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00. 여자와 소년(3)
선배들과 카이스, 키프스를 쫒아낸 아시엘은 닫어버린 문에 기대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을 수 있을까, 이번에도.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메르티스 백작 부인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아카데미에서의 마지막 학년이 시작되고 난 직후의 일이었다. 그 때의 모양새가 썩 좋지는 못했으니 다시 얼굴을 마주한다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는 뻔한 일이었다.
"후우.."
참을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참아야 하나? 그는 속으로 갈등하며 갈아입을 옷을 꺼냈다. 솔직히 그런 시비를 어느 정도 이상으로 참아주는 것은 답지 못한 일이었지만 카이스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 그러니까 일단은, 내가 참아야겠지?"
배알은 좀 꼴리지만. 아시엘은 내키지 않는 결론을 내리고는 입고 있던 것을 벗고 하얀 셔츠에 팔을 끼웠다. 바지까지 갈아입은 그는 깔끔하게 세탁된 제복 겉옷까지 걸치고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깨끗하게 닦인 유리 너머에는, 새하얀 옷으로 온몸을 감싼 소년이 새빨간 두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시엘은 새삼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화려한 금빛이 군데군데에 반짝이는 새하얀 제복. 이제 제법 익숙해졌다 생각했지만 오늘따라 굉장히 이질적인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반대편에 놓여있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그속에는 지금의 그보다 작고, 어리고, 약하고 꾀죄죄한 아이가 있었다.
".....아."
머리가 지끈거려와 아시엘은 손으로 눈 언저리를 부볐다. 그는 거울에서 등을 돌리고 터벅터벅 걸어 침대에 걸터앉았다. 지금의 자신. 아카데미 시절의 자신. 루이스를 만났을 때의 자신. 하지만, 그 전은?
아시엘은 생각을 그만두려고 애썼다.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겨우 잦아들었던 두통이 다시 치밀어오르고 있었다.
"후-"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을 푹 내쉰 그는 그대로 벌렁 드러누워버렸다. 폭신한 깃털의 감촉이 작은 등을 감쌌고 천장에 매달린 작지만 화려한 샹들리에가 눈에 들어왔다.
왜 갑자기 이런 잡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어놓는 것인지, 그로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잠깐 옛날의 생각을 해서일까. 아니면 답지 않게 참기로 결정해서 그런 것일까. 어느 쪽이든지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시엘은 방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네, 들어오세요!"
"아시엘 아르셰인 님. 저녁 만찬에 가실 시간입니다."
문 밖에서 시종의 정중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아시엘은 네! 하고 한번 더 대답하고는 재빨리 제복의 깃을 정리하고 헝클어진 침대보를 바로했다. 그리고는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레이피어를 벽에 기대어 똑바로 세워두고 총총 밖으로 나갔다.
"기다리셨죠?"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정중하게 밖으로 나온 그에게 고개를 숙이자 아시엘은 생긋 웃으며 사뭇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이 많은 시종은 조용히 미소지으며 허리를 더더욱 숙였다.
"아닙니다. 시장하실 터이니 어서 가시지요."
아시엘은 적당한 속도로 앞서가기 시작하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오랜 시간동안 일해온듯 행동과 몸짓 하나하나가 군더더기 없어보이는 노인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시엘은 갑자기 그가 입을 열자 움찔하고 말았다.
"아시엘 아르셰인 님. 당신이 카이스 도련님의 가장 친한 친구분이라고 들었습니다."
"네? 네.. 뭐."
아시엘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후후, 하고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저는 이 성에서 일해온 지 30년이 다 되어갑니다만 막내 도련님의 친구분을 만나뵈는 것은 처음이로군요,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아니요, 부탁은 제가 드려야지요."
아시엘은 그를 따라 히히 웃었다. 시종은 또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 여러가지로 주인님과 주인마님 사이에서 문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신경 쓰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오신 분들이기 때문에 전 주인님 역시 포기하고 마셨지요."
"그러셨군요."
아시엘은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히 지난번 카이스에게 들었던 바로는 그의 아버지, 즉 전 메르티스 백작은 키프스와 비슷한 성격이라고 했으니까.
