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33. 첫 실전은 혹독하다(1)
"후-"
당황하지 말자. 당황하지 말자. 애써 냉정함을 유지하며 아시엘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첫 번째 실전이 경비대에 숨어들어 자료를 훔치다 걸렸다는 상당히 웃기는 상황이지만 그도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겨우 16살의 소년일 뿐이니까.
하지만 마인드 컨트롤은 아시엘의 특기 중 하나였다. 심호흡 몇 번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차갑게 식은 머리로 기싸움에 한창인 케빈과 경비대 무리를 살폈다.
당장에라도 뛰어들어 그들의 목을 베어 넘길 것 같은기세로 살기를 흘리는 케빈 덕분에 경비대는 쉽사리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만한 머릿수를 제압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정체를 들키면 곤란해져 이쪽도 섯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 경비대가 들고 온 횃불과 꽤 거리가 있어 아직 얼굴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후드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아시엘은 빛이 완전히 미치지 않는 곳까지 살짝 물러서 검을 들지 않은 한쪽 손으로 마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케빈의 기세에 눌려 굳어있던 선두의 남자가 자존심이 상한 듯 똥씹은 표정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진정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싹싹 빈다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하지만 다시 되돌아간 것은 케빈의 비웃음이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불만이면 떠벌리지 말고덤벼.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보라고."
"뭐...?"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상당히 도발적인 그의 미소에 남자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뒤의 대원들 역시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분한 표정으로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하지만 케빈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더욱 뻔뻔하게 검을 빙글빙글 돌려보였다.
이미 서로가 서로의 도발에 넘어 간 상태. 상당히 단순하고 다혈질인 케빈의 성질대로 라면 정면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아시엘은 뒤의 헨슨에게 작게 속삭였다.
"저 창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 주세요. 어차피 저 문으로는 못 나갈 것 같고.. 일단 열릴 때까진 시간을 끌 테니까."
흔들림 없이 차분한 지시에 헨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몇 초 후. 아시엘의 판단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분을 이기지 못한 남자의 입에서 결국 고함이 터져나왔다.
"저 놈들 잡아!"
"예!"
그것을 신호로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으르렁거리던 대원들이 달려들기 시작했고 케빈 역시 검을 고쳐쥐고 앞으로 돌진하기 위해 한 걸음 강하게 내딛었다.
하지만-가장 빨랐던 것은, 아시엘이었다. 간발의 차로 마법 캐스팅을 마친 그의 왼손을 중심으로 푸른 빛을 내는 마법진이 생성되었다가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둥그런 물방울 두 개가 공중에 붕 떠 있었다.
"아쿠아 볼!"
아시엘은 시동어를 외치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두 물방울은 액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빠르기로 대원들을 향해 쇄도해나가기 시작했다.
뒤늦게 마법을 눈치챈 케빈은 재빨리 뒤로 펄쩍 뛰었다. 아슬아슬하게 케빈을 스쳐간 직후, 두 개의 물방울은 횃불을 든 대원 두 명의 손목을 꽤뚫었다.
"크아악!"
"으악!"
그들은 피가 흐르는 손목을 감싸쥐며 털썩 주저앉았다. 곧 물방울이 터지며 불도 꺼져버렸다.
"뭐야!"
"마법이다! 마법사가 있다!"
뭣도 모르고 앞으로 돌진하던 대원들은 순식간에 주위가 어둠에 휩싸이자 당황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시엘은 그들에게 정신을 차릴 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준비했던 두번째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엔사 루 테이라 아만."
일반인이 듣기에는 뜻 모를 단어들이 그의 입에서 빠르게 흘러나왔고-곧 아시엘의 왼손에 또다시 마법진 하나가 형성되었다.
곧 노란빛의 마법진이 사그라들었고 대신 커다란 돌덩이 여러 개가 자리를 잡았다.
"스톤 볼."
아시엘이 왼손을 휙 젓자 돌덩이들은 바람을 가르며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경비대에게 날아들었다. 뻐억!
"으악!"
"끄어억!"
여러 번의 타격음 후에 울려퍼지는 비명소리. 날아오는 돌을 피하다 옆의 사람과 부딪혀 넘어지는 이들과 기절한 사람, 그리고 적을 죽이겠다며 버둥거리는 대원이 섞여 영상석실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곧 가장 먼저 혼잡한 곳을 빠져나온 한 명의 대원이 아시엘의 뒤를 노리고 살금살금 다가왔다. 잠시 눈치를 보던 그는 기회가 오자 주저않고 검을 크게 휘둘렀다.
