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9화 (9/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9.야시장에서(5)

"좀 곤란했는데 도와주신 분들이야."

"하하! 뭐,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묻는 듯한 카이스의 눈빛에 아시엘이 간단하게 소개하자, 루이카엔이라는 남자는 의기양양해하며 팔짱을 끼고 일부러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그를 무시무시한 힘으로 확 밀어버린 제르닌은 끄아악! 하고 괴성을 지르는 루이카엔을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저 푼수는 루이카엔. 나는 제르닌이라고 한다. 갑자기 끼어들어서 미안하군."

"아, 아니에요. 오히려 저희가 감사 인사를 드려야죠."

그렇게 말하며 아시엘은 새삼 그들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먼저 저쪽에서 서러워하고있는 루이카엔. 약간 탄 듯한 피부에 살짝 올라간 눈꼬리의 회색 눈동자. 거기다 부드럽고 밝은 톤의 갈색머리. 첫 인상대로 상당한 미남었다.

제르닌은 전형적인 조각미남에 속했다. 하얀 피부에 오똑 선 코, 남자다운 얼굴과 몸. 차가워보이는 푸른 눈동자와 뒤로 묶은 블루블랙의 머리카락도 인상적이었다. 그런 생각을 숨기고, 아시엘은 생글 예의 바르게 미소지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아시엘이라고 해요. 이쪽은 렌 씨랑 제 친구 카이스에요."

"하하핫! 그 정도 쯤이야 아무것도 아닙니다,아가씨."

루이카엔이 다시 자세를 잡고 호탕하게 웃었다. 아가씨라니? 아시엘은 의아함 고개를 갸웃해보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이카엔은  아시엘의 손을 덥썩 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엥?"

"아가씨한테 밤거리는 너무 험해. 차라리 저희랑 같이 다니시지 않을래요? 저 친구들도 함께해도 되는데."

거의 루이카엔에게 안기다시피 된 아시엘은 겨우 상황을 파악하고 헐. 하는 표정을 지었다. 뒤쪽에서는 필사적으로 카이스가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고 렌 역시 안쓰럽다는 얼굴이었다.

"응? 레이디. 어때?"

"....저기, 지금 혹시 작업 거는 거에요?"

묘하게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지만 루이카엔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넉살좋게 대답했다.

"작업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아름다우신 레이디의 미모라면 경쟁자가 너무 많을 테니까요."

아시엘은 식었던 열이 다시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지끈지끈 아파오는 머리를 한 손으로 짚은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 조용히 루이카엔을 불렀다.

"저기, 루이카엔씨?"

"예?"

루이카엔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아시엘은 욕지기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눌러담고 억지마소를 얼굴에 담았다. 그리고는 알려주었다. 아마도, 그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잔인한 진실을.

"전 남자에요"

".....아."

일행들 사이에 침묵이 흐르고, 잠시 멍청하니 있던 루이카엔은 아직도 자신이 아시엘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재빨리 손을 놓았다.

"아, 지, 진짜 남자?"

그러면서도 그는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되묻는 것은 잊지 않았다. 눈치를 보아하니 제르닌 역시 표정을 숨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제야 그들은 아시엘을 눈으로 자세하게 훑었다.

하얀 피부에, 작은 머리에 큰 눈, 가느다란 몸매. 소녀로 착각할 만 한 모습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소 굵은  뼈라거나 변성기 전의 소년 특유의 미성이, 여자라고 하기에는 미묘했다. 아시엘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화사하게 미소지으며 자신의 옷깃을 잡았다.

"네. 의심스럽다면 벗어볼까요?"

"아니아니아니!"

기겁하며 두 손을 필사적으로 내젓는 그를 잠시 바라보던 아시엘은 흥, 하고 뒤로 물러섰다. 루이카엔은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 헷갈리게 생겨서 착각했네. 사과의 의미로 한 잔 살테니까."

"술은 안 마셔요."

"아..그래?"

아시엘이 딱 잘라 거절했지만 루이카엔은 베시시 웃기만 했다. 악의라고는 눈꼽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순진한 미소에 아시엘도 기분이 조금 나아져  퉁명스러운 표정을 풀었다. 그 때 가만히 분위기를 살피던 렌이 살짝 손을 들며 그들의 주의를 자신에게 돌렸다.

"저기, 그러면 함께 무기상에 가는건 어때요?"

".... 무기상?"

지금 상황에 꺼내기에는 상당히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그에게 의아한 시선을 모았다. 특히 아시엘은 아까부터 묘하게 렌의 주변을 감돌던 위화감이 다시 고개를 드는 느낌에,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 물론 저희는 무기상에 가야 하지만. 그걸 어떻게 알셨어요? 아까도 여관에서도 설명을 듣기도 전에 바로 2인실 열쇠를 주셨던 것도 그렇고요."

"아."

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것 처럼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특유의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전 미래를 볼 수 있어요. 골목길 사람들에게 예언자 렌이라고도 불리죠."

"..... 예언자, 요? 아."

아시엘은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어느 여관의 예언자. 능력이 뛰어나지만 웬만하선 점을 봐주지 않는 것으로 꽤 유명하다- 라고 아카데미의 친구가 조잘거렸던 기억이 났다. 루이카엔이 감탄하는 얼굴로 끼어들었다.

"굉장하네. 그럼 시비가 붙고 우리랑 저 꼬마가 끼어들 줄 알았다는 거야?"

"음.... 그것까지는 잘. 보인다라고 하지만 사실은 예지에 가까운 거거든요. 예를 들면 오늘도 대충 트러블에 휘말리고, 누군가에 의해 위기를 모면할 거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그게 아시엘 씨일 줄은 몰랐어요."

그는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하고 아시엘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렇게 인연이 생길 걸 보니 아무래도 그냥 스쳐지나가는 사람만은 아닌것 같네요. 아시엘."

"네?"

어느새 존칭도 빠져 있었지만 갑작스레 이름이 불린 아시엘은 눈치채지 못하고 멍하게 대답했다. 렌은 기분 좋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리는, 또 만날 일이 있을 거에요. 멀지 않은 미래에도, 먼 훗날에도. 그러니까 질문은 이만 넣어 두도록 해요."

".....! 아. 네."

속마음을 들킨듯 아시엘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사실 그의 말대로 묻고 싶은 것들이 목까지 차오르는 것을 꾹꾹 눌러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렌은 싱긋  웃고 루이카엔과 제르닌, 카이스를 둘러보았다.

"여러분도 감사드려요. 사실 말씀드리고 싶은게 있지만 인생사라는건 반전이 있어야 재미있는 법이겠죠?"

"반전?"

제르닌이 조용히 되물었지만 그는 읽기 힘든 미소를 띄우기만 할 뿐 더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아시엘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준 그는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기억해요. 저희는 절대 스쳐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 그의 얼굴은 확신에 가득 차 있어서,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렌은 다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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