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07화 (107/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01. 여자와 소년(4)

그 짧은 한 마디는 작았지만 순식간에 넓은 식당 전체에 엄청난 파급력을 미쳤다. 어색한 분위기에 음식만 입으로 퍼넣던 키프스는 포크를 떨어트렸고 백작과 백작부인은 뺨이라도 맞은 듯한 표정이 되어 소년을 바라보았다.

"..너. 방금 뭐라고..?"

페일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더듬더듬 되물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특히 아시엘은 그녀 앞에서는 항상 묵묵히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되받아쳐질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아시엘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웬만하면 입 다물고 있으려고 했는데 말이에요. 역시 그런 건 내 성격에 안 맞는것 같아요."

그는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씨익 웃었다. 기사들은 그 미소의 의미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화났어, 저녀석 분명히 열받았어! 그들은 한마음으로 소리 없이 외치며 식은땀을 흘렸다. 말릴 생각은 없었지만 말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페일은 그런 이상한 기류를 읽지 못하고 비웃음을 터뜨렸다.

"하! 천한 것이 입만은 살았구나. 제멋대로 혓바닥을 놀리다니."

"기왕 뚫려 있는 입이니 할 말은 하고 살려고요. 그리고 제가 제 혓바닥을 멋대로 놀리는데 따로 허락이 필요한가요?"

아시엘은 등받이에 편안하게 몸을 기대며 도발적으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는 농담처럼 한마디를 툭 내뱉았다.

"지나가는 개가 허락 받고 짖는거 봤어요?"

"뭐야?"

페일은 기가 막혀 허, 하는 소리를 내며 주먹을 꼭 쥐었다. 하지만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개 취급을 해 주셨으니까 부인을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그에 응해드려야지요."

".....큭!"

루이카엔은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다행히도 그녀는 그것을 듣지 못했는지 분노로 창백해진 얼굴로 아시엘만을 새파랗게 노려보았다. 소년 역시 지지 않고 페일을 당당하게 마주보았다.

"그 가벼운 입을 당장 닫지 않으면 후회하게 해 주마."

"후회는 이미 죽을만큼 하고 있어요. 선배들에게 놀림당할 게 하나 더 생겨버렸거든요."

그것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서로를 노려보는 것만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이번에도 페일이었다. 치밀어오르는 화를 겨우 진정시켰는지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였다.

"정말로 기사단의 수준을 알겠군. 이런 애송이가 멋대로 떠들게 내버려두다니. 뭐, 떠돌이 개들을 주워 모은다는 점부터가 문제였지만."

"-뭐. 방금 말했다시피 주워진 개니까. 주인님 말밖에 안 듣는다고? 아니, 주인님 말도 잘 안 듣지만."

조용히 듣고 있던 케빈은 낄낄 웃으며 끼어들었다. 손을 살래살래 내저으며 말하는 그를 힐끗 바라본 아시엘은 다시 백작부인에게 시선을 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네요."

"건방지긴.. 이래서 근본 없는 것들은 안 된다는 거다.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며놓는다고 바뀌는 게 있을 것 같아? 어차피 천한 몸에서 나온 천한 것일 뿐인데!"

그녀는 다리를 꼬며 도발적으로 내뱉았다. 아시엘은 상대를 깔아보는 오만함이 가득 찬 귀부인의 눈동자에서 고개를 돌려버리고 킥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이래서 안 된다니까요, 근본만 따지는 분들은. 혈통만 좋으면 바뀌는 게 없는 줄 아시나 봐요? 어차피 귀한 몸에서 나온 귀한 분이시니까 겉모습만 신경쓰고 내면은 어떻게 썩어들어가던지 상관 없나 보네요. 아, 물론 백작부인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에요."

여전히 태평하고 느긋한 어조였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은 날카로운 냉기였다. 원래 성격이 저랬던가, 키프스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초조하게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마찬가지로 그가 이런 식으로 차갑게 말하는 것을 처음 듣는 루이카엔과 케빈 역시 입가에 머물고 있던 미소를 딱딱하게 굳혔다.

결국 페일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이 무례한 것! 지금 나를 조롱하는 것이냐?"

"아니요. 부인께 드린 말이 아니라고 했습니다만, 어딘가 불편하신 데라도?"

아시엘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다. 하지만 웃음기가 싹 사라진 그의 붉은색 눈동자는 소름끼치도록 싸늘했다. 옅게 미소짓고 있는 입술과 차갑게 식은 눈. 페일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하다 곧 그것을 깨닫고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리고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자신 앞의 와인잔을 집어들고 내용물을 그에게 뿌렸다.

"....!"

촤악! 액체가 흩뿌려지는 소리가 작게 퍼지고, 홀 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식당에 있던 모두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그녀의  와인 세례를 고스란히 받아낸 아시엘 역시 그대로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어머니!"

"닥쳐!"

카이스가 벌떡 일어나며 외치자 페일은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그는 입을 닫아버렸고, 그녀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소매끝으로 얼굴을 닦고 있는 아시엘을 보며 누구에게랄것 없이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왜 아무도 말리지 않는거야! 이 천한 것이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고 있는데! 왜! 어머니에게 대들고 있는데 왜 너희들은 가만히 있는 거냐고!"

".....어머니."

카스란은 페일의 팔을 붙잡아 앉히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거세게 그를 뿌리쳐버리고 곧장 손을 들어올려 아시엘을 향해 손찌검을 날렸다. 아니, 날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루이카엔에 의해 허공에서 덥썩 붙잡히고 말았다.

"놔!"

"이 이상 저희 기사에게 손을 대시는 건 곤란합니다. 저희는 황제 폐하의 기사입니다. 그렇기에 저희를 벌할 수 있는 것은 폐하 뿐이십니다."

루이카엔이 잡은 손에 힘을 주자 페일은 눈을 새하얗게 치뜨고 그를 쏘아보았다. 그때, 조용히 있던 아시엘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올곧았지만, 읽을 수 없는 많은 말들이 그 속에서 조용히 맴돌고 있었다. 눈을 살짝 감았다가 뜬 그는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부인. 저를 경멸하고 증오하시는 것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저로 인해서 주위의 사람들까지 끌어들이지는 말아 주세요."

그의 금발과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술이 방울져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새하얀 제복은 이미 얼룩덜룩하게 더럽혀져버렸다. 페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숨을 몰아쉬며 아시엘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듯 다시 한번 옷깃으로 얼굴을 문질러 닦고 덧붙였다.

"더이상 민폐이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답지 않게, 모든 것을 내려놓은듯 무감정한 어조로 말을 끝마친 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빠져나가버렸다. 그들은 모두 점점 멀어져가는 그의 작은 등을 차마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한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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