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55화 (55/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54. 사건종결(4)

"..지독하군."

지하감옥의 문 앞에 선 제르닌의 첫 감상은 그것이었다. 왜 밤에 침투할 때 느끼지 못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지는 기분 나쁜 기운에 카이스 역시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서 처음엔 느끼지 못 한 거죠?"

"아마 그때는 이 앞에 섰을 때부터 환영에 걸려 있었던 것 아닐까? 지금은 헨슨 씨랑 니엔 씨와 함께 있으니까 어중간하게 마력이 중화되서 느껴지는 거지."

아시엘은 고약한 냄새라도 나는 듯 코를 쥐고 설명했다. 흠-하고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 케빈은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니엔과 헨슨 그리고 그들에게 잡혀 있는 에슈튼을 돌아보았다.

"야, 너네들이 전부 공통적으로 항상! 지니고 있는 건 뭐지? 한시도 몸에 떼놓지 않는 거."

"그러실 줄 알고-"

헨슨은 에슈튼의 팔을 놓고 품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모두들 의아해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옷 안에서 꺼내놓은 것은 둥근 모양의 패 4개였다.

"동료들의 겁니다. 아까 다들 잠든 직후 빼돌렸죠. 경비대임을 증명하는 패인데, 일전에 루아 이클립스 기사단이 왔을 때 한 번 거두었다가 다시 돌려줬었죠."

네 사람은 헨슨을 예뻐 죽겠다는 듯한 눈빛으로-그들 모두 헨슨보다 연배가 낮다는 사실은 잊기로 하자-  바라보며 그것을 하나씩 받아들었다.

"-아!"

아시엘은 작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것이 손에 닿는 순간 불쾌감이 깨끗하게 사라진 것이다.

잠시 그것을 앞뒤로 뒤집어 보며 살피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찾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역시, 항마석이 여기 있어요."

에슈튼을 제외한 나머지 이들의 시선이 모두 아시엘의 손가락 끝으로 모였다. 나무패의 위쪽, 아주 작은 홈에 마찬가지로 자세히 살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보석 하나가 박혀 있었다.

아시엘은 그것에서 시선을 떼고 담담하게 있는 에슈튼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알고 있었죠? 이거."

"...."

에슈튼은 고개를 돌려 아시엘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잠시 그를 빤히 쳐다보던 아시엘 역시 더 캐물을 생각이 없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관심을 꺼버렸다.

"뭐, 됐어요. 당신 반응으로 답은 이미 나온 것 같으니까.. 들어가기나 해요."

툭 내뱉듯이 말한 그는 팔을 뻗어 육중한 나무문을 힘줘 밀었다. 끼이이익- 하고 음침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지하 특유의 차가운 공기가 밀려나왔다.

제르닌은 먼저 앞서가려는 아시엘을 뒤로 물리고 선두로 시커먼 계단을 밟았다. 뒤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시엘과 나머지 이들이 안으로 들어갔다.

뚜벅 뚜벅. 좁은 통로 안에 남자들의 부츠 소리가 울려퍼졌다. 헨슨과 아시엘의 손에 들린 등불에 의지해 그들은 컴컴한 계단을 별 무리 없이 내려가고 있었다.

"역시 음침하네. 아참, 카이. 레코더 챙겼지?"

"예."

좋아. 케빈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마주 비볐다. 에슈튼의 사무실에 숨겨놓았던 레코더는 그 방의 주인이 미쳐 날뛰는 것을 똑똑히 기억해 두고 있을 터였다.

"증거물로 제출 할 거니까 잃어버리면 안 된다."

제르닌이 덧붙이자 카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슈튼은 문득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만약 제가 헨슨의 거래를 받아들였으면, 아니 그렇게 발광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하실 작정이었습니까?"

"그거야.."

케빈은 말 끝을 늘이며 옆에서 걷고 있는 아시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를 따라 제르닌, 카이스 그리고 헨슨과 니엔마저 소년에게로 눈을 모으자 에슈튼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내가 16살 짜리한테 당한 거라고 할 참은 아니겠지요."

"슬프게도 그 설마가 사실이지. 솔직히 우리도 놀랐어."

아..케빈의 말에 에슈튼은 뜻 모를 탄식을 흘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뭐, 너무 상심하지 마라. 너랑은 종류 자체가 다른 인간이니."

"....."

위로인지 뭔지 모르게 제르닌이 중얼거리자 아시엘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에슈튼씨가 과하게 단순했던 것 뿐이에요. 그리고 아까 말한 거라면.. 우선 에슈튼 씨가 범인이 아니라면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라 예상했어요."

겨우 허무함에서 벗어난 에슈튼은 고개를 들어 아시엘을 바라보았다. 아시엘은 그런 그에게 검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무려 천 골드라구요. 당신의 사비로는 물론이고, 경비대 지원 자금을 횡령해도 가망이 없는 액수죠. 그러니까 섯불리 응할 리 없잖아요?"

"그럼 내가 응하지 않았더라면?"

"그 뒤는 당신 반응에 달렸었어요.단호하게 거절하면 무죄. 어물쩍 넘어가려 하면 관찰. 설마 죽이겠다고 달려들면서 혼자 주절주절 다 얘기할 줄은 몰랐어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아시엘이 그렇게 말하자 에슈튼은 망연한 표정으로 멍하니 천정을 올려다 보았다. 나머지 이들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애써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그들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곧 제르닌이 박살낸 계단 끝과 쇠창살이 나타나고, 그것을 지나쳐 점점 안쪽으로 향했다.

"이쯤인가."

갑자기 아시엘이 걸음을 멈추자 다른 이들 역시 그 자리에 서서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지?"

"뭔가 있어도 이쯤에 있을 것 같아요.. 헨슨 씨, 니엔 씨는 에슈튼 씨 가둬놓고 오세요."

