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7.대면하다(1)
평소와 같이,아시엘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아직 해가 채 떠오르기도 전의 이른 새벽이었다.
침대로 누운 채로 멍하게 밝아오는 창 밖을 확인한 그는 밀려오는 잠의 미련을 떨쳐내지 못하고 푹신한 배게와 따뜻한 이불에 다시 몸을 푹 파묻었다. 하지만 피곤한 몸과는 다르게 머리는 계속 각성을 요구해댔다. 결국 아시엘은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는 자신의 성미를 원망하며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시간은 새벽 5시. 어제 루이카엔이 셀레니스 기사단의 기상 시간은 7시라고 했으니 아직도 2시간가량 남있었다. 더 잘까- 아시엘은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드르렁.. 크아아- 푸우우."
"....."
새로운 룸메이트인 슌이 요란스레 코를 골기 시작해 할 수 없이 수면을 포기하고 아시엘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끄으아-"
슌이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크게 기지개를 켠 후 최대한 기척을 내지 않고 침대를 정리한 그는 옷을 갈아입고 방에서 빠져나왔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그의 몸을 감싸는 싸늘한 새벽의 공기. 바닥으로부터 타고 올라오는 냉기에 부르르 몸을 떤 그는 졸음이 덜 깬 얼굴을 손으로 두어 번 탁,탁, 때리며 정신을 완전하게 깨우려 애썼다.
'그러고 보니 거의 3시간밖에 못 잤네.'
어제 오후부터 벌어진 환영회를 빙자한 놀자판은 새벽 1시 반이 되어서야 끝났다. 대충 뒷정리를 하고 잠자리에 든 것이 새벽 2 시쯤. 아침잠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억울한 줄이야,하고 한 번 투덜거린 그는 터덜터덜 1층의 로비로 내려갔다.
"...어?"
의외로 1층은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간밤에 어질러 놓은 것을 치우느라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는 황궁의 시종들과 시녀들이었다.
생각보다 목소리가 컸던 것일까.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 놀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아시엘은 조금 당황해 입을 열었다.
"저기.. 제가 방해한 건가요?"
겨우 끝맺은 그의 말에 그들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수습한, 나이가 지극한 노인이 일하던 이들에게 계속 일 하라는 눈빛을 보내고는 아시엘에게 다가왔다.
"방해라니 당치 않습니다. 너무 어려보이셔서 긴가민가 했는데 신입 기사 분이셨군요!
노인의 부드러운 미소에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무기상의 노인과는 완전 딴판이네, 하고 생각하고 말았다.
"저는 기사단 생활관의 관리를 맏고 있는 황궁 전속 시종 슈텐이라고 합니다."
한번 더 인자하게 웃어보인 노인은 아시엘을 소파로 이끌어 앉히더니 어느 새 차와 쿠키까지 내왔다.
"아..감사합니다.괜히 일찍 일어나서 민폐만 끼치네요."
아시엘이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며 감사인사를 했지만 에시튼은 당연한 일을 한 것이라는 듯 웃어 보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서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노인의 마음을 읽어낸 아시엘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한 번 더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침공기에 경직됬던 몸이 사르르 녹아 내리는 듯 한 느낌. 그 기분좋은 온기에 잠시 몸을 맞긴 아시엘의 입가도 풀려 자연스럽게 편안한 미소가 얼굴에 걸렸다. 그 모습에 열심히 청소를 하던 시녀들과 심지어는 시종들마저 순간 흠칫하며 얼굴을 붉혔지만 궁에서 오래 일한 경험으로 재빨리 얼굴을 수습하고 고개를 돌렸다.
뭐지, 조금 의아해진 아시엘은 그들을 마주봤지만 하녀들은 시치미를 뚝 떼고 하던 일을 할 뿐이었다. 결국 그는 포기하고 다시 찻잔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책을 가지러 가고 싶었지만 막 깨끗하게 꽂아놓은 것을 곧바로 가져온다면 정리한 시종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른다는 소심한 고민에 그는 차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숨을 한 번 내쉰 아시엘은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얀 천장과 샹들리에 뿐.
쿠키와 차 덕분에 어느 정도 배가 부르자 몸의 긴장이 풀리자 이대로 다시 잠들어도 괜찮겠다, 하는 생각이 무의식 속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몸이 노곤해지는 느낌에 아시엘은 하품을 했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정신이 현실과 멀어져가는 듯 한 느낌에 그는 굳이 저항하지 않았다.
