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
“이한아, 이제 괜찮니? 엄마 알아보겠어?”
어머니가 정이한의 뺨을 매만졌다. 그제야 정이한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졌다. 나도 덩달아 정신이 확 돌아왔다. 너무 넋 놓고 보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해서 괜히 사람들의 눈치가 보였다. 다행히 별로 신경 쓰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
정이한의 눈매가 곱게 접혔다. 끄덕거리는 정이한의 뺨과 머리를 쓰다듬는 어머니의 손길에 애정이 뚝뚝 묻어났다. 나를 향한 애정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내가 다 간지럽고 기분이 좋았다. 싱글벙글하며 두 사람을 눈에 담고 있을 때 이서호가 툭 손을 내밀었다.
“형, 일단 물 좀 마셔. 미지근한 물이야. 그 인공호흡기 때문에 목 아프지? 우리 할아버지도 그랬었거든.”
……아. 이런 것도 안 챙기고 뭐 했냐, 나.
그저 정이한이 눈 뜬 게 좋아서 어벙하게 헤실거리고만 있었네.
“어머, 내 정신 좀 봐. 고마워, 서호야.”
어머니가 버튼을 눌러 침대 머리 부분을 올린 뒤 정이한의 입술에 물컵을 대어줬다. 몇 모금 받아 마신 정이한의 눈이 또 내게 꽂혀 들었다.
그, 너무 빤히 보는 거 아닌가…….
그런 정이한을 빤히 보던 어머니는 컵을 회수한 뒤 미소 띤 얼굴로 일어났다. 그러더니 갑자기 사람들을 한데 모으셨다.
“자자, 저희는 잠깐 자리를 비켜주죠.”
정곤 형이 왜 그러시냐고 의아해했지만, 어머니는 웃으며 “애들끼리 할 말이 많지 않겠어요?”하고 말씀하셨다.
어……. 서, 설마 뭔가 눈치채신 건 아니겠지?
너무 멍청하게 굴었나? 역시 내 행동에서 티가 난 거야! 어떡하지…….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고 싶어졌다. 울상을 지으며 정이한을 봤다. 정이한은 이상하게 계속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이한이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홀린 것처럼 스르륵 다가갔다. 정이한은 팔을 드는 게 힘에 부친 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이제 막 마취에서 깨어났으니 힘이 들어가지 않을 만도 하지. 나는 그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
그러자 정이한이 조금 의아한 듯한 얼굴로 우리가 맞잡은 손을 내려봤다. 그러고는 뭔가를 확인하듯 내 손을 더듬다가 갑자기 고개를 휙 들었다. 곧, 다른 손이 내게로 뻗어 왔다. 뺨을 만지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얼굴을 숙여줬다.
따스한 체온이 뺨을 톡, 건드렸다. 나비가 앉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리고는 이내 손가락 전체가 내 뺨에 얽혀 들어왔다.
“……화, 환영이, 아니야?”
허, 나를 빤히 본 게 환영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건가.
“형 어머니가 우리끼리 대화 하라고 자리 만들어 주셨잖아요. 그런데도 몰랐어요?”
나는 정이한을 진정시키려고 조금 가벼운 어투로 장난스레 말했다. 정이한은 나만 보느라 아무 말도 안 들렸다고 떠듬거렸다. 급기야 맑은 눈에서 눈물이 또륵또륵 흘러내렸다. 나는 정이한의 축축한 뺨을 쓰다듬었다.
“……누, 눈을 뜨면, 네가, 네가 없을, 줄, 알았어, 펴, 평생, 나만, 나, 혼자, 널, 그리워할, 줄 알았는데, 하온, 하온아, 하온아…….”
정이한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하염없이 내 이름을 불렀다. 우리가 마지막인 줄 알고 헤어지던 그 순간처럼, 계속…….
나는 조심스럽게 정이한을 품에 안았다. 내 가슴에 정이한의 뺨을 묻고 남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 심장 소리 들려요?”
“……응. 으응. 들려…….”
“저 살아 있어요.”
정이한이 오열했다. 슬프고 애절한 울음이 아니었다. 기쁨에, 벅차올라서 흘리는 눈물이 내 마음을 적셨다. 나는 정이한의 작은 머리를 끌어안고 정수리에 입술을 묻었다.
그 순간 갑자기 정이한이 퍼드득거렸다. 나를 확 밀치더니 제 머리를 더듬거렸다. 왜 저러지? 예상하지 못한 행동에 갸웃거렸다.
“나, 나 사고 난 뒤로 못 씻었을 거 아냐……. 냄새나…….”
“네?”
아니, 지금 그게 신경 쓰여?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걸 보니 다 나았네. 다 나았어.
“냄새 안 나요.”
“거짓말…….”
“정말이에요. 냄새 하나도 안 나요.”
나는 도망치는 정이한을 붙잡아 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나를 밀치고 싶어하는 것 같았지만 팔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평소에는 나보다 힘이 센데 지금은 내가 더 센 것 같네. 아직 다 낫지 않은 사람 붙잡고 너무 놀렸나 싶어서 슬그머니 떨어졌다.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하죠?”
“당연하지.”
나는 그곳에서 정이한을 보낸 뒤 데우스와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해줬다.
“동화 같은 결말……. 정말 좋네.”
“그렇죠? 그가 제 신이에요.”
왠지 뿌듯해서 자랑스레 말했더니 정이한은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왜 그래요?”