"죽어라아!"
"웃....!"
뒤늦게 눈치채고 재빨리 아시엘이 물러섰다. 하지만 완전히 피하지 못해 검날이 후드의 끝을 찢으며 그의 볼에 붉은 줄을 그었다.
"윽..!"
아시엘은 자신의 동요로 흔들리기 시작하는 마법을 취소해버렸다. 그리고 곧 이어진 두번째 공격. 그는 급히 레이피어를 들어 막으려 했지만 케빈이 한 발 먼저 그의 앞을 가로막고 날아드는 검을 쳐냈다.
카앙! 두 자루의 검이 부딪히며 거친 쇳소리가 울려퍼졌다. 아시엘을 공격했던 남자는 케빈의 힘에 뒤로 밀려 휘청하고 말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케빈은 그의 명치에 강하게 주먹을 박아넣었다.
"크억!"
남자가 스르륵 바닥으로 무너지자 한 숨을 돌린 케빈은 아시엘에게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야! 네 마법에 나까지 골로 갈 뻔 했잖아."
"당연히 피할 줄 알았죠. 게다가 선배 아까 너무 흥분해서 정신 좀 차리라고요."
뺨에 흘러내리는 피를 대충 닦으며 대꾸한 아시엘은 또다시 이어지는 공격에 몸을 확 숙여 검을 피하고 공격해 온 남자의 발에 태클을 걸어 넘어뜨렸다.
"크악!"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의 배를 사정없이 짓밟아 일어날 수 없게 한 그는 오른손으로 레이피어를 휘둘렀다. 이미 대원들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는지 공격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이제 아까 그 마법은 못 써?"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외치는 케빈. 하지만 아시엘의 대꾸는 절망적이었다.
"이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있는 게 아니잖아요. 다 섞여버려서 엉뚱한 사람이 다칠 수도 있어요."
"쳇."
그 엉뚱한 사람란 게 잠긴 창문을 열려고 낑낑거리는 헨슨을 가리킨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케빈은 혀를 짧게 찼다. 하지만 잠시 방심한 그 순간 -검날이 그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큭!"
뜨끔한 통증에 그는 급히 뒤로 물러섰다. 하마터면 놓칠 뻔 한 검을 고쳐쥔 케빈은 자신에게 검을 휘두른 대원의 명치를 신경질적으로 걷어차 쓰러뜨렸다.
"젠장, 끝이 없군."
일일히 기절시키려니 귀찮고 굉장히 번거로웠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 다시 정신을 차리는 놈도 생겨나 두 사람은 점점 지쳐갔고 몸의 생채기도 늘어갔다.
최대한 가까이 붙어 있으려 했던 아시엘과 케빈의 거리도 어느새 멀어져버렸다. 케빈의 위치를 확인하던 아시엘은 갑자기 이는 돌풍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부웅! 또 언제부터 있었는지 거구의 남자가 그를 향해 거대한 철퇴를 휘두른 것이었다. 아시엘얀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그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간 철퇴는 옆의 애꿎은 대원 하나를 치고 자료함을 박살냈다.
우직, 하는 소리를 내며 원래 형체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자료함을 질렸다는 얼굴로 바라보던 그는 또다시 날아드는 쇠몽둥이를 한번 더 몸을 굴려 피했다.
콰앙! 이번에는 나무로 된 바닥에 거대한 구멍이 나며짙은 먼지가 일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나뭇조각과 파편. 무지막지한 파괴에 같은 편들도 쉽사리 철퇴의 사정거리 내부에 들어오지 못했다.
"야, 그렘! 다 때려부술 일 있냐?"
한 대원이 신경질적으로 외치는 말에 속으로 공감하며 아시엘은 몸을 일으켰다. 찌릿하게 발목에서 통증이 올라왔지만 무시하고 그는 여전히 흘러내리는 뺨의 피를 한번 더 닦아냈다.
"이 쥐새끼같은 놈..!"
계속해서 공격이 빗나가자 그렘이라 불린 남자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가 욕설을 내뱉으며 다시 한 번 쇠몽둥이를 들어올리자 아시엘 역시 마력을 운용하며 고속으로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죽어라!"
철퇴가 정면으로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아시엘도 움직였다.
쏜살같이 돌진한 그는 살짝 옆으로 비껴가 공격을 피하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방어도 하지 못하는 남자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뻐억!
