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67. 화려하고, 밝고, 어두운(1)
라이오스 드 카시마엘. 젊은 시절에는 뛰어난 검술으로 온 세상의 이목을 사로잡았던 인재였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손을 다치게 되어 검을 놓고 대신 황실의 정치에 뛰어든 사내였다.
그의 재능은 검에만 그치지 않았다. 카시마엘 후작은 특유의 화술과 차분한 분위기로 외교에서 능력을 발휘했고, 선대 황제는 그런 그를 신임하여 여러 일을 맡겼다.
하지만 전 황제가 죽고 라이펜이 보위에 오르자 그는 황궁에서의 모든 일을 접고 제국 구석에 위치한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버렸다. 그 뒤로 카시마엘 가는 루이카엔을 제외하고 공식적으로 중립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혼전에 취중의 실수로 태어난 장남 루이카엔, 그리고 후에 정실 후작 부인에게서 태어난 둘째 케이르가 바로 그들이었다.
사람들은 차남에게 후작의 검술 재능이 이어져 있기를 은근히 바랬고, 또 믿어 의심치 않았다.
케이르의 짙푸른 눈동자와 차분한 몸가짐이 카시마엘 후작을 쏙 빼닮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외모 말고는 그다지 닮은 점이 없는 루이카엔이 그의 운동 신경을 이어받아 검술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대신 그의 동생 케이르는 서류 처리나 사람을 쓰는데 능숙해, 후에 정계의 샛별이 될 것이란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 아버지. 케르."
루이카엔은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두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카시마엘 후작은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로 오랜만에 보는 첫째 아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1년 만이구나, 루이."
"예, 아버지.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루이카엔은 후작의 속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고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와는 너무도 다른, 선명한 바다의 색깔이었다.
온갖 복잡한 생각들이 다 섞여 끝내는 속이 보이지 않게 된 눈. 그 속에는 아들에 대한 애정도 있을까? 루이카엔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잘 지내다 마다. 너는 어땠느냐."
"아주 좋았습니다, 아버지.. 케이르. 잘 지냈.."
싱긋 웃으며 말을 이어가던 루이카엔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동생의 눈빛에 말을 멈췄다. 케이르의 속에서 엿보이는 것은 분명한 적의. 익숙하다면 익숙한 그의 조용한 분노에 루이카엔은 쓰게 웃었다.
"잘 지냈지?"
"예, 형님. 덕분에요. 아주 잘 지냈습니다."
케이르는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진심이라고는 단 한 줌도 담기지 않은 그 말에 루이카엔은 속이 아릿해져 왔다.
그가 어느정도 자란 이후부터 항상 받던 미움인데, 오늘따라 더욱 날카롭게 느껴졌다.
'그 녀석 때문인가.'
루이카엔은 머릿속에 한 소년을 그렸다. 지금은 여자 아이의 차림을 하고 뒤쪽에서 그를 붉은 눈동자로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아시엘을. 착하고 솔직해 보이지만서도 그 안을 절대 완전히 보이지 않는 신입 꼬마를.
"루이. 그 반지는 무엇이냐?"
"예?"
갑작스러운 후작의 물음에 루이카엔은 자신의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곳의 약지에는 아까 아시엘을 구하러 갔을 때 끼운 금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 애인이요."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후작은 그 말에 조금은 놀란 듯, "그러냐"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인이 생겼다니 축하할 일이로군."
"고맙습니다, 아버지."
루이카엔은 아버지에게 싱긋 웃어보이고는 옆에서 뻣뻣하게 서 있는 동생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아시엘은 케이르와 정 반대였다.
활발하고 순진한 어린애같지만 자세히 보면 굉장히 어른스러운 아시엘과, 차분하고 성숙해 보이지만 사실 사생아인 형에 대한 혐오감과 자격지심을 감추지 못하는 아이같은 케이르.
"케르. 올해 네가 몇 살이지?"
"...스물입니다."
케이르의 대답에 루이카엔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벌써 그렇게 됬구나. 공부는 잘 되어 가?"
"예.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전히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살짝 숙인 고개 아래의 시선에는 다시 혐오가 덧씌워져 있었다.
카시마엘 후작이 보고 있지 않다면 지금 겨우겨우 이어가는 이 대화 역시 애저녁에 끊겼을 것이었다.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루이카엔은 씩 웃으며 후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임무 수행 중이라서요."
"..그러냐. 그럼 가 보아라."
후작은 잡지 않았다. 중립을 지키겠다는 자신의 말을 어기고 셀레니스 기사단에 몸을 담고 있는 첫째 아들이었지만 그래도 나무라지 않았다.
그가 누구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였는지 후작은 알고 있었으니까. 못난 동생을 위해 모든 상속권과 후작가의 일원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고 황제의 밑으로 들어간 착한 아들인 것을 알고 있었으니, 후작에게는 루이카엔을 막을 권리가 없었다.
후작은 젊은 시절의 실수에 대한 책임감으로 루이카엔을 거두어 키웠지만, 루이카엔이 가문 안에서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알아서 떠나 주니 고마운 일이었다.
"-그럼 이만."
루이카엔은 후작의 감정 없는 눈에 다시 한 번 심장이 아릿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익숙해 진 일이었기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 같은 건 카시마엘 후작가에 어울리지 않는다.'
아버지의 아들이란 자리에도, 케이르의 형이란 이름도. 하루에도 수천 번씩 뇌까리던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그는 그 자리를 도망치듯 떠났다.
