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43. 파헤치다(4)
두 소년은 동시에 머릿속이 새하얘지는것을 느꼈다.유일하게 떠오르는 것은 '망했다' 라는 절망적인 세 글자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서라도 타계해야 한다는 위기감.
아시엘은 평소보다 청력을 대폭 닫아놨던 자신에게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딱딱하게 경직된 얼굴에 겨우 미소를 띄웠다.
"에슈튼 씨. 언제 오셨어요?"
"제가 분명 뭘 하시냐고 물었습니다. 제르닌 경과 케시비언 경은 어디로 가신 겁니까?"
뿌득. 갑자기 옆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 카이스는 놀란 표정으로 옆의 친구를 내려다보았다. 제발 여기서 폭발하지 마, 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조마조마하게 아시엘을 지켜보았지만 다행히도 그는 아직까지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로 근처에 볼일이 있다 하셨어요. 기사단장님 심부름이죠. 자세한 건 저도 몰라요."
태연하게,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어깨까지 으쓱해보이며 말하는 아시엘. 그 절묘한 변명에 카이스는 속으로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에슈튼 역시 호락호락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걸 지금 저더러 믿으라고 하는 소립니까?"
"그게 아니면 뭐겠어요."
처음에 마중 나왔을 때의 그 친절한 웃음은 어디로 갔는지. 에슈튼의 눈동자는 분노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반면에, 아시엘은 속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여유로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오랜 친구인 카이스는 잘 알았다.
겉의 고요는 속에서부터 몰아칠 폭풍의 전조라는 것을.
그 무렵, 케빈과 제르닌은 영상석에서 본 그 장소에 다다라 있었다.
거의 다 허물어지는 성벽을 몇 개나 지나치고 겨우겨우낯익은 곳을 찾아낸 그들이었지만 상상 이상으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모습에 실망하고 말았다.
"와.. 별 기대는 안 했지만 말이야."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케빈.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콸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허물어진 성벽 하나에 걸터앉았다.
제르닌 역시 더러운 강물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고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뒤이어 케빈도 의욕없는 표정으로 돌더미 위에서 내려왔다.
"차라리 아시엘을 데려올 걸. 나한테 이렇게 섬세한 작업은 무리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는 발걸음을 옮겨 시신이 누워있었던 듯 한 자리에 섰다. 영상에서는 혈흔이 웅덩이처럼 고여 있었지만 그것도 비에 씻겨 내려갔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케빈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민하는 척 하자 제르닌은 가차없이 그를 밀쳐버리고 그 자리에 섰다.
"야, 제르닌!"
"생각은 저쪽에서 해. 걸리적거린다."
그는 케빈의 항의를 한마디로 일축해버렸다. 잠시 그를 불만스럽게 바라보던 케빈이었지만 순순히 자리를 비켜 성벽 쪽으로 물러섰다.
제르닌은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주변을 쭈욱 둘러보았다. 아마도 이 곳이 피해자의 시신이 쓰러져 있던 지점.앞에서 찔렸으니 뒷걸음질을 쳤더라도 얼마 못 갔을 테니 죽기 직전에도 이 근처에 서 있었을 것이다.
살인범이 숨을 수 있는 곳은 많아 보였다. 군데 군데 뭉쳐서 아무렇게나 자라난 수풀에 낡아빠진 성벽까지. 게다가 이 곳은 인적도 드물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골목의 거리도 꽤 멀어 비명을 질렀다 하더라도 아무도 못 들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정말 몰래 사랑을 나누기도, 살인사건이 일어나기도 딱 알맞은 장소로군."
"그러니까. 목격자도 없겠는데."
제르닌의 중얼거림에 케빈이 맞장구쳤다. 그의 손에는 누군가가 피우다 버려둔 마약의 꽁초가 들려있었다.
"골 때리는 동네로군."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게 투덜거린 그는 그것을 유심히 살폈다. 제국법상, 치료 목적 이외의 마약은 금지되어 있었다.
케빈은 피식 하고 자조적으로 웃고는 꽁초를 내던져버렸다. 잠시 씁쓸한 표정으로 머리를 짚고 있던 그는 이내 떠오르는 잡생각을 떨쳐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풀숲을 뒤지고 있는 제르닌에게 다가갔다.
"여, 네놈은 뭐 건진거 있냐?"