“나보다 더 좋아?”
“……네?”
“내가 더 좋지?”
“아니, 아니, 무슨. 그런…….”
데우스는 애초에 사람이 아니라 논외인데 그걸 비교하다니. 형들이랑 매니저 형 빼고는 다 막을 거라고 한 것도 그렇고. 의외로 질투 심한 거 아니야? 눈을 게슴츠레 뜨고 보고 있었더니 금방 시무룩해진 정이한이 “……아니야?”하고 물었다.
아……. 나 진짜 앞으로 엄청 휘둘릴 것 같아. 이렇게 여우 같은 남자를 얻었으니 어쩔 수 없나.
“당연히 형이 더 좋죠.”
“사랑해, 하온아.”
“……저, 저도 그렇거든요? 저도…….”
부끄러운 말을 하려니 얼굴에 열이 확 몰렸다. 정이한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저도 형 사랑해요…….”
남이 기껏 민망한 말을 뱉었는데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슬쩍 눈을 떠 보니 정이한이 웃고 있었다. 오랫동안 흐릿했던 하늘을 가르고 들어오는 햇살처럼, 기쁨으로 만개한 미소를 보니 민망했던 마음이 쏙 들어갔다. 그 대신 들어찬 건 믿을 수 없을 만큼 차오르는 충만함이었다.
이게 행복이구나. 이제부터 이런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당황한 내가 허둥거리며 눈물을 쓸어냈다.
“미, 미안해요. 왜 갑자기…….”
“기쁜 거지?”
나는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이한의 눈꼬리에도 아침 이슬 같은 눈물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울면서 웃었다. 누가 보면 웃긴다고 비웃을 것 같았는데 눈물도, 웃음도 참을 수가 없었다.
행복해도 눈물이 나온다더니 정말이었다.
데우스를 만나 게임에 참가하길 잘했다. 그 덕에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아름다운 감정을 알게 됐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
이게 기적이 아니면 뭐겠어.
***
정이한은 그로부터 딱 한 달 만에 퇴원했다. 퇴원 준비를 돕기 위해 어머니 옆에서 알짱거리고 있을 때 의사가 들어왔다. 완전히 멀쩡해진 정이한을 보고 그는 뿌듯하게 웃었다.
“이야, 정말 이렇게 빨리 회복되다니 놀랍네요. 꼭 신이 기적을 일으킨 것 같습니다.”
……기, 기적은 맞지. 나는 괜히 뜨끔해져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 순간 정이한과 눈이 딱 마주쳤다. 웃으면 안 되는데 웃음이 터져 버렸다. 우리가 동시에 웃자 의사가 “제, 제가 뭐 이상한 말 했나요?”하고 물었다.
“아니, 아니요. 그냥……. 퇴원하니까 좋아서요.”
“아아. 그렇죠. 다음에 또 만날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의사는 그렇게 말하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퇴원 수속을 마치고 온 정곤 형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숙소로 돌아가자!”
정곤 형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정이한의 짐을 한 손으로 번쩍 들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우리는 다 함께 숙소를 향했다.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창밖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러자 정이한이 “무서워?”하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데우스가 100년 뒤에 보자고 했는걸.
“형은요? 괜찮아요?”
“하온이가 옆에 있으면 괜찮아.”
“어쩔 수 없네요. 평생 옆에 있어 줘야지.”
“그럼 좋지.”
우리는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속닥거렸다. 정곤 형이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원래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마약’이라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감자알처럼 줄줄이 엮여 들어간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텐스타도 언급됐는데 그중에 준 선배님은 없었다. 다행이네.
숙소에 도착하자 멤버들이 폭죽을 터트리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정이한의 퇴원 기념 파티 준비도 다 끝나 있었다. 휴대폰 카메라를 든 이서호가 “이한 형! 집에 온 걸 환영해!” 하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W라이브 방송이었다. 좋은 소식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디어리를 위한 방송. 그리고 미안하게도 3월 컴백이 취소되었다는 것도 알려야만 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정이한 때문에 컴백 준비는 무리였으니까.
우리가 우르르 거실로 옮겨간 뒤에야 정곤 형이 어머니를 모시고 들어왔다. 나는 어머니가 우리를 흐뭇하게 보시는 걸 힐끔, 확인한 뒤 거실 소파에 앉았다.
채팅창은 온통 눈물바다였다. 보고 싶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너무 무서웠다. 그런 말들이 주를 이었다. 컴백 취소에 대해 전했을 때 디어리는 오히려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아니었으면 쓰알에 불 질러 버렸을 거라는 과격한 내용을 보고 내가 토끼 눈을 떴다.
완전히 평소와 똑같았다. 생기 있는 멤버들, 내 곁의 정이한, 그리고 디어리. 모든 게 평소대로 돌아왔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나는 앞으로도 영원히 멤버들과 함께 미래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내가 상상해 본 적 없는 아득히 먼 미래에도 나는 지금 내 곁의 사람들과 함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섰다.
그리고 그때에도 나와 정이한은 사랑을 하겠지. 나는 카메라를 피해 슬쩍 정이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곤 단단히 맞잡아 오는 손길을 느끼며 헤실거렸다.
어느새 라방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내 차례가 왔다.
“디어리, 항상 지켜봐 주고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우리 다음에 또 만나요!”
[라이브 방송이 종료되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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