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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셀레니스 기사단-71화 (71/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외전2. 어느 날, 대사건

아시엘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해가 채 뜨기도 전의 새벽이었다. 어째 오늘따라 더욱 포근하게 느껴지는 이불에 미련을 느꼈지만, 그는 애써 잠을 몰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우으-"

아시엘은 하품을 쩍 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눈앞에 보이는 희안한 광경에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금빛 장막이 펼쳐져 있는 듯 했다.가느가랗고 반짝이는 금사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아시엘은 무심코그것을 한 뭉치 움켜쥐고, 힘껏 잡아 당겼다.

"아얏!"

갑자기 두피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져 그는 재빨리 손을 놓았다. 뭐지? 설마 내 머리카락인가, 하고 생각하던 아시엘은 곧 그럴 리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그렇게 자라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어째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은 그도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아시엘은 곧장 침대에서 내려와 거울 앞에 섰고-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셀레니스 생활관이, 발칵 뒤집혔다.

그 뒤의 상황은 완전히 개판이었다. 아침부터 생활관을쩌렁쩌렁 울리는 아시엘의 비명소리에 기사들은 벌떡벌떡 일어나서 그의 방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거울 앞에 서 있는 아시엘의 모습을 보고 놀라고, 서로의 몰골을 확인하고는 기겁했다.

"으아아아악! 이거 뭐야?"

남자들의 땀내가 풀풀 풍기던 기사단은 밤사이 꽃밭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시엘은 선배들의 모습을 보며 입을 벌린 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자잘한 근육들로 튼튼하게 단련되었던 이들이 죄다 날씬하고 잘록한 허리를 가진 미녀가 되어 있었다.

아시엘 역시 키가 원래보다 작아져 있었고 몸에 굴곡이 생겼다. 특유의 금발은 엉덩이까지 흘러내렸고 중성적이던 얼굴은 더욱 갸름하져 완전한 소녀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 덕분에 입고 있던 옷이 커서 헐렁헐렁하게 되어 버렸다.

소란 때문에 깨어난 슌도 뒤늦게 어마어마한 비명을 지르고, 방이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쯤 아래층에서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뭐야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악?"

하이톤의 여자와 굵고 낮은 남자의 비명. 그들은 그게 루이카엔과 아델레트의 것이라고 직감했다.

아시엘은 머리가 지끈거려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잠시 후. 로비에서는 내부에 남아있던 전원이 모인 아침 회의가 열렸다. 아직 기상벨이 울리려면 한참 남은 시간이었지만 모두들 졸음이 싹 달아난 듯 한 모습들이었다.

하늘색 짧은 곱슬머리를 가진 미남- 아델레트는 주변을 죽 둘러보다 참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상황 설명 좀 해 줄 사람?"

"뭐긴 뭐야.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단체 성전환 사건이지."

그 옆에 서있던 갈색 머리에 풍만한 가슴을 가진 매력적인 여성, 루이카엔이 투덜거리듯 대꾸했다. 그 역시 하룻밤 사이에 성별이 바뀌는 사건은 듣도 보도 못 한 일이라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시엘의 뒤에 서있던 케빈이 그의 말이 답답했던지 화를 발칵 냈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윽."

그는 자신에게서 나온 가느다란 목소리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를 보며 루이카엔은 아까의 아델레트처럼 푹 한숨을 내쉬었다.

"낸들 아냐? 아시엘, 넌 어때?"

"에?"

갑자기 호명당한 아시엘은 고개를 들어 단장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고민을 하는 듯, 음- 하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이카엔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사람이 저렇게도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일까. 원래의 얼굴과 별 차이도 없는 듯 했지만 단지 소년에서 소녀가 되었다는 것 만으로도 그의 미모는 범죄 급이었다.

"빨리 되돌아 가야 귀찮은 일이 안 생길 텐데.."

비슷한 광경을 보고 있던 아델레트는 뒷통수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루이카엔과 다른 기사들 역시 백 번 공감하며 고개를 맹렬하게 끄덕였다.