시종은 커다란 식당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이곳입니다. 어서 들어가 보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아시엘은 예의바르게 인사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화려하게 장식된 문을 통과하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원목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식탁이었다. 고풍스럽게 꾸며진 의자와 식탁이 붉은 원단 카펫 위에 고이 올려져 있었고 천장에는 화려한 보석으로 꾸며진 커다란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벽 역시 여러가지 태피스트리와 조각 등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꽤 삭막한 편인 복도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인테리어에 아시엘은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케빈이 손짓하며 부르는 소리에 장식들에게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여, 꼬맹아! 어서 와서 앉아. 백작님과 부인은 아직이라더군."
"꼬맹이라고 부르는 거 그만둬 달라니까요."
아시엘은 툴툴거리면서도 그쪽으로 다가가 루이카엔의 옆 빈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맞은편에 있는 카이스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빙그레 웃었다.
"....."
카이스는 얼굴을 살짝 굳히면서도 방금 꺼내려 한 걱정의 말은 도로 집어넣기로 했다. 물론 미리 말을 막아버린 친구를 불만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하지만 아시엘은 다시 한 번 히죽 웃어보이고는 말끔한 모습이 된 선배를 향해 말을 건넸다.
"케빈 선배, 키프스 님은요?"
"아아, 나중에 백작이랑 같이 들어온다고 하더라. 사이 좋구만. 그나저나 너 뭐 먹을 수 있겠냐? 속 괜찮아?"
"적당히는 괜찮지 않겠어요?
아시엘은 대수롭지않게 대답하고 테이블 위를 훝어보았다. 에피타이저로 간단한 빵과 와인이 예쁘게 담겨 있었다. 솔직히 뭘 먹을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직까지 속이 얼얼하니 아려오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억지로라도 먹어야 할까, 하고 그가 고민에 빠졌을 때 마침 문 앞에 서있던 어린 시동이 우렁차게 외쳤다.
"백작님과 백작부인, 그리고 키프스 님께서 들어오십니다."
"오오, 드디어로구만."
루이카엔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머지 이들도 그를 따라 몸을 일으키고, 입구에 나타난 세 사람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백작부인은 소문 그대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타는 듯한 붉은색 머리칼을 멋스럽게 틀어올려 반짝이는 보석 머리핀으로 고정시키고 있었고 ,새하얀 피부에는 옅은 화장기가 나이를 숨겨주고 있었다.
우아한 검은색 드레스로 몸을 감싼 그녀는 백작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상석에 놓여있는 가장 화려한 의자에 앉았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메르티스 가의 안주인, 페일. 드. 메르티스 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루이카엔은 기사들을 대표해 정중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예의를 차렸다. 그러자 자신을 페일이라고 소개한 백작부인은 입가에 곡선을 그렸다.
"아닙니다. 오히려 도움을 주시러 온 것에 감사하고 있답니다. 어서 앉으시지요."
"감사합니다."
루이카엔은 그녀에게 한번 더 고개를 숙이고는 일행들과 함께 다시 자리에 앉았다. 페일은 고고한 눈으로 식탁에 둘러앉아있는 이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 시선이 카이스에게 닿았을때 그녀는 더없이 화사하게 웃으며 반가운 소리를 냈다.
"카이! 오랜만이구나. 성에 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단다. 하지만 어째서 바로 이 어미에게 오지 않았니?"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머님."
순수하게 기뻐하는 것이 아닌, 일부러 과장한 몸짓을 읽어낸 카이스는 평소보다도 무뚝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잘 지냈니? 밖에서 고생하지는 않았고?"
"예. 아주, 잘, 지냈습니다."
카이스가 일부러 한글자 한글자 또박또박 끊어서 하는 말에 페일은 입가를 길게 늘어진 옷소매로 가리고는 호호, 하고 웃었다.
"그거 다행이로구나. 한층 마음이 놓였어. 그런데-"
그녀는 말꼬리를 늘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즐거워하던 그녀의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느낌에 근처에서 시중을 들던 시종들은 움찔하고 몸을 사렸다. 아니나다를까, 페일의 입에서 겉으로는 친절하지만 날이 박혀 있는 말이 흘러나왔다.
"저건 어째서 이 자리에 있는 거지?"
"....."
그녀의 시선은 정확히 아시엘에게 꽂혀 있었다. 묵묵히 허공만을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돌려 친구의 어머니이자, 백작부인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지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부인."
페일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그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둘 사이에 끼인 꼴이 된 루이카엔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잠시 식당 안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곧 백작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지? 설마 아직도 카이와 함께 다니는 것은 아니겠지."