제르닌의 물음에 여전히 뜻 모를 말을 하는 그. 헨슨과 니엔은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도 에슈튼을 끌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 주변을 잘 살펴 봐요. 이곳이 감옥의 정중앙 이니까 마법 트랩을 시전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마수정이 있을 거에요."

"하지만 환영 마법은 시전자가 바로 옆에 없어도 유지 가능 하잖아?"

케빈의 물음에 아시엘은 주변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규모와 기사들마저 빠질 정도의 강력한 마법은 아무리 대마법사라도 고정 시전은 불가능해요. 거기다 이상한 점들도 좀 있었잖아요. 마치 실체가 있는 것 같았다고.."

"아아. 그랬었지."

카이스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러자 아시엘 역시 고개를 살짝 까닥해 보였다.

"그리고 진하게 풍겨오는 불쾌한 마력. 분명 이 어딘가에 무슨 장치가 되어 있는거야."

"장치되어 있다면 어디쯤?"

"음.. 아무래도."

아시엘은 케빈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등불을 든 손을 천장 쪽으로 높게 뻗었다. 그 때. 무언가 반짝하는 것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카이스가 드물게 놀란 소리를 냈다.

"어..!저거?"

케빈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것을 자세히 살피려 아시엘에게서 등불을 받아 까치발을 들었다. 빛이 조금 더 높이 올라가자 반짝거리던 물건의 윤곽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투명한 유리구슬 안에 보랏빛 액체같은 것이 출렁거리고 있는 것이 천장에 박혀 있었다.

"그나저나 저거 어떻게 꺼내지?"

케빈의 말에 아시엘은 고개를 들었다. 다른 것보다 코앞에 직면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아시엘, 마법으로 어떻게 못 해?"

"항마석 때문에 저도 마법 못 써요."

아시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바로 위에 '나 잡아 봐라'하며 박혀있는 구슬을 올려다 보았다. 생각보다 천장이 높아 가장 키가 큰 제르닌이 팔을 힘껏 뻗어도 닿지 않을 듯 했다.

"..어쩔 수 없군."

제르닌은 영 내키지 않는 얼굴로 몸을 숙였다.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 그가 짧고도 확실하게 말했다.

"아시엘. 목마 타라."

"네?!"

아시엘은 조금 황당해져 제르닌을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농담이 아닌 듯 그는 그 자세로 아시엘을 재촉할 뿐이었다. 카이스와 케빈마저 '어서'라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결국 아시엘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하아.. 알았어요."

될 대로 되라, 는 심정으로 그는 조심스럽게 제르닌의 어깨에 얇은 다리를 걸쳤다. 아시엘이 안정적으로 앉았다고 생각되자 제르닌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우왓!"

아시엘은 잠시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지만 특유의 운동신경으로 제르닌의 머리를 붙들고 허리를 곧게 폈다.

"어때?"

"닿을 것 같아요. 그런데 안 무거워요?"

"전혀."

진심을 듬뿍 담은 제르닌의 대꾸에 아시엘은 조금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 케빈은 그를 올려다보며 장난스레 씩 웃어보였다.

"꼬맹아, 윗공기는 어떠냐?"

"놀리지 말아요, 선배."

그렇게 툴툴거린 아시엘은 한쪽 팔을 뻗어 천장의 구슬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것에 손가락이 닿는 순간, 불에 덴 듯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앗!"

"왜 그래?"

카이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그는 빨갛게 된 손을 감싸쥐며 대꾸했다.

"아무래도 맨손으로는 못 만질 것 같아. 혹시 손수건 있어?"

말이 끝나자 마자 케빈은 주머니를 뒤져 아시엘에게 하얀 손수건 하나를 던져주었다. 아시엘은 그것을 아슬아슬하게 붙잡았다.

"고맙습니다."

뭘, 하며 웃는 케빈에게 마주 웃어준 그는 다시 손을 뻗어 구슬을 손수건으로 감싸 쥐었다. 조금 힘을 주며 돌리자 달칵, 하는 소리를 내며 그것은 싱겁게 빠져나왔다.

"뺐어?"

"네."

고개를 끄덕인 아시엘은 빼낸 구슬을 손수건에 돌돌 말고 제르닌의 어깨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탁! 안정적으로 바닥에 착지한 그는 손을 탈탈 털었다.

"아, 따가워라. 어쨌든 가져왔어요."

"손은?"

제르닌의 딱딱한 걱정에 아시엘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따끔거리긴 하지만 별 건 아니에요. 그것보다 이것 좀 보세요."

"응?"

동료들이 모여들자 아시엘은 손바닥을 펴서 케빈의 손수건에 감싸인 구슬을 꺼냈다. 희미하게 보라색 빛을 내고 있는 그것의 안에는 검은 연기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출렁거리고 있었다.

"..뭔가 기분 나쁜데."

케빈의 짧은 감상평에 나머지도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헨슨과 니엔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시엘은 그것을 다시 수건으로 감싸 제복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일단 황궁에 돌아가서 생각해요. 여기선 답도 안 나올 것 같으니까."

"그래. 얼른 나가기나 하자고."

더 이상 여기에 있기 싫어, 하고 덧붙인 케빈은 으그그-하며 기지개를 쭉 켰다. 제르닌과 카이스 역시 이 어두컴컴한 곳에 계속 있는 것은 사양인지 뒤돌아서 계단 쪽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도 가자고. 저 둘은 알아서 나오겠지."

케빈도 그렇게 말하고는 앞서가는 제르닌과 케빈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아시엘은 잠시 그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주머니 안의 손수건에 쌓인 구슬을 매만지다, 종종걸음으로 케빈의 뒤를 따라 바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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