"..아니."
제르닌은 고개를 내저었다. 케빈은 또 한번 두고 온 아시엘이 아쉬워졌다. 엄청난 머리회전에 추진력까지.아직 16살 꼬맹이일 뿐인데 묘하게 의지가 되는 녀석이었다.
"아."
"왜?"
잠시 딴 생각에 빠졌던 케빈은 문득 들려오는 제르닌의 짧은 감탄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제르닌은 수풀의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쥐고 있었다. 다른 것들보다는 길이도 짧고 약해 새로 난 듯 한 그것을 보며 케빈은 의아해졌다. 다른 것들은 다 들쑥날쑥하지만 단단하게 굳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왜 그것만?
"부러졌었군.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자랐어."
제르닌의 입가에 미미하게 미소가 감돌았다.
"이게 자연스럽게 부러졌을 리도 없으니.. 이 곳엔 피해자와 그 애인 뿐만 아니라 제3의 다른 인물이 있었다는얘기가 된다."
수풀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덮쳤다면 시신은 엎드려 있는 상태가 되었을 것. 하지만 만약 애인이 범인이라면 이런 곳에 숨어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죽일 마음이라면 흉기를 숨기고 있다가 방심하는 순간 찌르면 그만이니.
드디어 안개가 살짝 걷혀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직 풀어야 할 숙제는 많았다.
아시엘과 에슈튼의 대치 사이에 끼인 카이스는 죽을 맛이었다.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로 은근히 이 곳에서 떠날 것을 종용하는 아시엘과 온몸으로 그것을 완강히 거부하며 사나운 눈빛을 마구 쏘아대는 에슈튼.
카이스가 볼 때, 에슈튼보다는 아시엘이 한 수 위인 듯 했다. 자고로 말싸움이란 먼저 감정을 드러내는 쪽이 지는 법이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디 가셨습니까?"
"아까 말 했잖아요. 모른다고. 그리고 제가 그걸 왜 일일히 에슈튼 씨한테 보고해야 하나요?"
으르렁거리는 에슈튼을 달래듯 아시엘이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도발하려는 의도가 잔뜩 서려 있었다. 그리고 맹랑한 소년은 그것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으니 에슈튼이 알아차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뿌득! 에슈튼은 이를 악물었다. 마음같아서는 앞의 건방진 꼬마를 아작내고 싶었지만 아직 그 정도로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상대는 꼬마들이다, 를 주문처럼 몇 번 속으로 중얼거린 그는 다시 아시엘을 바라보았다.
"일단은 제가 이곳의 책임자입니다. 손님들이 어디에 갔는지 알 권리가 있습니다."
"모른다니까요. 그리고 안다고 해도 당신한테 알려야 할 의무도 없고."
변함없이 느긋한 미소로 아시엘이 응수했다. 에슈튼은 드디어 차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폭발했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장난?"
순간 아시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팔짱을 끼는 그 모습에서 에슈튼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하지만 카이스는 알고 있었다. 분명 아시엘의 계획대로 에슈튼이 말려든 것이란 것을. 그리고 자신의 친우는 싸늘하게 식은 표정과는 달리 속으로 낄낄 웃음을 터뜨리고 있을 것이다.
"무례하시네요, 에슈튼씨. 나이가 어리다고 황제의 기사를 무시하는 겁니까?"
싸늘하게 내뱉는 아시엘. 에슈튼은 당황해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실수였다. 초조함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아무리 어려도 상대는 셀레니스, 황제의 기사였다. 에슈튼은 자신의 가벼운 입놀림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한 에슈튼이 무어라 변명하려고 머리를 굴렸지만 어린 기사는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당신은 외곽 지대의 경비대원일 뿐. 당신에게 우리의 일을 알려줘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걸 막을 권리도 없어요!"
작은 몸 어디에서 저런 박력이 나오는지. 그의 호령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한 에슈튼은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그는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흥분해 결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부디 용서하시길."
표정은 절대로 미안한 기색이 아니었지만 에슈튼은 간단히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그리고 그대로 등을 돌려 방을 나서려 했다.
"잠깐만요."
아시엘이 갑자기 불러세우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나갔을 것이다.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그. 완전히 일그러진 얼굴이 잠시도 이곳에 있고 싶지 않다는 그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지만 아시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경비대장을 만나게 해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