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77. 대전회의(1)
"선배, 왜 이제 나오셨어요?"
먼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시엘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제르닌은 고개를 부드럽게 저어보였다.
"아무것도 아니다. 가자."
그는 아시엘의 머리에 살짝 손을 얹었다 내리고는 앞질러 걷기 시작했다. 아시엘은 영문을 몰라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우며 그의 손이 스쳤던 곧을 매만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그는 자신을 내버려두고 저만치 가버린 제르닌을 따라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해야만 했다.
빠른 속도로 걸은 덕분인지,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성의 외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을 지키던 경비병은 앞을 막았다가 그들의 얼굴을 보고는 얼른 비켜서며 절도있게 경례를 했다.
"수고하십니다. 어디 다녀오십니까?"
"잠깐 외출."
제르닌은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며 짧게 대꾸하고 먼저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시엘은 그 무뚝뚝한 반응에 뻘쭘해 져 멍하니 서있는경비병에게 살짝 미소지어주었다.
"수고하세요."
"......예? 예, 예."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의미로 멍해진 경비병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시엘은 왜 그가 버벅거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다, 종종걸음으로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제르닌에게 달려갔다.
"아시엘. 정말 저 자가 왜 저러는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네?"
그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제르닌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남자로 태어나서 통탄할 일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여자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무슨 소리에요?"
".. 무자각도 큰 죄라는 거지."
아시엘은 여전히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더 이상 물으면 봉변을 당할 것 같아서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제르닌 역시 화제를 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대전회의에서는 지난번의 그 제 5경비대 사건에 대한 처분을 논의할 거라고 하시더군. 그 증인으로 이번에 너와 나를 호출하신 듯 하다."
"저희가 가서 뭘 하는데요?"
아시엘의 질문에 그는 잠시 주변을 살펴 엿들을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작은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표면적으로는 그 사건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폐하와 대공 전하의 판례를 받아 실행하는 것. 하지만 정말로 해야 할 일은 일의 결과를 최대한 폐하에게 유리한 쪽으로 돌리는 것이지. 일단 발견된 구슬과 지하감옥의 일에 대해서는 함구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게 대공 측의 일이라면 이미 우리가 발견한 걸 알고 있을테고.. 괜한 혼란만 일 테니까."
얌전히 이야기를 듣던 아시엘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겠네요. 그게 아직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데 공표했다가는.."
그는 얼굴빛을 약간 흐리며 말꼬리를 늘렸다. 잠시 그렇게 침묵하나 싶더니, 아시엘은 사뭇 명랑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교수님께서 받아들여주셔서 다행이에요. 솔직히 자신 없었거든요."
"자신 없었다는 녀석이 그렇게 당당하게 방법이 있다며 나섰던 건가."
제르닌은 어이가 없어져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무뚝뚝하던 얼굴에 잠시나마 선명한 미소가 감돌자 아시엘은 기분이 좋아져 헤헤 웃으며 후드자락을 당겼다.
"뭐.. 다른 방법이 없기도 했었구요. 그리고 그렇게 당당하지는 않았어요."
"..그렇다고 해 두지."
제르닌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얼굴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아시엘은 괜히 억울해져 울상을 지었다.
"정말이라니까요?"
"알겠다니까."
건성으로 대답하는 그를 잠시 원망스레 바라보던 아시엘은 갑자기 묘한 얼굴을 했다.
"선배.. 오늘따라 얼굴근육이 참 활발하신 것 같아요."
"뭐?"
제르닌은 그제야 자신이 미소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재빨리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자, 아시엘은 피- 하고 아쉬운 듯한 소리를 내더니 그를 앞질러 걷기 시작했다.
'..뭐지?'
왜 그렇지? 곰곰히 머리를 굴리던 그는 문득 조금 앞서서 걷고 있는 아시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새 기분이 풀린 건지 날아가는 새에게 시선을 빼앗긴 작은 뒤통수. 그러자 놀랍게도 아무려면 어때, 하는 생각이 제르닌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결국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생활관이 점점 가까워져오고 있었다.
두 사람이 생활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어느새 제복으로 말끔히 갈아입은 루이카엔이 그들을 반겼다.
"왔어? 갔던 일은?"
"잘 된 것 같아..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제르닌은 텅 빈 로비를 휘 둘러보며 묻자 루이카엔은 뒷통수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근처 영지들에 갑자기 A급 몬스터들이 출몰했다는 신고가 들어와서. 3놈씩 조 짜서 다 나갔어."
"수도 근처 영지에요? 하지만 이 근방은 산도 없고.. 몬스터 출몰 지역도 아니지 않아요?"
