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38. 깊어지는 의혹(2)
"남자친구가 경비대원 중 한명이라.. 그 부대장이란 녀석이 그렇게 사건을 숨기려고 하는게 이해가 되는군. 만약 범인이 그 애인이라는 인간이라면 대원 관리 부실로 징계는 물론 앞으로의 승진에도 문제가 생겨."
케빈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는 아까 영상석실에서 빼돌린 사건 자료들 중 한 장이 들려 있었다.
해가 뜰 때까지 채 한 시간도 남지 않아 시간절약을 위해서 이야기를 들으며 자료를 자세하게 살피기로 한 것이었다.
"그렇지. 거기다가 그 감옥의 그 마법 함정은 헨슨, 너도 모르고 있었다고 했고."
"예. 아무것도 몰랐습니다....아, 전에 조금 이상한 일은 있었습니다."
제르닌의 말에 헨슨이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기대감이 깃든 시선이 일순 그에게로 몰렸다.
"그게.. 그 때 좀도둑놈 하나를 잡은 적이 있었는데, 그놈이 탈출을 한 겁니다. 감옥은 텅 비어있고.. 그래서 주변을 샅샅이 찾았는데도 발견을 못 했는데 3일 후, 갑자기 감옥 내에서 발견이 되었죠. "
"감옥 안에서?"
케빈이 의아하게 되묻자 헨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예. 참 이상한 노릇이죠. 쫄쫄 굶은 것 처럼 피골이 상접한 채로 미친놈처럼 계속 중얼거리는 겁니다. 괴물이 있다, 괴물이 있다 고. 그때는 그냥 정신이 좀 이상해진건가, 하고 넘어갔지만.. 아무래도 그 환영 마법인가, 하는 것 때문이 아닐까요."
"흠.."
점점 더 이상하게 꼬여가는 상황에 골머리가 아파진 케빈은 살짝 신음을 흘리다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게 언제쯤이었어?"
"한 2년 쯤 전이었습니다. 그 전에 루아 이클립스 기사단 분들이 다녀갔으니까 똑똑히 기억해요."
"......뭐?"
루아 이클립스. 헨슨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이름에 케빈과 제르닌은 물론이고 고민에 빠져 이야기를 대충 흘려듣던 아시엘과 관심 없다는 듯 친구의 옆에 걸터앉아 있던 카이스조차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들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흐르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헨슨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게 아마 그 일 있기 전 한달이었나? 그리고 그 세달 뒤에 또 찾아오셨는데.. 자세한 건 저도 잘 모릅니다. 아마 그 때 새로 부임했던 지금 대장이랑 부대장 놈을 보러 왔다고 했던 것 같아요....아."
뒤늦게 지금 대화하고 있는 상대가 셀레니스라는 것을 깨달은 듯, 그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황제의 기사들에게 대립 중인 대공의 기사에 대한 이야기는 민감한 사항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초조한 듯 손톱을 살짝 깨물며, 아시엘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루아 이클립스 기사단은 이 곳에 와서 감옥에 모종의 실험을 하고, 그 후에 그 결과를 확인하려고 돌아왔다는... 그렇게 되는데."
"하지만 아시엘. 거기엔 마법사가 없어. 마법이라면 굳이 실험을 해 볼 필요도 없고.. 게다가 그렇게 되면 대원들이 그 마법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잖아?"
케빈의 반론에 아시엘은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환영 마법..그 정도라고 생각하셨겠죠. 하지만 제르닌 선배랑 카이스는 환영으로 만들어진 벽을 통과하지 못했다고 했잖아요."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야?"
"그 말은 결국, [실체가 있는 환영] 라는 말 아니에요? 제가 알기론 현대의 마법엔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요."
아시엘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바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만약에 그 함정이 정말로 그 루아 이클립스가 한 일이라면 기존의 마법과는 조금 다른 무언가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들은 그 불완전한 것을 실험한 거고. 뭐,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그의 설명에 케빈은 여러모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선배를 잠시 맥 빠진 얼굴로 바라보던 아시엘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제르닌에게 시선을 주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이야기가 다른 데로 샜네요. 그래서 돌아올 때는 무슨 일이 있었어요?"
"..돌아올 때?"
무언가 불쾌한 일을 떠올리듯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는 제르닌. 하지만 정말로 미세한 변화라 오랜 지기인 케빈과 눈썰미가 좋은 아시엘이나 눈치챌 정도였다. 카이스 역시 표정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시엘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요? 무슨 문제라도?"
