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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셀레니스 기사단-89화 (89/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85. 메르티스 가(1)

그 후로 며칠이 지났다.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졌지만 고민에 빠질 틈도 없을 만큼 바쁜 나날에 잠깐의 브리핑 이후에는 그 구슬과 변종 몬스터는 어느새 모두의 머리 한구석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아시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의 하루에 2번 꼴로 단거리 임무에 나가며 시달리다 보니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던 중, 그가 여기저기 피해 다니며 마약을 팔던 한 남자를 반쯤 조져서 감옥에 처넣은 어느 날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네? 루이카엔 씨가 절 부르신다고요?"

"어. 쉬고 싶겠지만 가 보는게 좋겠다. 네가 기다리던 건이거든."

막 생활관으로 복귀한 아시엘은 느닷없는 슌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기다리던 건? 그런 그의 의문을 알아차린 듯 슌은 빙그레 웃으며 덧붙었다.

"그 괴물들 말이야. 메르티스 가 영지의 어느 도시에 출몰했다는군."

"...메르.. 티스 가면.. 설마 카이네 쪽?"

아시엘이 경악하며 눈을 커다랗게 뜨자 그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맞아, 그 메르티스."

"....!"

슌의 말이 끝나자 마자, 아시엘은 땀을 닦던 수건도 던져버리고 루이카엔이 있는 집무실 쪽으로 후다닥 달려가기 시작했다. 답지 않게 허둥지둥하는 그의 뒷모습을눈으로 쫓던 슌은 쿡,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 어찌됬든 힘내라고. 귀엽고 유능한 후배님."

아시엘은 집무실 앞에 다다라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막 일을 끝내고 온 터라 꽤 지쳐 있었지만 그것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지금 온갖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왜 하필 메르티스 가일까, 였다.

"아 진짜.. 왜 하필.."

"아시엘."

한참 머리를 쥐어뜯으며 신경질을 내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아시엘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마찬가지로 루이카엔에게 불려온 듯한 카이스가 그의 어깨를 짚고 서 있었다.

"뭐야, 카이였어? 놀랐잖아."

"미안. 그것보다 너도 들었지?"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평소보다 더 굳은 듯한 친구의 목소리에 아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께서 고생이 많으시겠네. 너도 걱정되겠다."

"... 너란 녀석은 참."

카이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친구의 조그만 등을 떠밀었다. 아시엘은 어, 어? 하며 당황하면서도 그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여전히 사이 좋네."

루이카엔은 얼핏 보면 서로 장난치는 것처럼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고 웃으며 손을 설렁설렁 흔들었다. 아시엘은 어째 무안해져 헤헤 웃으면서 자세를 바로 했다.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어, 둘 다 이리 와서 앉아."

루이카엔은 먼저 들어와 있던 케빈과 아델레트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손짓했다. 두 사람은 그쪽으로 다가가서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너희들도 전달 받았겠지만 메르티스 가 영지의 도시, 시스란에 그 변종 몬스터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번에는 한 마리 뿐인 듯 하고. 인구가 적은 지역이지만 피해가 심각한 것 같아."

단장의 말에 그들은 얼굴을 살며시 굳히고 귀를 기울였다. 루이카엔은 두 소년에게 그림이 그려진 중이 한 장을 들어 보여주었다.

"..이게 뭐에요?"

"몬스터의 초상이래. 그쪽에서 보내줬어."

아델레트의 간략한 설명에 아시엘은 그것을 꺼림직하게 들여다보았다. 일단 대충 형태는 사람과 비슷했다. 머리가 있고, 팔다리가 2개씩 있었으며 몸통도 있었다. 하지만 그 그림 속의 존재는 굉장히 흉측했다.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가 검은색 색연필로 무자비하게 낙서해놓은 것 같은 섬뜩한 모습.

"저번에 나타났던 놈이랑 똑같은 종류인 것 같아. 방금 케빈이 확인했어. 그쪽에서 올라온 보고서도 그때 파견나갔던 애들이 했던 말과 비슷하게 적혀 있었고."

루이카엔은 책상 위에 쌓인 서류더미들 중 한 장을 골라 아시엘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카이스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대충 요약하자면.. 출몰한 몬스터는 한 마리. 인가를 마구잡이로 공격해 피해가 속출. 영주의 사병들로 퇴치를시도했으나 실패.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 크기는- 잠깐만요, 케빈 선배! 얘네 인간의 2~3배 크기쯤 된다고 안 했어요?"

마지막 대목에서 아시엘은 경악해 목소리 톤을 올리며 케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케빈은 '낸들 알겠냐' 하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 놈은 그 2배쯤 되는 크기인가 보지."

"..헐."

아시엘은 감탄인지 욕설인지 모를 말을 내뱉고는 다시 종이로 시선을 주었다. 사상자 34명, 피해금액 5천골드 이상 등등의 온갖 살벌한 것들이 적혀 있는 글은 '그러므로 셀레니스 기사단의 지원을 바람' 이라는 말로 끝나 있었다.

"말뽄새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뭐 어쩌겠어. 메르티스 가문은 중립이니까 걸핏하면 대공 쪽으루 돌아서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해 댄단 말이야. 세력도 꽤 크니까 무시할 수도 없고."

눈앞에 메르티스 백작가의 셋째 아들이 앉아 있었지만 루이카엔은 아랑곳하지 않고 얹짢은 말을 쏟아냈다. 하지만 정작 기분 나빠해야 할 당사자는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아시엘, 널 부른 거야. 저번에 너를 보내달라고 했었지? 카이스도 길 안내역으로 필요할 테니 두 사람을 넣어서 팀을 짜면 어떨까, 하고."

"그래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아시엘은 환하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갑자기 잠자코 있던 카이스가 끼어들었다.

"..아시엘은 안 갔으면 합니다."

"뭐?"

뜻밖의 말에 루이카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그러자 카이스는 다시 한 번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다.

"아시엘은 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괜찮지만 아시엘은 이곳에 남게 해 주십시오."

"카이!"

아시엘은 당황해서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는 뜻을 굽힐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카이스가 아시엘을 떼놓으려 한다는, 아주아주 진귀한 광경에 루이카엔은 물론이고 케빈과 아델레트까지 의아해져 두 사람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카이스는 단호한 말투로 딱 잘라 말했다.

"안 돼. 너 괜히 갔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괜찮아. 나 그런거 신경 안 쓰는거 알잖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시엘은 아까 그가 걱정하던 것이 영주인 자신의 형과 메르티스 백작가가 아닌,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이 둘도 없는 친구가 왜 이렇게 나오는지도.

"내가 안 괜찮아. 그리고 괜찮은 척 하면서 매일 혼자 끙끙거리는 네 성격, 내가 모를 줄 알았어?"

"......"

할 말이 없어진 아시엘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꾹 다물었다. 드물게 큰 소리를 낸 카이스 역시 입을 다물고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잠시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던 루이카엔은 쓰게 웃으며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카이스, 어쩔 수 없어. 지금 당장 파견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너랑 아시엘까지 합쳐서 4명 뿐이니까."

"......"

카이스는 대꾸하지 않고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아시엘역시 친구의 기분이 풀리지 않자 찜찜한 얼굴로 괜히 주변만을 휘휘 둘러보았다.

순식간에 어색해진 기류에 루이카엔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공기를 바꿔보려는 듯 일부러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활짝 펴며 씨익 입가에 곡선을 그렸다.

"그리고 걱정 마. 이번에는 나도 같이 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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