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7.야시장에서(3)
카이스는 눈 앞에 놓여있는 붉은 물방울모양 귀걸이를 집어들었다. 은근하게 금색 광택이 나는 장식이 수수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금가루를 뿌린 듯 군데군데가 반짝이고 있어 그는 더욱 마음이 동했다.때마침 상점 주인이 손을 비비며 다가오자 카이스는 재빨리 그를 불러세웠다.
"이 귀걸이는 얼마입니까?"
"그거? 4골드 5실버라오. 애인한테 선물하게?"
"애인은 아닙니다만... 조금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아시엘이 들었으면 난리쳤겠군. 카이스가 어색하게 끝을 흐리며 말하자 상인은 그에게 의아한 시선을 보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슈."
카이스는 머릿속을 이리저리 굴리며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귀걸이 치고는 조금 비싸지만 그만큼의 가치가 있어 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잘 어울릴 듯 했다. 하지만 안그래도 여자로 오인받기 쉬운 얼굴인데 더 여자같이 보이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덕분에 그는 쉬이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그때 다시 상인이 입을 열었다.
"그거, 사실은 마법 아이템이라오. 4서클의 통신 마법이 새겨져 있지. 마탑에서 생산된 물건인데 어느 마법사가 우리에게 팔았소.
"아. 그렇습니까?"
카이스는 조금 더 고민하다가 결국 품에서 돈을 꺼내들었다. 상인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죄송합니다, 잠시만 지나갈게요."
아시엘은 사람들을 헤치고 간신히 앞으로 나아갔다. 간간히 뭐야, 하는 거친 말이 들려오기도 했지만 그는 꿋꿋이 사과하며 인파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간신히 가운데에 도달했을때 역시 대충 예상했던 인물과 조우하게 되었다.
"렌 씨."
"아...!"
그 한가운데에서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청년, 렌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알아차린 듯 창백해진 얼굴로 그쪽으로 돌아보았다. 아시엘이 조금 급하게 그에게 다가서려는 그때, 그 앞에 서 있던 남자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임마! 어디서 한눈을 파는 거야!"
".....!"
렌에게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 맞은편의 남자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아시엘은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술에 거나하게 취해 얼굴이 벌개진 남자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검 몇 자루를 허리춤에 차고 한쪽 손에는 큰 술병이 들려 있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금방이라도 하얀 김을 뿜어낼듯 했고 민소매 아래로 훤히 드러난 팔에는 갖은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3류 용병쯤 되나. 잠시 그 남자에게 시선을 준 아시엘은 신경을 끄고 다시 렌에게 다가가 일으켜세워줬다.
"괜찮아요, 렌 씨?"
"아... 감사합니다,아시엘 씨."
아시엘이 후드를 벗어보이자 렌의 창백해진 얼굴에 살짝 안도감의 미소가 피어났다. 그 모습에 분통이 터진 듯, 뚱뚱한 주정뱅이 남자가 분노에 찬 고함소리를 뱉어냈다.
"콩알만한 게 날 씹었냐? 내가 누군지 알아? 이 빌어먹을 꼬맹이!"
허세를 부리려는 듯 커다란 주먹을 붕붕 휘둘러대는 그 남자가 무서운지 렌은 살짝 몸을 떨었다. 하지만 기죽지 않고 오히려 두 걸음 그 남자에게 다가간 아시엘은 당당하게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고는 그 남자를 도발적으로 올려다보았다.
"아저씨가 누군데요?"
"이것 봐라? 내가 그 이글 용병단의 부단장이라고! 꼬마라고 봐줄 줄 아나본데 착각하지 마. 끼어든 이상 네놈도 작살을 내 주마!"
팔을 걷어붙인 그 남자는 아시엘의 코앞에서 삿대질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소년의 고운 미간에 살짝 주름이 졌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썼다.
"저 새끼가 나 멀쩡히 지나가는데 갖다가 처박았단 말이다. 내 갈비뼈가 부서졌다고! 그런데 치료비를 안 준다고?"
"저기요, 아저씨. 제가 볼 때 아저씨 갈비뼈보다 렌씨 갈비뼈가 더 걱정되는데요?"
아시엘이 노골적으로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대꾸하자 남자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며 콧김을 내뿜었다. 곧 애새끼가 뭘 아느니, 어른들 얘기하는 데 애는 끼면 안 되느니, 죽어봐야 정신을 차린다느니 하며 왼손에 들린 술병을 휘둘러대며 소리쳤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아시엘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경험 상 이런 놈들은 술김에 앞뒤 안 가리고 주먹을 휘두르는 경우가 많다. 렌이 당하고 있어 일단 자신도 모르게 끼어들고 말았지만 그는 그런 상황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렌의 손을 붙잡고 도망쳐버릴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점점 모여드는 구경꾼 탓에 그것도 쉽지 않을 듯 했다. 앞뒤 생각하지 말고 그냥 때려 눕힐까. 나름 빠른 속도로 머리를 굴리고 있는 찰나, 갑자기 뒤쪽에서 서있던 렌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시엘 씨!"
앗차,하고 아시엘이 퍼뜩 고개를 들려고 했을때, 콸콸콸콸. 머리 위로 차가운 액체가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
웅성이던 구경꾼들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침묵에 휩싸였다. 금세 머리칼을 축축하게 적신 술은 금발을 타고 내려가 얼굴 피부 위를 흘렀고 곧 어깨까지 축축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소년의 머리에 털어낸 그는 술병을 거꾸로 든 채 속이 시원하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비식이 올려보였다.
"헹. 꼴 좋다."
아시엘이 미동도 안 하자 겁먹었다고 생각하는지 남자는 술 맛이 어떠냐? 꼬맹아, 라고 당당하게 외치며 낄낄거렸다. 온 몸에서 타고 올라오는 알코올 냄새에 아시엘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뚝, 뚝. 흠뻑 젖은 머리에서 떨어진 방울이 바닥과 충돌해 원을 그려냈다.
구경꾼들은 여전히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듯 침묵에 휩싸여 있었고 렌이 다급하게 다가와 이게 무슨 짓입니까!라며 항의했지만 이미 열이 머리 끝까지 올라버린 아시엘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진짜 갈비뼈 부러트려주자.어차피 내일이면 기억도 못 할 텐데. 그렇게 결심한 그가 가볍게 주먹을 말아쥔 바로 그 때였다.
"이봐-제르닌.여기 왠 주정뱅이가 아가씨를 괴롭히고 있네?"
구경꾼들 사이에서 마치 일부러 들으라는듯 큰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