더 이상 오가는 시종들의 발소리도, 조용조용 대화하는 시녀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시엘은 그대로 소파에 기대어 잠들어버렸다.
"..크흠! 모두 일하세요."
"아, 네!"
그런 소년을 멍하니 넋을 잃고 바라보던 시종들과 시녀들은 시종장의 헛기침에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청소가 슬슬 마무리 되어 갈 때 쯤 1층의 방에서 한 사람이 휘적휘적 걸어나왔다. 그는 졸려 죽겠다는 얼굴로 크게 기지개를 켰다.
"아으으-! 좋은 아침."
"아, 루이카엔 님."
아침부터 제복을 차려입은 루이카엔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그들에게 하품을 하며 손을 흔들어 보인 후에, 뒤늦게 소파에 기대 잠들어 있는 조그만 인영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어라, 아시엘? 이 애 언제부터 여기서 이러고 있었어?"
"한 5시 쯤부터 여기 계셨습니다. 차와 과자를 드렸는데 다 드시고는 주무시더군요."
시종장의 대답에 루아카엔은 약간 어이가 없어져 한숨을 내쉬고는 아시엘의 어깨를 잡고 살짝 흔들었다.
"야, 여기서 자면 감기걸려."
하지만 아시엘은 여전히 깨어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루이카엔은 어쩔 수 없이 한 번 더 한숨을 내쉬고는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옆으로 눕히고 담요를 찾아 덮어주었다.
"나 참... 다시 잘 거면 왜 그렇게 일찍 일어나서는."
그렇게 중얼거리긴 했지만 가끔 가다 이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아무리 피곤하고 늦게 자도 꼭 평소의 시간대로 아침에 눈이 자동적으로 떠진다는 사람. 아시엘의 평소 기상시간을 대충 계산하며 루이카엔은 혀를 내둘렀다. 게다가 어제는 2시가 다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으니 수면 시간도 상당히 짧았을 터였다.
그 때 타이밍 좋게 청소도 다 끝는 듯 했다. 달콤한 잠에 푹 빠져버린 아시엘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들은 조용히 생활관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루이카엔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차가운 새벽공기를 들이켰다. 흐리멍덩하던 정신이 조금이나마 깨는 기분이었다. 한 번 더 기지개를 쭉 켠 그는 잠시 팔을 쭉 뻗으며 스트레칭을 하고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내듯 날카로운 소리로 휘파람을 불었다.
잠시 후.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푸드덕! 하고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생활관 지붕의 꼭대기에서 독수리가 한 마리 날아오르더니 생활관 근처를 한번 비잉 돌고는 루아키엔이 들어올린 팔에 사뿐 내려앉았다.
"잘 잤어? 에니르."
꾸르륵, 하고 생긴것과 어울리지 않게 애교있는 소리를 내며 독수리가 어깨에 부리를 부벼왔다. 루이카엔은 귀엽다는 듯 에니르의 머리를 슥슥 긁어 주고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보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난 탓인지 아직도 멍한 머리를 깨우려 그는 머리를 좌우로 세게 털었다.갑작스러운 황제의 호출에 뭣도 모르고 나오기는 했지만 역시 기상 벨이 울리기 일보직전까지 시간을 꽉꽉 채워서 자던 그에게는 조금 무리였다.
대외적으로는 날이 선 명검 같다느니, 발톱을 세운 맹금이라니 하지만 사실 루이카엔이 아는 이 제국의 현 황제, 라이펜은 상당히 엉뚱한 사람이었다. 폭약을 직접 만들겠다며 성벽을 날려버린 일은 전설이 된 지 오래였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의 보좌관인 페이튼이 직접 마법사들에게 안에서 폭탄이 터져도 멀쩡할 공간을 만들어내라고 황당한 주문을 했겠는가.
거기다 루이카엔을 한밤중에 불러내 함께 몰래 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일도 허다했다. 물론 이런 일이라면 그도 환영이었지만 뜬금없이 호출해 "왜 인간은 팔꿈치를 핥지 못하는가" 같은 것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요구할 때는 솔직히 루이카엔이라도 조금 짜증났다. 원래 황제의 헛소리를 받아주는 일은 다른 이의 몫이었지만 10년 전에 황제의 최측근이었던 그가 뜬금없이 사라져버린 이후에는 루이카엔의 몫이 되어버렸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부르시는 건지. 그는 엄습하는 불안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망설임도 잠시, 그는 발걸음을 재촉해 본성의 황제 집무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