만 진심으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루이스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느 상대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해야 한다. 그게 긍지 높은 기사의 기본이야. 너도 기사도에 대해서 연구해 봐."

"......."

레이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었다. 그러자 교수는 다시 아시엘과 카이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소년은 멀뚱멀뚱 서서 루이스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이스 군은 무죄. 하지만 말리지 않고 가만히 구경만 한 괘씸죄로 아시엘이랑 같이 도서관 청소나 해, 방과 후에. 사서 선생한테 말 전해 놓을 테니까."

"....예."

카이스는 눈살을 미미하게 찌푸리긴 했지만 별다른 반박 없이 순순히 받아들였다. 물론 속으로는 아시엘에 대한 온갖 투덜거림을 엄청나게 쏟아내고 있었지만.

그것을 알 리가 없는 루이스는 모든 처벌이 끝나자 소년들에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럼 이만 가 봐! 이미 수업 들어가기는 늦었겠지만. 나도 다음 3학년 수업 준비 해야 하니까."

"네."

네 아이는 제각기 다른 목소리로 입을 모아 대답했다. 그리고 니스가 가장 먼저 몸을 홱 돌려 교무실을 빠져나가버렸다. 레이가 한번 더 몸을 꾸벅 숙여보이고 그의 뒤를 따랐고, 곧 아시엘 역시 터벅터벅 밖으로 향했다.

카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그들을 따라가려 발걸음을 뗐다. 그 때, 덥썩.

".....?"

갑자기 루이스가 어깨를 잡는 바람에 그는 의아해져 다시 몸을 교수의 쪽으로 돌렸다.

루이스는 몸을 살짝 숙여 카이스와 눈높이를 맞추었다.그리고 입가에 자상한 미소를 드리웠다. 그는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무언가를 빠르게 써서 카이스에게 내밀었다.

"에? 아-"

그것을 받아든 카이스는 글씨를 읽고 멍하니 그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하얀 쪽지에 쓰여진 것은, '녀석을 잘 부탁한다.' 는 말.

왜 굳이 글로 쓰신 걸까. 그런 의문이 고개를 들었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루이스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소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고맙다."

카이스는 자신의 머리칼에 전해져 오는 온기에 기분이 싱숭생숭해져 볼을 긁적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따뜻함이, 썩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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