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72. 그의 이야기(2)
"어?"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던 아시엘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무도 없을 것 같았던 로비에 희미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기척을 내지 않으려 애쓰며 계단을 마저 내려가 천천히 걸어갔다.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불빛을 등지고 소파에 앉아있는 인영이 보였다.
'..루이카엔씨?'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은 분명히 단장의 것이었다. 하지만 왜 여기에? 아시엘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고민들을 한구석으로 밀어 넣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나름 조용하게 움직인다고 했는데 역시 기사단 최고 실력자의 감각은 무시할 수 없었다. 아시엘이 몇 걸음 가지도 못했을 때, 루이카엔은 기척을 느끼고 뒤로 돌아보았다.
"아시엘?"
예상치 못한 손님이 의외였던지,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무안해진 아시엘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안녕하세요, 루이카엔 씨."
"안녕?"
그의 엉뚱한 말에 루이카엔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던 듯 그의 준수한 얼굴은 취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빨리 이리 와서 앉아. 아깐 너 때문에 술 다 깨버렸으니까 책임져야지."
"에?"
웃음기와 술기운이 뒤범벅된 그의 목소리에 아시엘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반쯤 비워진 술병과 간단한 안주가 놓여 있었다.
"혼자서 왠 술이에요? 그리고 저 때문이라니요?"
"너 같으면 사라졌던 애가 벤치에 뻗은 채로 발견됬는데 그대로 취해 있을 수 있겠냐?"
정신이 번쩍 들더라. 투덜거리듯 덧붙인 루이카엔은 잔에 남은 술을 벌컥 들이켰다. 그리고는 딱딱하게 얼어붙은 아시엘에게 피식 웃어보였다.
"앞으로는 그러지 마. 응? 열심인 것도 좋지만 몸도 좀 사리라고."
"네.. 헤헤."
"말은 잘한다."
그는 소년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톡, 치고는 잔에 술을 따랐다. 잠시 말없이 그를 유심히 바라보던 아시엘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루이카엔은 대답하지 않고 손에 든 컵을 빙글빙글 돌렸다. 아시엘 역시 더이상 재촉하지 않고 잠자코 앉아있을 뿐이었다.
잠깐의 침묵 후. 루이카엔은 곤란하다는 미소를 얼굴에드리우며 입술을 뗐다.
"아무것도- 라고 하면 안 믿을 거냐? 아니지, 넌 착한 녀석이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면서 믿어 줄 테지."
할 말을 찾지 못한 아시엘은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아무 일도 없지 않았어. 그냥 그런거야."
"... 그."
루이카엔이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가볍게 말하자, 아시엘은 어렵게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전 루이카엔씨 말처럼 착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별로 도움도 되지 않아요."
"....."
"그래도- 이야기를 듣는 건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두 귀가 있으니까."
아시엘이 그렇게 말하고 배시시 미소짓자 루이카엔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몸에 힘을 빼고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꽤 멋진 말도 할 줄 알잖아?"
"그렇죠, 뭐."
아시엘은 히히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얼굴이 너무나 순수하고도 또 어른스러워서- 루이카엔은 가슴 한 쪽이 아려왔다. 그는 눈앞의 소년을 응시하며 턱을 괴었다. 루이카엔의회색 눈동자가 정면으로 닿자, 왠지 피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아시엘도 조금 경직된 얼굴로 그를 마주보았다.
"아..."
"좋아. 너라면 이야기해도 괜찮겠지. 넌 내 핏줄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니까. 그렇다고 타인도 아니고."
루이카엔은 히죽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대신에, 네 이야기도 해 줘."
"...네?"
뜻밖의 말에 아시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표정이 재미있었는지 루이카엔은 붉어진 얼굴로 빙글거렸다.
"너도 아까 여기에 올 때부터 얼굴에 '나 근심 있어요' 하고 써 놨던데? 딴 놈들이면 몰라도 이 술취한 루이카엔의 눈은 피해갈 수 없다고."
"푸핫! 그게 뭐에요?"
