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88. 양극화의 그림자(1)
어두운 지평선의 먼 곳에 작은 마을의 입구의 불빛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들은 저마다 말고삐를 붙잡고 속도를 차츰 줄였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으아아아아-!! 멈춰!"
신명나게 달리는 말을 전혀 통제하지 못한 아시엘이 비명을 지르며 쏜살같이 멀어지자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 역시. 이럴 줄 알았어."
"내 말이."
루이카엔과 케빈의 한탄에 카이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두어번 내저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가 능숙하게 말에게 박차를 가해 아시엘의 뒤를 따라가자 케빈은 황망한 얼굴로 하,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 참. 저녀석은 사소하게 한심한 짓을 한다니까."
"뭐, 너무 완벽한 것보다는 훨씬 보기 좋지만."
루이카엔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의 눈은 여전히 먼 곳에서 정신없이 달려나가고 있는 아시엘을 쫒고 있었다. 그나저나-
"...도대체 어디까지 갈 셈이야? 저녀석."
"... 그러게."
아무래도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었던 듯 케빈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탄 두 소년은 반짝이는 별들을 등에 지고 미친듯이 질주하고 있었다. 카이스의 것보다 더 작은 아시엘의 실루엣에서 아아아아아-! 하는 비명이 들려오는 것 같은 기분에, 루이카엔과 케빈은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잠시 후, 무사히 아시엘을 구출(?) 한 카이스는 친구의 말고삐까지 잡은 채 두 선배 쪽으로 돌아왔다.
"어이, 괜찮아?"
"하..하하하.. 네, 어떻게든."
루이카엔의 웃음 섞인 걱정에 아시엘은 헬쓱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스는 그런 그에게 손을 뻗어 엉망으로 흐트러진 금발을 정리해 주었다.
"아카데미 졸업 시험에 승마 과목의 비중이 조금만 더 컸으면 너 수석은 고사하고 졸업도 못 했을걸."
"하하... 매번 미안."
가출했던 정신을 얼추 되찾은 아시엘은 뻘쭘한 미소를 지으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루이카엔은 그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대 발견이네. 아시엘의 약점이라니."
"이것 뿐만이 아니에요. 체구가 작아서 그런지 수영도 잘 못하고."
아시엘은 툴툴거리면서 제복을 말끔하게 다듬었다. 그러고는 말의 목을 아프지 않게 톡톡 치면서 원망스럽게 말을 건넸다.
"좀 참아 주라, 정말."
"아서라, 꼬맹아. 그런다고 그놈이 알아듣겠냐? 얼른 가기나 하자."
케빈은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하고는 자신이 타고 있는 말을 재촉해 마을의 입구 쪽으로 앞서갔다. 하여간 성질 급하기는, 하고 작게 투덜거린 루이카엔은 아시엘과 카이스 쪽을 돌아보았다.
"자, 가자. 이제 괜찮지?"
"네."
아시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고삐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카이스는 그것을 부드럽게 빼앗아 들었다.
"아.."
"이쪽이 편해, 지금은. 곧 또 멈춰야 하니까."
그는 자신의 말을 아시엘의 말에게 가까이 몰아 나란히 섰다. 그러고는 안장에 앉은 채 아직도 벙쪄 있는 아시엘에게 옅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럼 가자."
"어. 고마워."
아시엘은 쑥쓰럽게 웃으며 뒷통수를 긁적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선배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 역시, 허술한 쪽이 보기 좋다니까."
나란히 말을 타고 가까워지는 두 후배들을 바라보며 루이카엔은 흐뭇하게 중얼거렸다.
그 때, 먼저 가있던 케빈이 결국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야! 너네 안 오냐! 대충 끼니라도 때우고 가자며?"
"간다, 가."
루이카엔은 커다랗게 대꾸하고는 말을 몰아 그에게로향했다. 카이스 역시 속도를 조금 올려 아시엘을 끌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입구에서 횃불 옆에 서 보초를 반쯤 졸며 서고 있던 경비병은 말을 탄 네 사람이 나타나자 재빨리 자세를 바로 하고 몸을 빳빳하게 세웠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황제 소속 셀레니스 기사단이다. 문을 열어."
루이카엔은 가장 앞으로 나서며 명령했다. 그들의 하얀제복을 확인한 경비병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음?"
어두운 중에도 그의 표정 변화를 확인한 아시엘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루이카엔 역시 미묘하게 바뀐 분위기를 느끼고는 짧게 혀를 쯧, 찼다.
"문을 열어라."
"......."
경비병은 무어라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몸을 홱 돌려 밍기적밍기적 문에 걸린 잠금장치를 풀기 시작했다.
아무도 듣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사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들을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아시엘은 경비병이 미세하게 내뱉은 단어 하나하나를 또렷하게 잡아낼 수 있었다.
'.. 흐음.'
