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9.때로는 과감하게(3)
잠시 후. 저마다 편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그들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궁금하신 게 뭡니까?"
자포자기 한 듯 벽에 기대어 주저앉은 헨슨이 입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케빈이 말했다.
"이번 사건에 대한 모든 것. 되도록이면 순차적으로, 자세하게."
꽤나 진지한 표정의 그에, 헨슨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턱을 쓰다듬으며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일단 저도 수사에 참여하긴 했지만... 너무 기대는 마십시오. 중간에 빠졌으니까.."
"괜찮다. 그것보다 어쩌다 빠지게 된 거지?"
제르닌의 물음에 헨슨은 어깨를 으쓱 해보였다.
"자의는 아니었습니다. 부대장한테 대들었다가 건방지다며 제외된 거죠."
"왜 그렇게 된 거에요?"
이번에는 마법을 유지하는 데 집중하며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아시엘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헨슨과 눈이 마주치자 찔리는 것이 있는지 움찔하며 재빨리 시선을 피하는 그였다.
"이미 협박도 다 해놓고 새삼스럽게 왜 이러십니까. 별로 화 안 났어요. 아까 조금 무섭긴 했지만."
헨슨은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물론 아까 끌려들어 오면서 패대기 쳐지는 바람에 여러 군데 멍이 든 것 같긴 하지만 그건 뻔뻔하게 모른 척 하며 앉아있는 제르닌과 케빈 때문이지 작전 자체를 고안해 낸 아시엘의 잘뭇은 아니었으니까. 그제야 아시엘은 어색하게 헤헤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그래도 말려들게 해서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사실 안 괜찮지만. 하고 헨슨은 남몰래 속으로 투덜거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이야기로 돌아가서- 수사 방식 때문에 대장과 마찰이 있었습니다. 여자 시신이 두 구가 발견된 건 아시죠?"
주의 깊게 경청하던 네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하나는 젊은 여자의 시체였고 하나는 성별만 겨우 구별할 수 있었을 정도로 심하게 부패되어 신원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볼 때 두 시신의 연관성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대장과 부대장은 그것을 연쇄살인이라고 전제를 두고 수사를 진행했습니다."
"잠깐, 잠깐. 연쇄살인사건 이라고?"
케빈이 급하게 손을 저으며 헨슨의 말을 저지시켰다. 그의 표정에는 황당함이 여실히 드러나있었다.
"그럼 동일범의 소행이라는 거잖아. 하지만 우리한테 넘어온 보고서에는 그런 말 따위 한 마디도 없었다고."
애초에 연쇄살인같은 엄청난 사건이라면 늦어도 사건 발생 후 한달 안에는 황성에 보고를 해야 했다. 하지만 3개월동안 숨기기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알면 알수록 상황이 잔뜩 꼬여만 가는 상황애 골이 아파진 그는 이마를 짚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표정을 굳히는 가운데 제르닌이 입을 열었다.
"연쇄살인으로 판단이 되었음에도 그걸 숨긴 이유는 뭐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지만... 대장은 야망이 큰 사람입니다. 아마 큰 사건을 독자적으로 해결하면 승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요. 그냥 제 생각입니다."
제르닌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고민에 빠졌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헨슨은 이야기를 계속해 달라는 아시엘의 재촉에 다시 말을 이어갔다.
"어쨌든 제가 볼 때는 그건 절대로 연쇄살인 같은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대장과 부대장 녀석들한테 제 생각을 이야기했다가 묵살당했습니다."
"그래서 다툰 거에요?"
아시엘은 대충 알겠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헨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 아니에요?"
"네. 에슈튼 녀석이 말하더군요. 한 번만 더 끼어들었다가는 조사팀에서 제외시킬거라고."
생각만 해도 열받는지 헨슨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랬는데 영 찝찝하기도 하고... 새파랗게 어린 놈한테 당한 게 화나기도 하고. 결국 독자적으로 캐보다가 잘렸죠, 뭐."
투덜거리듯 말을 마친 그는 곧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돈이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 이 일 끝나면 그놈들 좀 어떻게 해 주실 수 없습니까? 작년에 부대장이랑 대장이 나란히 제 부모 힘으로 부임하고 나서 경비대 꼴이 말이 아닙니다."