"이래선 임무도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 여러 가지로 문제도 있는 것 같고. 어쨌든 원인부터 찾아야 할 듯 합니다."

아시엘의 옆에 찰싹 붙어 있던, 성숙해 보이는 적발의

소녀 카이스가 손을 들며 말했다.

원인, 원인.. 기사들은 저마다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풍부한 경험에 빗대어 봐도 성별이 바뀌는 해괴망측한 사건의 이유를 알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모르겠다, 라고 하기엔 서글퍼 그냥 포기하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때.

".. 연금술 이라면.."

침묵이 깨지고 로비에 아시엘의 중얼거림이 울려퍼졌다. 그들은 일제히 그에게 시선을 모았다.

설명을 요구하는 선배들의 눈빛에 아시엘은 부담스러운 얼굴로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입을 열었다.

"아, 아니 그냥 옛날에  연금술에 대한 책에서 읽었던 것 같아서.. 요즘엔 마법보다 그쪽이 훨씬 더 많이 발전해 있으니까요. 저도 자세히 아는 것도 아니고 연금술은 여러가지로 비밀이 많은 학문이지만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의 말이 끝나자 마자 루이카엔은 손뼉을 짝 치며 외쳤다.

"로웬 백작님이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일전에 무도회 때, 아시엘이 썼던 특수 가발을 제작한 장본인이었다. 황궁의 구석에서 기거하며 하는 일이라고는 연금술을 실험하다 가끔 대형 사고를 치는 것이 다인, 황실 전속 연금술사.

제르닌은 길어진 블루블랙의 머리를 쓸어넘기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확실히 이딴 일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은 그 분 밖에 없군. 이제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쳐들어가야지."

기사들 중 한 사람이 외치자 모두는 군말 없이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심지어는 아델레트 마저도.

공통된 적으로 듬세 사기가 충전된 동료들을 둘러보며 루이카엔은 패기 넘치게 외쳤다.

"좋아, 지금 당장 로웬 백작님의 거처로 간다!"

"우어어어!"

기사들은 생활관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함성을 내질렀다. 곧 그들은 적국으로 전쟁을 치르러 가는 이들마냥 우르르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이른 아침이라 황궁 안은 한산했다. 간간이 몇몇의 하인들만이 바삐 돌아다닐 뿐. 셀레니스 기사단은 그런 황궁을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며 가로질렀다.

"로오오오웨에엔배애애액자아악니이임!!"

악에 받친 소리로 외치며 두두두 달려가는 괴인들의 무리. 그 옆에는 커다란 늑대 두 마리가 함께 뛰고 있었다. 빨래나 잡다한 서류 따위를 옮기던 하인들은 걸음을 멈추고 그 장관을 구경했다.

".. 저거 셀레니스 기사단 분들이지?"

"..그런 것 같네. 또 로웬 백작님께서 사고를 치신 것 같은데."

종이를 한아름 안고 있던 하인은 그들이 휘날리는 긴 머리칼을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말을 꺼낸 이 역시 도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평소보다 더욱 기괴한 광경이기는 했지만 그게 셀레니스 기사단이라면 그 자체로도 모든 것이 설명이 되는 일이었다.

그들은 말세야, 말세.. 하고 중얼거리며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위해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한편 주변의 시선 따위는 전혀 느낄 새도 없이, 셀레니스 기사단은 전속력으로 달려 황궁 구석에 있는 로웬 백작의 거처로 향했다.

극도로 흥분한 그들은 앞을 가로막는 경비병들을 던져버리고, 대리석 문을 검기로 깨부숴 버렸다.

쾅, 후두둑!

이제 앞을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가구나 장식품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로비를 지나 쿵쾅쿵쾅 계단을 오른 그들은 노크도 없이 백작의 침실 문을 열어제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방의 한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침대. 그 위에서 통통한 체구의 중년 남성이 도로롱, 도로롱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루이카엔은 그에게 다가가 조금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이불을 확 걷어냈다.

"로웬 백작님!"

"..으붕? 아.. 그 약초는 거기가 아니...쿨.."