빌어먹을, 이라. 황제의 기사 앞에서 하기에는 상당히 불손한 그의 말을 머릿속으로 읊조리며 아시엘은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잠시 후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육중한 문이 열리자 네 사람은 안으로 말을 몰았다.
마을과 외부의 경계선이라 그런지, 인가가 드문드문 눈에 들어올 뿐 내부는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 뭔가 싫은 예감이 드는데요."
"아직 중심지로 들어가지 않아서 그래. 원래 이 곳은 우리 영지와 여행자들에게 물건을 납품하며 성장한 도시니까."
아시엘이 억지로 웃으며 하는 말에 카이스는 짧게 설명을 했다. 하지만 아시엘은 원하던 답이 아니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게 아니라 방금 저 경비병도 그렇고. 그냥 느낌이 그렇다고. 신경쓰지 마."
"아니, 네 느낌은 꽤 정확한 편이니까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지. 그리고-"
루이카엔은 장난꾸러기처럼 씨익 웃으며 이미 닫혀버린 뒤쪽의 문을 가리켰다.
"저 밖에 있는 경비병이 혼자 꿍시렁거리던 거, 넌 들은 거지? 그리고 그건 딱히 우리에게 호의적인 말은 아니었을 테고."
".. 네."
아시엘은 조금 움찔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저 사람은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다 눈치를 채 버리는 걸까. 다른 사람이 알아차렸다면 '너도 그래 임마' 라고 외쳤을 생각을 하면서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뭐, 너무 걱정하지 마. 설마 별일이야 있을라고. 그리고 우리한테 '별 일' 은 항상 따라다니는 거니까.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배고파 죽겠어."
하긴, 그렇긴 하지. 케빈의 말에 아시엘은 물론이고 루이카엔과 카이스까지 동감하며 김빠진 웃음을 터뜨렸다.
눈에 띄는 인가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들은 말에서 내려 걸어가기로 했다. 혹시나 사고가 날까 봐 염려되는 것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 아시엘이 말한 싫은 예감이 뭔지 알겠네."
케빈의 말대로, 가면 갈수록 사람들의 눈총이 따가워졌기 때문이었다.
무시할래야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이곳 사람들의 시선에는 선명한 경계심과 적의가 박혀 있었다.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완전 미움받고 있는 것 같은데."
루이카엔은 작게 소근거리면서도 재미있다는 듯 빙긋이 미소지었다. 확실히- 아시엘은 "네" 하고 대답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가 쪽으로 들어서면서 확실히 처음보다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길을 가면서도 일행을 찌푸린 얼굴로 유심히 바라보거나, 혹은 경멸하는 눈초리로 살기가 느껴질 정도로 쏘아보았다.
"그것 참 곤란하게 됐네. 이 마을 길은 카이스가 알지?"
"네. 대충은.. 하지만 여기에서 번화가까지 가는 길은 잘 모르겠습니다."
카이스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자주 와 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기억 속에서 이 곳, 로크란 사람들은 활기차고 정이 많은 분위기였다. 옛날에 둘째 형과 함께 잠시 나왔을 때는 분명히 그랬었다.
"아무래도 우리 제복이 문제인 것 같은데."
"그런 것 같군. 아마 대공 쪽의 '브로커' 들이 다녀간 모양이네."
케빈이 투덜거리자 루이카엔은 완전히 질렸다는 투로 대꾸했다. 그러자 아시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브로커가 뭐에요?"
"정확히 말하자면 정치 브로커지. 실질적으로 정치 활동은 하지 않지만 돈을 받고 해당 정치인의 홍보를 하고 바람을 잡지. 한 마디로 여론 조작꾼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결론은, 이 지역은 완전히 대공의 손에 들어갔다는 거지."
단장의 말에 아시엘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파와황제파로 양쪽이 극명하게 갈라진 상황에서 귀족들은 물론이고 종교와 언론, 여론까지 서로 대립하여 내가 맞네, 네가 틀리네 하고 끝없이 다툼이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루이카엔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물론 우리쪽도 브로커를 고용하긴 하지만 사실 셀레니스 기사단의 영향이 더 크지. 여러 지역의 골칫거리를 손수 해결해 주며 민심을 산다. 그게 우리를 파견 보내는 폐하의 속셈이니까."
"분위기를 보니까 폐하는 인자하고 백성을 살뜰하게 보살핀다는 설정이고, 대공 전하는 절대적인 카리스마로 백성들을 이끈다, 뭐 이런 컨셉인것 같네요.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아시엘이 찝찝한 얼굴로 운을 떼자 모두들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시엘은 그것을 인지하지못하고 하고 싶었던 말을 툭 내뱉았다.
"양쪽 다 참 치사한 것 같네요."
".....풉!"
진심이 200%는 담겨있는 것 같은 그 솔직담백한 말에 루이카엔과 케빈은 순간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급히 입을 틀어막으며 허리를 숙였고, 카이스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친구를 바라보았다.
"왜? 왜 그래요?"
물론, 그 원인 제공자인 아시엘은 영문을 몰라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