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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셀레니스 기사단-49화 (49/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49. 눈에는 눈(2)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해가 완전히 져버리고 희뿌연 달빛만이 하늘을 비추는 밤이 되었다. 생각에 잠겨 멍하니 창문 밖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아시엘은 문득 고개를 돌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카이스와 제르닌을 바라보았다.

"저기... 정말로 괜찮은 거에요?"

"..뭐가?"

"후환이 좀 두려운데요.."

몸을 살짝 틀어 되묻는 제르닌에게 아시엘은 다소 불안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이미 애꿎은(?) 경비대원 둘을 납치, 협박해 회유했고 영상석실을 초토화시키고 감옥까지 박살 낸 전적이 있었다. 물론 그것들이 거의 아시엘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 더 이상 일을 크게 벌렸다간 감봉에 플러스 알파로 아델레트의 잔소리 폭풍이 휘몰아칠 게 뻔했다.

"그것도 그렇군."

제르닌은 무뚝뚝하던 얼굴에 의미 모를 미소를 살짝 드리우고 수긍했다. 그 모습에 아시엘이 내심 놀라고 있는데, 그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걱정 마라. 루이카엔 덕분에 이런 건 익숙하니까 그렇게 심하게는 안 할 거다."

"네?"

의미를 이해할 수 없어 아시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느새 카이스 역시 호기심이 담긴 눈으로 제르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시엘. 넌 루이카엔이랑 많이 닮았어. 그녀석 어렸을 때랑 똑같아. 어쩌면 나랑 케빈이 우리도 모르게 네 말을 따르는 이유도 그것일지도 모르지."

"에?"

아시엘이 얼빠진 소리를 냈지만 제르닌은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방 안에 짧은 침묵이 흐르던 그 때- 콰과과광! 아주 가까운 곳에서 커다란 파괴음이 들려왔다.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검을 챙겨들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작됐네."

카이스는 친구를 바라보며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시엘 역시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때마침, 아시엘의 귀걸이가 희미하게 발광하기 시작했다.

아시엘이 재빨리 귀에 손을 가져가자, 머릿속에 울려퍼지듯이, 다른 쪽 귀걸이를 카이스에게 받아 미리 그곳에 가있던 케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됐어. 니엔이랑 그 여자도 멀리 튀었어.]

"네. 알겠어요."

아시엘은 통신을 끊고 제르닌과 카이스에게 말했다.

"이제 가요!"

짧지만 강하게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은 제복 코트를 걸치고 빠르게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시엘 역시 그들의 뒤를 따라 달려나갔다.

"시간 됐냐?"

"네."

시커먼 로브를 덮어써 제복을 가린 케빈의 물음에 그의 옆에 서 있던 니엔이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지 케빈은 씨익 웃고 니엔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 이제 아가씨랑 니엔은 어서 뛰어! 최대한 멀리, 안전한 곳에 도착했다 싶으면 이걸로 신호를 보내."

케빈은 아시엘이 부서진 영상석 조각으로 급조한 아티팩트를 니엔의 손에 쥐어주었다. 1서클의 간단한 발광 마법을 씌워둔 물건이었다.

"이걸 손에 쥐고 '라이트' 라고 외치면 빛이 나올 거다. 다른 쪽에는 비치지 않도록 조심하고."

"예."

그것을 주머니에 넣은 니엔이 자신의 옆에 긴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여인-에나에게 살짝 눈짓을 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니엔을 따라 나서기 전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 케빈에게 다가섰다.

"저..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하며 고개를 숙이는 그녀에게 케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씨익 웃어보였다.

"아냐. 애초에 헨슨이 보초 두 놈한테 수면제를 넣은 술을 먹였으니 가능했던 거니까.. 이 계획도 내가 생각해 낸 것도 아니고."

"하지만.."

에나는 무어라 더 말을 하려 했지만 케빈은 그녀와 니엔의 등을 떠밀었다.

"얼른 가! 이럴 시간 없다고."

"네, 네!"