"어?"
하지만 그리 강하지 않은 충격에 그는 씨익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그는 철퇴를 놓아버리고 대신 자신의 배에 박혀있는 아시엘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리고 그 때-
"라이트닝 쇼크."
역으로 비웃음을 지어주며, 아시엘은 시동어를 외쳤다. 순간, 닿은 손을 중심으로 강력한 전기의 충격이 남자의 몸을 꽤뚫었다.
"끄아아아악!"
온몸에 퍼져나가는 고통에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는 그.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을 잃은 듯 괴성은 끊기고 말았다.
김을 모락모락 풍기며 힘없이 쓰러지는 그의 몸뚱이를 발로 걷어 차버린 아시엘은 턱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가다듬었다.
"하아..하.."
지친 몸을 채찍질하며 아시엘은 다시 마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거구의 사내마저 당해 쓰러지자 당황한 경비대가 쉽사리 접근하지 못한다는 것을 위안 삼으며 아시엘은 애써 자세를 잡고 주변을 경계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대치상황이 이어지던 그 때-한쪽에서 반가운 외침이 들려왔다.
"됐습니다!"
대원들에게 들킬까 봐 일부러 쉰소리를 낸 듯 했지만 아시엘과 케빈은 단번에 누구인지 알아채고 화색이 밝아졌다.
갑작스레 두 사람이 몸을 홱 돌려 달아나기 시작하자 당황한 대원들은 얼떨결에 길을 터 주고 말았다. 곧 제정신을 차린 그들이 아시엘과 케빈을 추격하기 시작했지만 두 사람은 교묘히 공격을 피해가며 포위망을 뚫었다.
"잡아라! 잡아!"
우르르르. 좁은 공간 안에서 쫒고 쫒기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벌어졌다. 남은 힘을 다 짜내 앞을 가로막는 대원들을 원샷원킬로 때려눕히며 두 사람은 빠르게 창문으로 달려갔고 대원들은 그 뒤를 끈질기게 뒤쫒았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이 건물 2층의 방으로 되돌아가야 하니 끝까지 추격당하면 상당히 귀찮 질 게 뻔했다. 비틀거리면서도 발걸음을 늦추지 않던 아시엘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줄지어 늘어선 영상석의 서가들이었다. 아시엘은 목청껏 외쳤다.
"선배! 서가를 넘어뜨려요!"
한 발 먼저 창문가에 도착해 있던 케빈은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대치 중이던 대원들을 밀어내고 눈앞에 서있는 서가로 몸을 날렸다. 헨슨은 그를 다급하게 붙잡았다.
"안됍니다! 바닥에 고정되어 있어서 움직이지 않.."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케빈의 검에 희미한 빛이 일렁이기 시작한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검기!'
헨슨은 흡, 하고 숨을 삼켰다. 근처의 다른 대원들도 그 모습을 보고 새파랗게 질려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선명하게 주황빛을 내기 시작하는 검을 치켜든 케빈은 그것을 가볍게 휘둘러 서가의 아래쪽을 가로로 베어내 버렸다.
서걱. 깔끔하게 아랫면이 잘린 서가가 이리 저리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안에 늘어서 있던 영상석들은 와장창 소리를 내며바닥에 떨어져 가루가 났고- 결국 위태롭게 흔들리던 그것은 안쪽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끼기기기-쿵! 서가가 넘어지며 그 앞에 서 있던 다른 서가를 쳐 쓰러뜨리고, 또 그것이 쓰러지며 다른 것을 밀어 넘어뜨리는 것이 이어졌다. 쿠웅! 쿵! 쿠우웅!
"으아아악! 피해라!"
무거운 서가가 충돌하는 소리가 연이어 울려퍼졌다. 마치 거대한 도미노 놀이 같았지만 그 파급력은 엄청나서-내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서가의 부서진 조각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먼지가 시야를 가릴 만큼 짙게 일었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아래에 깔려 기절한 사람, 팔다리가 끼어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무사히 피했던 이들도 자욱한 먼지에 정신없이 기침을 하고 눈을 비비는 등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리고 한참 후. 먼지가 가라앉고 겨우겨우 몸을 추스린 몇몇 이들이 눈을 떴을 때에는, 아시엘과 케빈 그리고 헨슨 모두 그 자리를 빠져나간지 오래였다.
"아.."
그들은 그저 먼지를 보얗게 뒤집어쓴 채 멍하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창문 밖의 밤하늘을 황망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