뭐라는 거야. 루이카엔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백작은 여전히 깨어날 생각을 안 했다. 그가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할 때마다 볼록한 배가 같이 들썩였다.

루이카엔은 결국 최후의 방법을 쓰기로 하고, 그의 귓가에 입을 바싹 갖다댔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성량으로 소리를 질렀다.

"로-웬-백-작-님!"

"우아아악?"

백작은 귀를 감싸쥐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잠이 덜 깼는지 그는 침대에 앉은 채 루이카엔을 바라보다, 화난 얼굴을 한 채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여인들을 바라보고 다시 루이카엔에게 시선을 주었다.

"ㅡ자네, 설마 루이카엔 군인가?"

"네, 맞습니다. 바로 알아맞히는 걸 보니 역시 범인은 백작님이셨군요."

루이카엔은 살벌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백작은 눈을 반짝이며 떡 진 누런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정말 루이카엔 군이 맞나? 그렇다면 저들은 셀레니스 기사단이겠군. 내 실험이 성공했던 게야!"

"실험? 죄다 이 꼴로 만들어 놓고는, 지금 실허엄이라고요오?"

루이카엔이 거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으르렁거리자 그는 뒤늦게 위험을 깨닫고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재미있지 않나? 어젯밤, 내가 2년에 걸쳐 완성한 상별 전환 약물을 생활관 근처에 뿌려두었지.."

일동은 뒷목을 잡고 넘어갈 지경이었다. 재미? 재미라고? 이마를 짚고 황망하게 중얼거리던 아델레트는 곧 도끼눈을 뜨고 백작을 노려보았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이래서야 임무도 나갈 수 없잖아요!"

"..왜? 별로 상관 없지 않나?"

백작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기사단은 드디어 폭발했다.

"제르닌, 카이스. 백작님 붙들어."

루이카엔의 말에 두 사람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로웬 백작의 양팔을 붙들었다. 나머지 이들은 그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주위를 에워쌌다.

"뭔가? 뭐야? 이게 뭐야?"

"..아시엘."

루이카엔은 아시엘에게 살짝 고갯짓을 해 보였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아시엘은 백작의 앞으로 다가갔다.

"..뭐, 뭔가? 자네-"

"..일단 처음 뵙겠습니다, 백작님. 아시엘 아르셰인이라고 합니다."

아시엘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아주 무시무시하게 미소를 지었다. 백작은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제르닌과 카이스에게 붙들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아시엘은 손을 펼쳐 마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빠른 속도로 마법 스펠이 흘러나오자 백작의 얼굴은 더더욱 창백해졌다.

"잠시만, 그만두게!"

아시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문을 외웠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그의 손바닥 위의 허공에 붉은 색 마법진이 맻혔다가 사라졌다. 이제 아시엘의 손 위에서는 불덩어리들이 둥둥 떠 있었다.

저놈, 제대로 열 받았군. 셀레니스 기사단은 실실 웃음을 흘렸다.

"백작님."

아시엘은 조용히 그를 불렀다. 백작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긴장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시 되돌리는 약. 순순히 만들어 주시면, 이 불꽃이 백작님의 연구소를 태울 일은 없을 거에요."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백작님이 평생 연구하신 자료가 다 잿더미가 되겠죠?"

아시엘의 쌈박한 말에, 백작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 놈이라면 정말로 태우고도 남을 것 같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ㅇ, 알았으니까 이것 좀 놔 주게. 알았다고!"

"1시간 안이에요. 성별 전환 약을 만들었으니, 그 역 속성의 약도 쉽게 만들 수 있으시겠죠?"

아시엘은 한 걸음 더 바싹 다가가며 말했다. 정말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아름답지만, 또 그만큼 살벌했다.

그가 한 번 더 재촉하자, 백작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백작은 조금 과했던 장난의 결과로 아침 댓바람부터 셀레니스 기사단의 감시를 받으며 서둘러 약물을 만들어 내야 했다. 루이카엔과 기사들은 새삼 아시엘의 성격을 뼛속까지 새겼고, 얼마 후 백작이 다시 만든 물약으로 원래대로 돌아갔다.

아침바람의 헤프닝은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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