보통 몬스터들은 서식하기 좋은 숲이나 산,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사막에 출몰하는 일이 잦았다. 가끔 강한 A급 몬스터들이 마을까지 내려오는 경우는 있었지만 수도 근처의 영지는 개발로 숲도 얼마 없었고 지형상 평지에 가까워 산도 없었다.
아시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루이카엔 역시 골치아프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내 말이.. 이놈들이 갑자기 돌아버리기라도 한 모양이지. 어쨌든 그쪽은 다른 애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 너흰 어서 씻고 준비해.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네..에."
아시엘은 영 석연찮은 얼굴을 하면서도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것도없었고, 당장 눈앞에 닥친 대전회의부터 끝내고 봐야 할 일이었다.
루이카엔은 그런 그의 생각을 대강이나마 짐작했는지 장난스럽게 아시엘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걱정하지 마. A급이라고 해 봤자 주인 행패에 스트레스 쌓인 기사들 칼질 한 번이면 5조각으로 썰려버릴걸. 카이스가 파견 나간 곳은 다른 데고."
"아.....하하."
어째 동료들이 몬스터를 샌드백 삼아 신나게 두들기는 장면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져 아시엘은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상상하지 말자, 애써 자신을 타일러 그 영상을 머릿속에서 지운 그는 칙칙한 색깔의 망토를 벗어 팔에 걸쳤다.
"어쨌든 저 먼저 준비하러 갈게요. 아까 수련하고 나서도 못 씻었으니까.."
"어. 천천히 해."
루이카엔은 빙긋이 웃으며 손을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리고 아시엘이 샤워장 안으로 사라지자, 제르닌은 기다렸다는 듯 그의 어깨를 툭 쳤다.
"....? 왜 그래?"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아침에 보니 너나 아시엘이나 둘 다 숙취때문에 하얗게 떴더군."
그 녀석은 별로 티도 안 냈지만, 하고 덧붙인 그는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루이카엔을 바라보았다. 잠시 이 예리한 친구를 마주 바라보던 루이카엔은 곧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별로. 잠깐 술 한잔 하면서 신세타령이나 했을 뿐이라고."
"..신세타령?"
제르닌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의 말을 따라했다.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루이카엔은 씨익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쿡, 하는 소리를 냈다.
"이봐, 제르닌."
"왜?"
"나 결심 하나 했어."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그 뜬금없는 말에 제르닌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루이카엔은 몸을 홱 돌리며 검지손가락을 뿅, 하고 세워보였다.
"나, 그 녀석 형 할거야."
"...뭐?"
이번에야말로 제르닌은 완전히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봤자 입을 살짝 벌리고 눈썹을 치켜올리는 것 뿐이었지만- 오랜만에 보는 그의 격한 반응에 루이카엔은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아, 딱히 큰 뜻이 있는 건 아니야. 그냥 그렇다고."
".. 아시엘 녀석은 동의한 거냐?"
제르닌은 더이상 태클 거는 것을 포기하고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이없다는 눈길로 친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루이카엔은 아랑곳않고 싱긋 입가에 상큼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닌데? 그냥 내가 하는 거야. 하고싶으니까."
"...... 오랜만에 네놈의 그 쓸데없는 고집을 보니 새삼 골치가 아프군. 아니, 골치 아플 녀석은 아시엘인가."
루이카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말하는 오랜 친우를 향해 빙그레 웃음지었다.
"...."
제르닌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를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잠시 그대로 있던 그는 곧 몸을 홱 돌리며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 알아서 해. 그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것 같으니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아시엘 녀석도 너에게 꽤 의지하는 것 같고."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게 그것일지도 모르고. 제르닌은그런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루이카엔의 사정을 잘 아는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친구를 도저히 말릴 수 없었다.
"그렇지?"
루이카엔은 장난스레 말하며 굳어 있는 제르닌의 어깨를 툭 쳤다.
"얼른 준비나 하라고. 난 생활관을 지켜야 하니 같이 갈 수는 없지만 어쨌든 잘 부탁한다."
"쓸데없는 말을."
제르닌은 그의 손을 탁, 치우고는 천천히 자신의 방이 있는 2층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루이카엔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지었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그런 부드러운 미소.
"..택도 아닌 소리를 했다는 건 나도 알아."
어쩌면 내 이기적인 마음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작게 중얼거린 그는 손을 제복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그래도 뭐, 상관없나."
확실한 것은 그가 소년이 뻗어온 손을 덥썩 붙잡았다는 사실. 그리고 아마 절대로 끊어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었다. 그것이 단지 루이카엔 혼자만의 기분이라고 해도.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 루이카엔은 흥흥, 하고 콧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가벼운 벌걸음으로 천천히 집무실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