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04. 소년과 소년(1)
카이스는 주저앉은 채로 얼떨떨하게 금발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남자라고?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그는 세게 얻어맞은 옆구리가 욱신거리는것을 느끼고는 울컥해 무뚝뚝하던 얼굴을 와락 구겼다.
"이게 무슨 짓이야!"
"그건 이쪽이 할 소리거든? 그래, 초면에 헷갈릴 수 있다고 쳐. 근데 대놓고 부정하는건 좀 너무한거 아냐?"
하지만 오히려 '소년' 이 허리에 손을 척 얹고 불만스럽게 쏘아붙이는 말에 그는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이 일은 자신의 실수인것이 확실했고 거기에다 대고 왜 그렇게 헷갈리게 생겼냐, 고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랬다가는 방금보다 몇 배는 더 강한 주먹이 날아올지도 몰랐다.
카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옆구리가 욱신욱신거렸지만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려 애쓰며 초면에 멋진 폭력을 선사해준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남자라는 말을 꽤 호되게 들은 후에야 소녀라고 하기에는 조금 미묘한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곱기는 했지만 목소리가 여자아이 치고는 낮았고-물론 남자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작고 날씬하기는 했지만 손목이나 발목 뼈가 다른 부분에 비해서 조금 굵었다.
'..그래도 헷갈리잖아.'
적어도 어깨까지 내려온 금발이 짧았더라면 좀 나았을 것을. 소년은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카이스를 불만스레 올려다보고 있었다. 카이스는 문득 빨간 눈을 가진 새끼를 낳았다며 어미고양이를 내쫒던 하인들에게 그를 끌고가 보여주고 싶었다.
불행을 불러오는, 재수 없는 적안- 보통은 다들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소년의 눈동자는 오히려 묘하게 금빛의 광택이 도는 것 같아 마치 따뜻한 화톳불 같았다.
카이스가 그런 상념에 빠져있는데, 묵묵히 있던 소년이 새침하게 입을 열었다.
"..이름은?"
"....카이스 루 메르티스."
잠시 멍하니 있던 그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둘 사이의 심상찮은 분위기에 억눌려 있던 나머지 두 소년도 화색을 띄며 입을 열었다.
"난 데이안 드 란타스. 그냥 데인이라고 불러."
"베리스온 루 헤레이안. 나도 그냥 베리스라고 하면 돼."
흐음. 카이스는 고개를 대강 끄덕이고 다시 앞에 서있는 소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자신들을 데인과 베리스라고 소개한 두 사람 역시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듯 소년은 굳어져있던 얼굴을 풀고 씨익 미소지었다.
"아시엘이야."
"......"
아시엘. 생김새와 행동 만큼이나 독특한 이름에 카이스는 속으로 한번 되뇌어보았다.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그만큼은절대 잊을 수 없을것 같았다.하지만 곧 그는 묘한 이질감을 느끼고 다시 아시엘을 바라보았다.
"그게 끝?"
"어?"
아시엘은 되려 무슨 말이냐는듯 한쪽 눈썹을 휘고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모르는 건가. 카이스는 더욱 이상한 느낌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성은?"
"없어. 아, 지금은 아시엘 아르셰인이라고 해야 하나?"
소년은 턱을 짚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그에 카이스와 데인, 베리스온은 약속이나 한듯 일제히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설마, 설마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던 데인은 얼어붙은 얼굴근육을 겨우 움직여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입을 열었다.
"아시엘, 그럼 너.. 평민이라는 소리야?"
"응."
아시엘은 당연하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 소년은 휘이잉- 마치 찬 바람이라도 부는 것같은 착각을 받았다.
물론 평민이라고 문제될 것은 없었다. 단지 생각도 못한 사실에 놀랐을 뿐이었다.
일단 외모는 빼더라도- 그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특유의 당당함이라거나 말투 같은 것들이 그들이 생각하던 평민들과는 전혀 달랐다. 베리스온은 떨떠름하게 입을열었다.
"아, 정말.. 몰랐어."
아니, 애초에 주먹을 날렸을 때부터가 문제였다. 아카데미 내에서는 신분 차별이 금지되어 있기는 하지만 보통이라면 감히, 라는 말을 해도 남을 일이었다. 그들의 반응이 영 시원치않자 아시엘은 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나랑 말 안할거야?"
"......"
어떻게 해도 자신은 상관없다는 말투에 베리스온과 데인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기 시작했다. 성에서 떠받들어져 살면서 평민들과 제대로 대화를나눠본 적도 없었지만 적어도 이런 식으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나오지는 않았던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아무래도 상관 없겠지 싶은 마음이 들어, 데인과 베리스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자 아시엘은 다시 한번 생긋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곧 옆에서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마음대로."
카이스는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툭 내뱉았다. 아시엘 역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뭐?"
"난 동의한 적 없어. 너희들끼리 알아서 잘 지내든지. 난 격 떨어지는 녀석과 사이좋을 생각 없어."
솔직히 자신이 생각해도 참 유치한 행태라고, 카이스는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나 이렇게 해 왔고- 이렇게 하라고 어머니에게 가르침받았으니까. 아시엘의 눈동자에 잠시 짜증의 빛이 서렸다가 곧 사라졌다.
또다시 이상해진 분위기에 데인은 끙 하는 소리를 냈다.
"저기, 카이스. 어차피 같은 방에서 지내야 하는데 기왕이면-"
"나랑은 상관 없다니까."
카이스는 딱 잘라 대꾸했다. 그에 베리스온이 무어라 더 말하려고 했지만 아시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음대로 해. 별 상관 없으니까."
그 말에 오히려 놀란 것은 카이스 쪽이었다. 그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겨우 10살 남짓한 어린아이답지 않은 말을 툭 내뱉은 아시엘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뭐..?"
"상관 없다고. 싫다는데 뭐 어쩌겠어?"
아시엘은 씩 웃으며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카이스는 차라리 어이가 없다못해 허탈해질 지경이었다. 적어도 화를 내거나 쌀쌀맞은 말이 돌아올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시원스러운 반응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었다. 그것은 다른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는지 황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모로 진짜 특이한 녀석이야. 아시엘을 제외한 세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모두 이렇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