헨슨은 간절하게 제르닌과 케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제르닌은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걱정 마라. 가서 하나도 빼먹지 않고 황제폐하께 보고할테니까."
부패한 경비대를 바로잡을 작정을 했는지 단호하게 대꾸한 제르닌은 이야기를 재촉했다.
"경비대의 상황은 잘 알았다. 이제 사건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지."
"음... 사건에 대한 건 정말로 아는게 별로 없습니다. 혼자서 조사하던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저지되었으니까요. 첫 번째로 발견된 여자 시신이 발견된 장소도 모르고."
곤란한 듯 헨슨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건만 그들의 대꾸가 없자 괜히 미안해진 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지만 곧 들려오는 케빈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그럼 플랜 B로 가야겠지?"
"그렇겠죠?"
그 뒤를 이어 아시엘이 경쾌하게 말했다. 헨슨은 어리둥절해져 그들을 바라보았다.
"플랜 B가 뭡니까?"
"..네 모습을 보아하니 머리를 쥐어 짜 봐도 더이상 쓸모 있는 정보는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다음 작전으로 넘어가려 한다."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는 제르닌에 그는 더더욱 아리송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도대체 다음 작전이 뭐냐고?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헨슨의 표정에 곧 그의 의문을 알아차린 아시엘이 검지손가락을 뿅, 하고 세우며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자료를 빼돌릴 거에요."
"..예?"
순간 뇌에 그의 말이 입력이 되지 않은 건지 헨슨은 멍청하게 되물었다. 아시엘은 친절하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건 현장과 시신을 기록한 영상석과 수집한 증거물들, 그리고 조사 자료. 보고는 안 했지만 설마 그것도 기록 안 해둘 리는 없으니까요."
"아니, 그건 그렇지만... 잠깐, 그렇다면 지금 훔치겠다..고요?"
"네."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인 아시엘은 기겁하는 헨슨을 무시하고 케빈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지하 감옥에 갇혀있는 그 사람도 만나본다고 하시더라고요, 케빈 선배가."
"직접 이야기를 들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의 시선을 눈치챈 케빈은 씨익 웃으면서 석상처럼 굳어버린 헨슨을 바라보았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길 안내 잘 부탁해."
"아, 아, 아, 아니 잠시만요. 잠깐만!"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헨슨은 다급하게 두 손을 내저었다.
"잠시만요! 지하 감옥이나 자료랑 영상석을 모아둔 영상석실은 저마다 보초가 있습니다... 특히 감옥은 내부에도 보초가 여럿 있구요. 침입자로 잡힐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조심해야지. 그리고 현행범으로 잡히지만 않으면 괜찮아. 일개 경비대원이 황실 기사를 심증만으로 체포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케빈은 호쾌하게 말하며 헨슨의 등을 팡팡 두드릴 뿐이었다. 절망적인 표정이 된 헨슨은 제르닌을 바라보았다.
"제르닌 경... 정말로 가실 겁니까?"
"..방법이 없으니까."
하지만 제르닌 역시 케빈과 같은 생각인듯 자신의 검을 챙겨들고 있었다. 그리고 헨슨이 마지막 희망을 걸고 카이스에게 시선을 주었을 때ㅡ
[나 헨슨 파블은 이번 사건 해결 방식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아아!"
가차없이 레코더를 재생하는 그에 머리를 감싸쥐고 괴성을 내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헨슨을 내버려 둔 채 제르닌은 검을 허리춤에 꽂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두 팀으로 나눠서 가자. 헨슨, 길 안내 부탁한다."
"..이런 건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라고 하는 겁니다.."
결국 헨슨 역시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애초에 거부권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저마다 후드를 눌러쓰고 검을 챙기는 네 사람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던 헨슨은 갑자기 자신에게 날아오는 천을 깜짝 놀라 받아들었다.
"그거 써요. 혹시라도 얼굴을 들키면 곤란해질 테니까."
이미 후드가 달린 겉옷을 편하게 걸쳐입은 아시엘이 제르닌의 짐을 뒤져 여분의 것을 그에게 준 것이었다.
"..네, 뭐..감사합니다."
생긋 웃어보이는 소년에게 감사인사를 한 그는 잠시 꺼림직하게 자신의 손에 들린 후드를 바라보다 별 수 없이 걸쳐입고 후드를 눌러 쓸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