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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1화 (21/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1.대면하다(5)

똑똑. 루이카엔은 가볍게 방문을 두드린 후 제르닌과 카이스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가 마주한 것은 평소에는 구경하기 힘든 제르닌의 반가운 얼굴이었다. 루이카엔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야, 왜 그래?"

제르닌은 단장의 물음에 한숨을 푹 쉬고 말없이 어깨너머로 침대를 가리켰다. 루이카엔은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고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이불을 돌돌 만 채 숙면 중인 카이스의 붉은 머리 뒤통수가 침대에 파묻혀 있었다.

"그러니까 저 녀석이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난다고?"

"응. 네놈보다 깨우기 힘든 녀석은 처음이다."

어깨에 닿는 블루블랙의 머리칼을 손으로 정리해 깔끔하게 묶으며 제르닌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루이카엔은 끙,하는 소리를 내며 이불에 파묻힌 채 요지부동인 카이스에게 다가갔다.

"일어나서 빨리 준비해. 아시엘은 벌써 샤워하고 나왔다고."

"......"

"카이스!야, 죽었냐?"

"......."

몸을 흔들어도 봤지만 여전히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루이카엔은 점점 초조해졌다.

이미 시간은 기상시간을 훌쩍 넘긴 8시. 라이펜의 업무가 시작되기 전의 짬을 이용한 만남이라 더이상 지체하면 곤란했다.

"이걸 어쩌나.."

루이카엔은 난처하게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때 마침 문에서 똑똑 하고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루이카엔은 고개를 들었다.

"아시엘인가?"

"들어와."

제르닌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살짝 열리고 제복을 깔끔하게 갖춰입은 아시엘이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카이스 아직 안 일어났어요?"

"마침 잘 왔어."

루이카엔은 구세주를 만난듯 그를 반겼다. 제르닌 역시 드디어, 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고 하니 그는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뜻밖의 환대에 얼떨떨해하며 아시엘은 두 사람이 이끄는 대로 카이스가 쿨쿨 자고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에휴."

익숙한 상황에 아시엘은 이마를 짚었다. 제 버릇 개 못준다더니- 작게 투덜거린 그는 카이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카이, 일어나. 두번 말 안한다."

"일어났어, 일어났어!"

벌떡! 전광석화가 따로 없었다.순식간에 둘둘 말린 이불을 걷고 마치 시체가 관에서 일어나듯 몸을 세운 카이스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아시엘의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각성하긴 했지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건지 카이스는 놀란 눈동자로 제르닌과 루이카엔 그리고 아시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시엘은 떨떠름한 표정의 선배들을 살짝 보고는 한번 더 한숨을 내쉬고 작은 손을 들어 가차없이 친우의 뒤통수를 후렸다. 뻐억!

"크악!"

경쾌한 타격음 뒤에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이게 뭐야- 루이카엔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색하게 웃고는 카이스를 재촉했다.

"얼른 준비해. 황제폐하가 부르신다."

"아...."

그 말이 곧바로 뇌에 입력이 되지 않았는지 잠시 멍하니 단장을 바라보기만 하던 그는 곧 까치집이 된 붉은 머리를 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어떻게 깨운 거냐?"

황제의 집무실로 향하는 길, 루이카엔은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오는 아시엘에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는 아름다운 정원 구경에 정신이 팔려 듣지도 못한 것 같았다. 대신 카이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냥... 저도 모르게 거의 본능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본능?"

루이카엔의 되물음에 카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에서 늦잠을 잤다가 험한 꼴을 본 적이 한 두번이 아니라서요."

"험한 꼴? 자다가 물벼락이라도 맞았냐?"

"그 정도면 다행입니다."

울컥한 목소리로 카이스가 드물게 큰 소리를 냈다. 그 바람에 아시엘도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보았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다가 불덩어리가 날아오질 않나 툭하면 발길질에 주먹질이나 해 대고..."

"그러니까 누가 늦잠 자래?"

갑자기 한쪽에서 날아오는 아시엘의 목소리에 카이스는 몸을 움찔하며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루이카엔은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사이 좋네."

그들은 계속해서 걸음을 재촉했다. 넓은 정원을 가로지르고 한참을 더 걸어서야 세 사람은 본성에 다다를 수 있었다. 경계를 서고 있던 근위병들은 그들이 다가오자 얼른 입구를 막았지만 곧 제복을 보고 간단히 경례를 올렸다. 새하얗고 웅장한 본성 앞에서 다소 긴장한 듯한 아시엘과 카이스의 등을 루이카엔이 격려하듯 툭툭 두드려주었다.

"어깨 힘 풀어. 바쁘니까 얼른 들어가자."

"앗, 잠시만요!"

잠깐 반항해보았지만 두 소년은 등을 떠미는 단장의 손에 반 강제로 본성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내부에 들어서자 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탁 트인 홀이었다. 밖과 마찬가지로 새하얀 대리석으로 된 내부의 벽과 바닥에 깔린 붉은색 카펫이 묘하게 어울려 우아하게 보였다.

"이 카펫 무늬는 해안 쪽 지방인 브렘 산이에요?"

"잘 아네. 시종장이 그러는데 황제폐하가 굳이 국산을 고집하신다더라고."

아시엘의 물음에 가볍게 대답하며 루이카엔이 빠른걸음으로 앞서나갔다. 두 소년도 그의 뒤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며 눈동자로 성 내부를 살폈다.

차가운 대리석으로 내부가 둘러싸여있었지만 훈훈한 공기가 흐르는 것을 보니 대리석 하나하나에 보온 마법이 걸려있는 듯 했다.