잠시 후. 아시엘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곳에 도착한 루이카엔은 있어야 할 이가 보이지 않자 고개를 갸웃했다.
"얜 또 어디로 간 거야."
그는 뒷통수를 벅벅 긁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조그마한 아시엘이 금방 눈에 띌 리 없었다.
"..뭐, 어딘가에 있겠지. 딱히 기다리란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루이카엔은 혼잣말을 하며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독한 술들이 늘어서 있는 바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루이카엔의 한가한 예상과는 다르게, 아시엘은 현재 위기 상황에 놓여 있었다.
"아린 양. 저와 함께 한 잔 하러 가시죠."
"아닙니다! 제가 더욱 멋진 것을 보여 드리죠."
"보석 좋아하십니까?"
수많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아시엘은 순간 진지하게 이것들 다 때려 눕히면 안될까, 하는 고민을 했다.
그가 쫒던 수상한 남자가 자취를 감춘 것은 오래 전이었다. 아시엘은 짜증을 내는 것 대신에 혀를 쯧, 차고 이런 상황이 되기 전 일을 떠올렸다.
멀찍이서 루이카엔 부자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바라보던 아시엘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수상한 행동을 하는 남자를 발견했었다. 고급스러운 옷을 입기는 했지만 안절부절하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모습이나, 사람이 말을 걸어오면 화들짝 놀라는 등 아주 부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잠시 의구심에 그를 살피다 설마 이런 자리에서 벌어지는 밀거래를, 저런 어설픈 자에게 맡기겠냐며 고개를 저은 아시엘이었다. 하지만 곧 그가 곁으로 다가오자 아시엘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긴장시키고 말았다.
'어?'
순간적으로 구부러진 그의 등 뒤에서 검은 연기가 언뜻 보인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력. 전혀 마법사로서의 낌새가 없던 그에게서 갑자기 폭발적으로 마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
그가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까지 가까워지자 아시엘은 재빨리 몸을 돌려 얼굴을 숨겼다. 불쾌한 기운이 점점 다가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제 6구역 경비대의 지하 감옥에서 나온 수수께끼의 구슬과 같은 기운이었다. 그 생각에 식은땀을 흘리며 어쩌면 좋을까, 하고 머리를 굴리고 있었는데 일순 그 마력이 남자에게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남자가 다시 조금 멀어지자 아시엘은 곧바로 몰래 뒤를 쫒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술에 취한 귀족 남자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고- 이렇게. 이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었다.
점점 굳어가는 아시엘의 표정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남자들은 술냄새를 풀풀 풍기며 그를 둘러싸고 말싸움을 이어갔다.
"아린 양! 더이상 튕기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저 술주정뱅이들은 무시하고 저와 가자니까!"
혀 꼬인 소리로 그런 말을 하는 남자가 가소로워, 아시엘은 기가 막힌 웃음을 터뜨렸다.
"어어쭈! 방금 비웃었어?"
"....이런."
눈치 한 번 빠르시네. 남자가 험악하게 말하며 다가서자 아시엘은 뒤쪽으로 살짝 물러섰다.
"성을 말하지 않는 걸 보니까 별 변변찮은 집안 여자 같은데. 뭐 이렇게 도도한 척이야?"
"....."
아시엘은 눈을 내리깔고 주변을 살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홀의 구석진 곳- 사람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사각지대였다. 다시 말하자면 술 취한 남자들이 우르르 여자에게 추근거리기 딱 좋은 자리, 또 다른 말로는 아시엘이 이들을 조용히 기절시켜도 눈치 챌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이 사람들이 혹시라도 날 알아보면 곤란한데.'
그가 남자라는 것과, 셀레니스 기사단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후에 난처한 상황이 벌어질 게 뻔했다. 아시엘은 잠시 갈등하다 결국 곱게 떼어놓기로 했다.
"비웃다니요. 죄송하지만 전 일행이 기다려서.. 이미 사귀는 사람도 있고요."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한 걸음 더 물러섰다. 하지만 그럴수록 남자들은 더욱 가까이 다가와 술냄새를 풍겼다.
이거 어쩌나. 아시엘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뒤쫓던 남자를 한시바삐 다시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래서야 꼼짝도 못하지 않는가. 그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왼쪽에 서 있던 남자가 목소리를 돋궈 외쳤다.
"일행이라니, 아까부터 혼자 계시는거 다 봤습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남자들을 피해 아시엘은 다시 한 걸음 더 물러섰다. 그 때, 갑자기 누군가가 그의 팔을 덥썩 붙잡고 이끌었다.
"어어?"
아시엘은 반사적으로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상대의 악력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결국 그는 벙쪄서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는 취객들을 두고 그 자리에서 끌려나왔다.
"자, 잠깐만.. 어디로 가는 거에요?"
상대방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질질 끌려가며 아시엘은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남자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 없이 계속 아시엘을 붙잡고 가다, 발코니 앞에 이르러서야 그를 놓아 주었다.
"아.."
제법 세게 잡혔던 팔목이 새빨갛게 부어오른 것을 본 아시엘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어찌나 빨리 걸었는지 숨이 찰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덕분에 곤란한 상황에서 빠져나왔으니, 아시엘은 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에메랄드 빛 머리칼에 금안. 새하얀 피부에 차가워 보이는 무표정한 얼굴의 소년.
멀찍이서 보았던 제국의 제 1황자, 유트리안. 디아란. 세튼. 바로 그가 아시엘의 앞에서 팔짱을 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