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69화 (69/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68. 화려하고, 밝고, 어두운(2)

파티장에 들어서고 난 후 5분도 되지 않아, 유트리안 황자는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황제의 뒤에 붙어서 이야기 해야 할때 적당한 이야기를 하고, 웃어야 할 때 억지로 웃는 귀족들을 따분한 얼굴로 바라보던 그는 문득 들려오는 큰 소리에 시선을 홀의 구석으로 옮겼다.

그 곳에는 화려한 금발을 가진, 눈에 확 띄게 아름다운 소녀가 남자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생전 처음 남자들을 상대하는 것인지, 그녀는 한눈에 보아도 당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유트리안은 호기심이 들어 그들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는 한 가지 더욱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소녀의 눈동자가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또 볼것이라 생각지도 못한 선명한 붉은 색이었던 것이다.

빨간 루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화살처럼 유트리안의 눈에 박혀 들어왔다. 별일이군- 그가 그렇게 중얼거린 다음 순간, 상황이 더욱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어어쭈! 지금 비웃었어?"

가장 덩치가 크고 얼굴이 새빨간 남자가 커다란 소리로 외치며 소녀에게 더 다가섰다. 유트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앞에서 다른 귀족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버지의 옷깃을 살짝 당겨 주의를 자신에게로 끌었다.

"무슨 일이지, 황자."

"아바마마. 잠시 어디 좀 다녀오겠습니다."

유트리안은 라이펜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잠시 의아하게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라이펜은 그가 향하고 있는 쪽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역시 새빨간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라이펜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보다 훨씬 잘 어울리잖아? 그리고-'

예상보다 훨씬 더 닮았군. 그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경솔했을지도.'

얼굴에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라이펜은 점점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유일무이한 친우이자, 저 아이의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까.

손바닥에 배여나오는 식은땀을 아무도 눈치 못 채도록 닦은 라이펜은 다시 귀족들과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나중에 루이스에게 죽겠군.'

일단 여장을 시킨 것 자체부터- 후에는 상당한 원망을 사겠지.

속으로 쓴웃음을 삼키며, 라이펜은 홀의 구석으로 시선을 주었다. 아시엘의 팔을 붙잡은 유트리안이 거침없이 발코니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남자들에게서 어느 정도 멀어졌다고 생각되자, 유트리안은 소녀를 놓아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 없이 움직이고 있던 그였지만,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자신에게로 똑바로 향하자 황자는 무엇이 잘못 되어 가고 있다고 깨달았다.

소녀의 붉은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봐선 안 될 것을 보았다는 당혹감. 그리고 놀라움이었다.

살아 생전 처음 받는 불손한 시선에 유트리안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할말이라도 있는 건가?"

그의 도도한 말투에 소녀- 아니, 소년 아시엘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소녀라 하기는 조금 낮아 미묘한 느낌이 드는 미성이 흘러나왔다. 그것이 또 신경에 거슬려서 유트리안은 인상을 더욱 구겼다.

"이런 자리는 처음인가 보군. 멍청하게 남자 처신도 제대로 못하는 걸 보니."

"......"

쩌적. 아시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그 이변을 알아차리지 못 한 유트리안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바보같이 혼자 돌아다니니까 그런 거다. 내가 안 왔으면 어쩔 뻔 했냐고. 일행은 어디에 있지? 이런 애송이 아가씨를 혼자 내버려 뒀으니, 한마디 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

도대체 내가 왜 화를 내고 있지? 평소같으면 일찌감치 관심을 꺼버리고 아무 상관도 안 했을 터였다. 황자는 계속해서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스스로가 왜 그러는지 이해를 못 해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그는 꿋꿋하게 말을 끝까지 마쳤다.

하지만 아시엘은 그것을 귀 기울여 들을 상황이 아니었다. 제 1황자라면, 셀레니스 기사단이라는 특성상 싫어도 자주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하필 오늘이라니!

정말로, 할 수만 있다면 쥐구멍에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시엘의 표정이 이상해지자 유트리안은 의아해졌다. 그 얼굴은 황자에게 꾸지람을 들어 어쩔 줄 모르는 것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아픈 사람의 것과 같았다.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 건가? 이름이 무엇이냐."

"...하아."

아시엘은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자세를 바로하고 제 2의 주군이자- 앞으로 모셔야 할 대상인 유트리안을 바라보았다. 황자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소속, 아시엘이라고 합니다, 전하. 현재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임무 수행 중이었지만.. 곤란한 상황을 면하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뭐?"

유트리안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셀레니스 기사단의 얼굴은 전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아시엘은 처음 보는 이였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유트리안은 그제야 몇 주 전, 셀레니스 기사단에 신입 두 사람이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이런 꼬맹이라니. 그것도 16살도 안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를?'

두 사람 중에 한 명은 제국 최고의 기사, 루이스 아르셰인의 양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라이펜이 자랑삼아 말했던 것을, 유트리안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쪽은 아닌듯 했다.

유트리안은 곧 못마땅한 얼굴이 되어 아시엘을 내려다보았다. 무술에는 완전히 잼병인 그였지만, 그래도 순수 악력만으로는 눈앞에 있는 소녀(?) 보다 강할 것 같았다.

"하-!"

황자가 비웃음 비슷한 소리를 내자 아시엘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하지만 여기서 시간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전하, 괜찮으시다면 이만 물러가도 될까요? 바쁜 일이 있어서-"

"아니, 안 돼. 네가 일을 한다고 해도 제대로 될 것 같지도 않으니, 근위병에게 대신 맡기도록 해라."

오만하고 또 오만한 그의 말에 아시엘은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하마터면 인상을 구길 뻔 한 것을 간신히 참은 아시엘은 조금은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못 미더우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전 일단 황제 폐하의 기사입니다. 제 임무를 남에게 맡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실 텐데요."

"너희 기사라는 종족에겐 이미 질릴 대로 질렸어. 쓸데 없는 자긍심만 높은, 아무런 쓸모 없는 체스 말일 뿐이야! 그러니까 내 명령을 따라."

정말로, 말이 안 통하는 황자였다.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는 유트리안 때문에 아시엘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전하. 말씀대로 전 체스 말입니다.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쓸데 없는 자긍심이란 건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가끔 이상한 명령이 내려오긴 해도-  황제 폐하의 아래에서 명을 따를 수 있는 것은 엄청난 영광입니다. 전 그 명령을 따를 의무가 있고, 또 임무를 수행할 자신도 있습니다."

아시엘은 그를 똑바로 올려다 보며 말했다. 상대가 황자임에도 거리낌 없이 할 말을 다 하는 그의 모습에 유트리안은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시엘은 그 틈을 타,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뚜벅뚜벅 걸어 그의 옆을 스치듯 지나쳐 버렸다.

유트리안은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오래 전 잃은 벗.

".. 친구 하나도 못 지켜준 주제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물론 저 아시엘이란 기사는 전혀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 싫었다.

유트리안은 주먹을 꾹 쥐고, 다시 얼굴을 무표정하게 만든 후 혀를 쯧 차며 아시엘의 등 뒤에서 시선을 돌렸다.

'아무 상관 없잖아, 저딴 녀석.'

그리고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겨, 멀찍이서 자신을 바라보며 빙긋 미소짓고 있는 라이펜에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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