니엔은 얼덜결에 에나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에나가 작게 꺅, 하고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 역시 뿌리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두 사람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한 케빈은 후-하고 심호흡하며 로브를 들추고 검자루를 잡았다.

스릉, 하고 달빛을 반사해 하얗게 빛나는 도신을 사랑스러운 애완동물을 만지듯 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던 그는 다시 한 번 길게 숨을 내뱉으며 검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자세를 잡았다.

"아.. 앤 보고 싶다."

베르칸에게 맏기고 온 애완 뱀이 살짝 그리워져 케빈은 혼자 그렇게 중얼거렸다. 혹시 루이카엔의 망할 독수리에게 물어뜯긴 건 아닐까. 설마 벨킨이 구박하지는 않겠지.. 잡다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 때.

"오."

먼 곳에서 빛이 순간적으로 반짝였다 사라졌다. 니엔이 보낸 신호였다.

"..오케이!"

케빈은 살짝 웃으며 눈을 감았다.

우웅- 새하얗던 검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점점 주황빛으로 물들어 갔다. 이윽고 검신이 완전히 마력에 감싸였을 때, 그는 눈을 떴다. 눈앞에 놓인 것은 지하 감옥으로 바로 통하는 통로와 외부를 갈라놓고 있는 벽. 단숨에 벽돌과 내부 자재를 베어내야 했다. 얼굴에서 싹 미소를 거둔 케빈은 다시 한 번 심호흡하고,

"하아앗!"

검을 크게 내질렀다. 콰앙! 주황빛의 검기와 벽이 닿자마자 엄청난 파공음이 울려퍼지며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날아오는 파편을 피해 뒤로 펄쩍 뛰어 물러선 케빈은 검을 어깨까지 들어올려 지면과 수평이 되도록 고쳐쥐었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세차게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돌진했다.

"하아아아아압!"

화살보다 빠르고 강하게 튀어나간 케빈은 검기가 서린 검을 벽에다 꽂았다.

콰드드득! 검이 벽돌과 안의 내부 자재들, 나무판자가 뚫렸다. 검자루를 더더욱 세게 쥔 그는 오러를 더더욱 증폭시켜 주변의 벽돌까지 박살을 냈다. 그리고 마침내 벽에 검 두 자루쯤이 들어갈 만 한 틈이 생겼을 때 케빈은 그대로 검을 크게 휘둘러, 벽을 갈라버렸다.

콰과과광! 우르르- 처음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의 폭음과 앞뒤가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짙은 먼지가 일었다. 부서진 벽돌 파편과 나무조각이 사방으로 날렸고, 지탱할 곳을 잃어버린 벽은 힘없이 무너졌다.

"후.."

먼지가 조금 걷히고, 원래 견고한 벽돌로 만들어진 틉튼한 외벽이 있던 자리에 사람 다섯은 드나들 수 있을 만 한 커다란 구멍이 모습을 나타내자 케빈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쌓인 먼지와 파편들을 대강 털어 낸 케빈은 휙 몸을 돌려 건물의 뒤쪽으로 달려갔다. 그는 나무 한 그루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숨을 고른 후, 카이스에게 받아온 붉은색 귀걸이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아, 다 됐어. 그 여자랑 니엔도 멀리 튀었어."

[네, 알겠어요.]

머릿속에 울려퍼지듯이 아시엘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케빈은 피식 웃고 연결을 끊었다.

돌아가면 꽤 혼나겠지만, 어쩔 수 없지. 되돌릴 수도 없으니 이제 전부 아시엘의 손에 달린 셈이었다.

잠시 나무에 기대어 주변을 경계하던 그는 곧 너덜너덜해진 로브를 벗어서 둘둘 말아 던져버리고 숨겨두었던 하얀 제복 코트를 꺼내 몸에 걸쳤다.

"이제 스리슬쩍 꼽사리 끼면 된다, 이거지?"

아무도 듣지 않는데 경쾌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는 잠시 동태를 살피다 스륵, 소리 없이 그 곳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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