"...상당히 꼴사나웠거든. 그리고 감옥 벽도 몇 개 작살낸 것 같아."
카이스의 대꾸에 케빈은 손을 훠이훠이 저어보였다.
"그 정도면 괜찮아. 어차피 우리도 영상석실 초토화시키고 왔으니까..."
"그거 우리 월급에서 까인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군."
"....."
제르닌이 툭 내뱉은 한 마디로 순식간에 방 내부는 싸늘해졌다. 어쩐지 서글픔이 느껴지는 네 사람의 얼굴에 헨슨은 위로를 건넸다.
"한 달 월급 좀 줄어든다고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황궁 내에서 지내실 테니 별 타격도 없을거고. 게다가 어차피 월급같은거 안 받아도 상관없을테고."
"아닌데? 카이스 빼고 다 평민이라 근근히 벌어먹고 산다고. 거기다 우린 다 독립했으니 각자의 집안과는 상관 없는 사람이야. 가족에게 손 벌리고 살 나이는 지났지."
케빈이 우울하게 대꾸했다. 아시엘과 카이스 역시 첫 달부터 감봉당한다는 생각에 썩 표정이 좋지는 않았다.
"홧김에 서가를 넘어뜨리라고는 했지만 살려고 한 대가 치곤 꽤 혹독하네요.."
아시엘이 중얼거리자 케빈 또한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어이, 헨슨. 기사라고는 하지만 월급쟁이 공무원일 뿐이라고."
"네... 하하."
네 명의 기사들-월급쟁이 공무원들-이 뿜어내는 서러운 공기를 마시며 헨슨은 어색하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약 5분 후. 결국 헨슨의 재촉에 감봉의 충격에서 벗어난 그들은 다시 원제로 돌아갔다.
"그래서.. 돌아올 때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제정신을 차린 아시엘이다시 묻자 제르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갈 때와는 다르게 복도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별 수 없이 그걸 따라 걸었지. 하지만 아니나다를까-함정이 있었지."
"무슨 함정이요?"
아시엘의 물음에 제르닌은 잠시 망설이더니, 짧게 대답했다.
"... 골렘... 이라고 해야 하나. 나도 처음 본 거라 뭐라 말 할수가 없지만 아마 맞을 거야."
"골렘?"
뇌에 바로 입력이 안 돼는지 멍청하게 되묻는 케빈. 갑자기 그게 왜 튀어나오는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시엘 역시 마찬가지인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방 안에 묘한 공기가 침묵과 함께 감돌자 헨슨은 네 기사를 번갈아 바라보다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저...골렘이 뭡니까?"
"흙으로 빚은 인형 같은 거에요. 거기에 마석을 갈아 만든 특수한 용액을 붓고 종속 마법을 걸면 마음대로 조종할 수도 있고, 공격하게 할 수도 있죠. 하지만.."
굳은 얼굴로 자진해서 설명을 이어가던 아시엘은 말끝을 살짝 흐렸다. 말은 쉽게 했지만 그것은 이미 사라진 지 몇 백년이나 된 마법이었다. 위험할 정도로 강력해, 오래 전 대륙 공통법으로 금지되어 이젠 기록만 남아 있을 뿐 시전 방법이나 용액 제조법 등은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처음엔 그저 살인범을 잡으러 왔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이상하게 꼬여 쉽지 않은데 듣도 보도 못한, 수상한 마법까지.
"이게 무슨 일이래... 루아 이클립스에, 수상쩍은 환영 마법에, 골렘이라니."
도저히 머리가 따라가지를 못하는 상황에 케빈은 얼굴을 있는대로 일그러뜨리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런 그를 달래듯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준 제르닌은 말을 이었다.
"헨슨을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겠지만-그건 금지된 마법이다. 그런데.. 사실 그게 골렘인지 아닌지는 나도 잘모르겠어. 아마 환영 마법의 일종.. 이었던 것 같은데."
"제르닌 선배네를 공격한 게 그 골렘인지 아닌지 모를 것들이고, 그래서 상처가 나고 옷이 더러워졌다면 그건 환영이 아니에요. 그게 환영이었다면 생채기 하나도 내지 않고 그냥 통과했을테니까요."
아시엘의 지적에 제르닌은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솔직히 그 자신도 아까 보았던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말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어서 이야기 해 보라는 듯 한 케빈과 헨슨의 눈빛에 져 그는 억지로 말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