거대한 샹들리에가 천장에 달려 반짝이고 있었고 군데군데의 조각상 역시 기품있게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식품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것들을 자세히 살필 새도 없이 그들은 빠르게 걸었다. 바쁘게 붉은 색 눈동자를 굴리던 아시엘 문득 인테리어의 분위기가 어느 순간부터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시엘의 소박한 의문을 알아차렸는지 루이카엔이 간단하게 설명했다.

"계절이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니까. 황성은 1년에 4번 환절기때마다 대청소를 하면서 실내 장식도 계절에 따라 바뀌지. 한번에 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일주일의 기간을 두고 진행되는 작업이야.....아."

그 때, 문득 루이카엔이 빠르게 걷던 걸음을 멈췄다. 그를 따라 발을 멈춘 카이스는 황성을 살피느라 넋이 나가버린 아시엘의 뒷덜미를 급하게 잡아 멈춰세웠다.

"켁! 왜, 왜그래?"

카이스는 대답 대신 정면을 가리켰다. 아시엘은 그제야 루이카엔의 앞에 왠 낯선 남자가 수행인을 이끌고 의도적으로 복도를 막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게 누구신가. 셀레니스 기사단의 카시마엘 경 아닌가?"

정말로 반갑다는  듯 그는 두 손을 비비며 환하게 웃었다. 조금 긴 듯한 얼굴에 창백한 피부색이 병든 말을 연상시켰지만 번뜩이는 두 눈만은 영리한 생쥐를 닮았다. 징그러운 놈. 속으로 욕설을 냅다 던지며 루이카엔은 얼굴에 경련이 이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보였다.

"이런. 누구신가 했더니 하노빌 백작이셨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침 어제 루아 이클립스의 에피로스 경과 술 한잔 하면서 자네 이야기를 했었지."

이야기를 했다면 욕이겠지. 그런 생각을 했지만 루이카엔은 미소를 일그러뜨리지 않고 정중하게 말했다.

"그것 참 영광이로군요. 하노빌 백작님께서 저에게 관심을 가져주시니 말입니다."

"영광까지야. 아 참, 소개하는 걸 잊었군. 이쪽은 이번에 루아 이클립스에 입단한 내 아들이라네. 니스, 인사하렴."

하노빌 백작이 살짝 몸을 옮겨 그의 뒤에 서 있던 붉은 제복의 소년을 보여주었다. 백작과 닮은 듯한 인상의 소년이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줄곧 루이카엔의 뒤에 선 아시엘과 카이스에게 꽂혀 있었다. 백작 역시 그것을 알아차린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저 아이들은 자네 쪽의 신입인가?"

"그렇습니다.아주 성실하고 영리한 아이들입니다."

"어째 낯이 익은데 말이야. 특히 오른쪽의 금발 자네는 나와 구면이지? 빨간 머리 자네도."

"아시엘입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백작님."

백작의 은근한 물음에 아시엘은 예의바르게 생긋 웃어보이며 대꾸했다. 구면이라고? 루이카엔은 두 사람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시엘은 모른 척했다.

아시엘은 아카데미 시절을 떠올렸다. 자신의 아버지와 닮은 외모를 가진 그 소년에 대한 기억 중 썩 좋은 일은 없었다.

대공의 총애를 받는, 대공파의 실세. 영리한 머리로 대공을 모시는 공작의 신임을 얻는데 성공한 하노빌 백작은 곧이어 대공이 추진하던 어떤 일을 성공시킴으로서 영향력이 큰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덕분에 저 니스 역시 아카데미 안에서 기세 등등하게 아이들을 휘젓고 다녔다.

"나를 아는가?"

"하노빌 백작님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리고 루카인 아카데미에서 아드님이신 니스 루 하노빌 군과도 같은 클래스였던 적도 있었고요."

"아아. 역시 그랬었군. 자네같은 미인은 한번 보면 쉽게 잊기는 어렵지. 내 기억이 맞다면 내 아들과 문제를 일으켰던 것 같은데."

"아마도요."

아시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건방진 태도였지만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잠깐 대화가 끊어진 틈에 루이카엔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저희는 지금 황제폐하의 부름을 받고 가는 중이라 지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만 가봐도 될까요."

"알았네. 바쁘다니 이만 가 보게."

백작은 선심쓰듯 말하고는 수행원들에게 손짓을 보내 막고있던 길을 터주었다. 하지만 루이카엔이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고 지나가려고 하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카시마엘 경. 간만에 만나서 반가웠네. 다음에 언제 자리를 마련하지. 아시엘 군과 그 옆의 카이스 군이었던가. 그들과도 아직 할 얘기가 남아 있고 내 아들도 옛 친우와 함께 회포를 풀고 싶어할 테니 말이네."

백작의 말에 루이카엔은 옮기려던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저희는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입니다. 그 의미를 모르시진 않을 텐데요."

"무슨 뜻이지?"

"기사법 제 3조. 셀레니스 기사단은 상황에 따라 후작 이하의 권한을 가질 수 있다. 백작님이 함부로 부르고 할 만한 위치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고ㅡ 전 카시마엘이 아니라 루이카엔 경입니다. 백작가의 사생아라며 못마땅해할 바엔 의미 없는 제 성 대신 이름을 기억해주시는게 어떠신지."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하는 루이카엔의 뒤를 따라 아시엘과 카이스도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남겨진 하노빌 백작은 조용히 그들의 뒷모습을 눈으로 쫒다 이윽고 픽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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