"....."
아시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하지만 그것이 더욱 그녀를 자극한 것인지 페일은 한층 날카로워진 얼굴로 하, 하고 비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그래. 같은 제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분명 그랬겠구나. 난데없이 셀레니스 기사단에 들어간다는 것부터가 이상했는데 역시 너 때문이었어."
"...."
아시엘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자 케빈과 루이카엔, 키프스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아까처럼 농담으로 넘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부인의 표독스러운 말이 이어졌다.
"너 따위의 근본도 없는 게 내 아들 옆에 붙어있으니 집안 모양이 이렇게 된 거야. 당장 꺼져버려!"
"어머니!"
쾅! 결국 참다못한 카이스가 테이블을 치며 외쳤다. 그녀는 새파랗게 분에 찬 눈동자를 아시엘에게서 자신의 아들 쪽으로 옮겼다.
"왜! 왜 아직까지도 천것이랑 어울려 다니는 거야! 네가 뭐가 부족해서?"
"..어머니."
카스란의 조용한 부름에 페일은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백작은 어느새 벌떡 일어나 있는 어머니의 팔을 붙잡아 다시 자리에 앉혔다.
"고정하십시오. 그리고 너무 심한 말씀은 자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의외의 원군에 아시엘과 카이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소년의 의아함에 찬 시선을 느꼈지만, 백작은 애써 무시하며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 일단 저 아이 덕분에 저는 목숨을 건졌으니까요."
"....."
이미 전해 들은 말이 있는지, 페일은 분에 차 입술을 꾹 깨물면서도 더이상 말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세를 바로 하고 심호흡을 몇 번 한 후 다시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만 흥분해 버렸군요."
"....."
보통이면 괜찮습니다, 와 같은 말이 나올 타이밍이었지만 루이카엔이나 케빈이나 형식적이라도 그런 것은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결국에는 침묵의 연장선으로 언쟁이 진정되자 곁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하녀들이 다가와 요리를 하나하나 내어 놓기 시작했다.
어색한 침묵 가운데에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조용하게 식기를 움직이는 소리만이 넓은 식탁에 드문드문 들려올 뿐 그 이상의 대화는 일절 오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와인을 한잔 들이킨 백작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괴물을 퇴치해 주시러 여기까지 와 주셨으니 감사드립니다. 목숨도 아끼지 않고 백성들을 구제하러 제국 곳곳을 누빈다니, 정말 진정한 기사분들이시군요."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루이카엔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는 의중이 도무지 파악되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후 이어진 말에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렇게 일이 힘드니까 역시 인원이 많이 모자라시나 보군요. 저런 것도 기사로 받아주시니 말이에요. 아, 아니면 고급 인력은 그때그때 충당할 수 없으니까 그런 건가요? 어차피 힘을 잃어가는 황제 폐하가 그때그때 쓰고 버리는 사냥개일 뿐이니까."
케빈 역시 불쾌하게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포크를 놓아버렸다. 달그락 하고 차가운 금속의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번에야말로 그냥 넘어가기에는 틀렸다는 생각에 키프스는 안절부절하며 어머니의 말을 막으려고 했다.
"어머님..!"
"왜? 틀린 말도 아니잖아. 나는 그저 미래를 걱정하는 것 뿐이란다."
하지만 페일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마침내 케빈이 참지 못하고 아까의 카이스처럼 테이블을 쾅, 때렸다.
"이봐-"
"..그런 사냥개에게 영지의 안위를 맡기시고 이렇게 만찬까지 가지고 계신 부인도 참 태평한 분이시로군요."
하지만 그의 말을 자르고 먼저 툭 말을 내뱉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시엘이었다.
이때까지 묵묵히 그녀의 폭언을 듣고만 있었던 것과는 다르게 그는 입가에 특유의 미소를 띄우며 여유롭게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아...시엘?"
친구가 놀라 부르는 목소리에 아시엘은 웃는 얼굴 그대로 조용조용하게 말을 이었다.
"미안해 카이. 죄송해요. 키프스 씨, 루이카엔 씨 그리고 케빈 선배. 그런데 아무래도 나-"
그는 잠깐 멈추고 크게 한숨을 내쉬며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일련의 동작에 일동은 모두 숨을 죽였다. 그리고 마침내 아시엘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나 더 이상은 못 참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