"어어? 안 믿네. 진짜라니까? 그리고 원래 끼리끼리는 통하게 되어 있어."
아시엘이 웃음을 터뜨리자 그는 사뭇 심각한 얼굴을 해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곧 얼굴근육을 풀고 느물느물 웃더니, 가까이에 있던 빈 물컵 하나를 당겨와 술을 따라 그것을 아시엘에게 건넸다.
"자, 한 잔 하면서 들어. 케케묵은 옛날 이야기 따위는 하나도 재미 없을테니까."
아시엘은 잠자코 그 잔을 받아 입으로 가져갔다. 꽤나 도수가 높은 술인지 화끈하고도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루이카엔은 잠시 컵만을 바라보며 손장난을 했다. 이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까, 나 주제에. 살아오면서 수천 번은 했던 생각이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디밀었다. 그는 그것을 털어버리고 다시 옆으로 시선을 주었다.
조금 떨어진 그 곳에, 아시엘이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동정하지 않고, 일부러 신경쓰지 않고 조용이 감싸주기만 할 아이가 있었다. 그와 비슷한 밑바닥 생활을 경험한 어른스러운 소년이 있었다.
"너도 알고 있지? 난 카시마엘 가의 사생아란 거. 후작의 하룻밤 실수로 만들어진 단 하나의 결점."
루이카엔은 술을 홀짝였다.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것일까- 10년지기 친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하지만 그는 곧 그 생각도 털어내 버렸다. 아시엘이니까, 그와 닮은 소년이니까.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너도 아까 봤겠지만 나의 아버지, 카시마엘 후작은 칼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전대 후작- 그러니까 나의 할아버님 되는 분 역시 그러하셨지. 그러니까 받아들일 수 없으셨던 거야. 내 어머니와 나의 존재를."
한 잔을 완전히 비운 그가 잔을 채우려 술병을 들자, 아시엘은 그것을 빼앗아 손수 단장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컵도 내밀었다.
"하! 녀석."
루이카엔은 아시엘에게서 병을 건네받아 그의 잔에 부어주고는 말을 이어갔다.
루이카엔 드 카시마엘. 그는 후작가의 어느 보잘것 없는 하녀에게서 태어났다.당시의 카시마엘 후작은 자랑스러워 하던 아들의 실수에 노발대발했고, 결국 생후 3일이 되던 날- 어머니와 함께 영지 밖으로 내쳐졌다.
아이를 낳은 어머니는 심약한 사람이었다. 항상 자신의아들과 자신이 후작가에 누를 끼칠까 노심초사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아들과 자신이 굶는 한이 있어도 구걸이나 도둑질은 절대 하지 않았다. 남에게 손을 벌리지도, 도움을 청하지도 못했다. 후작가의 아들을 낳았다는 자존심 때문에 그런 것이라 생각 될 수도 있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감히 귀족과 불순한 관계를 가지고, 미혼인 후작가의 후계자 사이에 아들까지 낳아버렸다. 그런 사실이 남에게알려질까, 한때나마 마음 속으로 사랑했던 귀족 청년의 이름에 먹칠을 할까 두려웠던 것이었다.
너무나도 소심하고 순박했던 여자에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짐이었다. 자신이 살아 숨 쉬는 것 자체를 죄악으로 여기던 그녀는 결국 아들이 12살이 되던 해, 병이 들어버렸다.
"뭐, 그런 어머니와는 달리 난 발랑 까져서 소매치기도 하고.. 그랬어. 어차피 어머닌 병에 걸려 움직이지도 못하셨고."
루이카엔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슬슬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아시엘에게 닿아 있었다.
"어머니는 끝까지 이렇게 말씀하셨지. 우리는 눈에 띄어선 안 된다.. 고. 지금 숨쉬고 있는 것은 카시마엘 후작의 은혜이고 평생 죄인으로서 살아야 한다고 말이야. 하지만 난 그렇게 살기 싫었어. 정말로."
여자는 병에 걸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렸다. 그리고 아들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후- 그녀가 그렇게도 두려워하던 후작가의 성으로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