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318화 (318/320)

318.

내내 밝을 것 같았던 하늘에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어두워지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갑자기. 나는 이게 데우스가 보내는 신호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제 적당히 하고 끝내라는 거겠지. 역시 엿보고 있었던 게 분명해.

“이한 형.”

“싫어. 아직 안 돼.”

정이한도 끝을 느낀 건지 날 꼼짝달싹 못하게 가두고는 도리질 쳤다. 나는 정이한을 달래듯 등을 토닥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시간 됐어요.”

“5분만 더. 5분도 안 돼?”

“……안 되진 않을 것 같은데.”

“그럼 그렇게 하자.”

정이한의 목소리가 다시 습해졌다. 진짜 울보네. 혼자 깨어나서 펑펑 울어버릴 정이한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잊을 수 있을 거야. 디아스도 괜찮을 거야. 나는 여기서 끝이지만, 형들과 정이한이 우리의 이야기를 더 먼 미래까지 데려가 주겠지.

“이제 타임 오버야.”

딱, 하는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데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데우스를 보자마자 정이한이 울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울면 떼어 놓기 힘든데…….

데우스, 정이한을 돌려보내 줘요. 지금 당장.

내 머릿속을 읽을 수 있으니 이렇게라도 보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보내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정이한의 몸이 점차 희미해졌다. 나를 옭아매던 팔이 구속력을 잃었다. 따듯했던 온기가 사라지며 서늘한 공기가 내게 직접적으로 와닿았다.

눈물 젖은 얼굴이 뻐끔거렸다.

‘하온아.’

정이한은 계속 내 이름만 불렀다. 눈을 깜박이는 시간도 아까워서 나는 눈에 힘을 주고 정이한이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 그의 흔적이 전부 사라진 뒤에야 눈을 감았다.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은 오랫동안 눈을 뜨고 있기 때문이라고 치부하며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나는 게임을 중도 포기한 게 되는 건가. 그러면 내 영혼은 소멸되는 거고, 유연이도…….

유연이를 생각하면 죄책감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하지만 정이한이 소중해서 나는 그를 선택 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기회야. 소원을 취소할 생각은 없어?”

바꾸는 건 안 돼도 취소는 되는 거였나. 나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없어요.”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시스템: ‘신들의 게임’이 종료되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내 상태창이 사라졌다. 체력바도 사라지고, 상태창을 불러봐도 묵묵부답이었다. 이렇게 끝인 건가…….

“……저는 중도 탈락이에요?”

내 질문에 데우스의 입술이 양쪽으로 크게 찢어졌다. 아주 후련하고 호쾌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아니! 이겼어.”

“저는 포기했잖아요?”

“참가자 중에 가장 큰 행복과 만족을 느꼈고, 마지막엔 포기가 아닌 희생을 했지. 네가 1등이야.”

나를 기특해하는 듯한 데우스를 보니 기분이 묘했다. 꼭 부모라도 된 것처럼 군단 말이야. 그래도 탈락이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유연이는 구원받을 수 있겠네.

“그보다 시스템 불량이었어요.”

“응? 왜? 어디가?”

“서브 미션도 안 주고 그러던데요? 완전히 방치당하는 기분이었다고요.”

데우스가 낄낄거렸다.

“처음에 얘기했잖아. 시스템은 어디까지나 널 도와줄 ‘가이드’라고. 가이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보는 거잖아? 시스템의 판단하에 지름길이 있거나, 도와줘야 할 때가 아니라면 간섭하지 않아. 결국 나중에는 알아서 잘했다는 소리지.”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여간 말은 잘해. 데우스는 내 생각을 읽어내고는 말을 잘하는 게 아니라 그게 사실이라며 반박했다.

“됐어요. 이제 전 어떻게 되는 건데요?”

데우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끙끙거리더니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을 보니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것 같았다.

“돌림판 돌릴래?”

“……또 돌림판이에요?”

진짜 돌림판 좋아하는 신이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됐어요. 뭘 더 하자고.”

“그러지 말고, 한 번 해봐. 1등 했으니 보상은 받아야지.”

보상이라. 솔직히 관심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었으니까. 데우스가 그런 내 손을 잡아끌었다. 손가락에 얇은 나무판의 감촉이 느껴졌다.

“자자, 돌려봐. 빨리, 빨리.”

돌릴 때까지 조를 것 같은 기세라서 나는 돌림판에 쓰여 있는 글자도 보지 않고, 무성의하게 손을 움직였다. 드르르륵, 나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오! 당첨! 완전 좋은 게 당첨됐는데? 안 궁금해? 안 볼 거야?”

데우스가 히죽거리며 나를 약 올렸다. 저렇게 호들갑 떠는 게 도대체 뭔지 봐주기나 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금도끼 은도끼]

내가 뽑은 돌림판에 쓰여 있는 글자였다. 하지만 더 황당한 건 모든 돌림판에 전부 ‘금도끼 은도끼’라고 적혀 있었다는 거였다.

뭘 뽑든 같은 결과였다.

“……이게 뭔데요?”

“금도끼 은도끼 동화 몰라?”

대충 알지. 솔직한 나무꾼한테 산신령이 금도끼와 은도끼를 모두 줬다는 거잖아.

……모두 줬다고?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설마, 설마 내가 생각하는 거 맞아?

“가끔은 동화 같은 결말도 좋지 않아?”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너무 흥분해서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잠깐 침착하자. 침착해. 아닐 수도 있잖아. 일단 확인부터…….

“그럼 절 돌려보내 줄 수 있다는 거예요?”

“1등 보상이니까 어쩔 수 없네?”

“그, 그렇지만 제 목숨은 정이한한테 줬잖아요.”

데우스는 허리에 팔을 척 올리고 턱을 치켜들었다.

“그렇지. 하지만 넌 계약자잖아. 끊어진 네 삶을 잇는 건 내 마음이지. 1등 보상으로 그 정도는 가능하거든.”

나는 데우스에게 달려들어 끌어안았다. 데우스는 정말 신이었다. 내 지옥 같은 삶의 끝에 만난, 나의 신.

“아니, 내가 신인 거 이제 알았냐고.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건만.”

데우스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그러면서도 처음 그와 헤어질 때 나를 안았던 것처럼 포근하게 감싸줬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면 되잖아요…….”

“엉? 네가 자리 비켜달라며!”

그, 그러긴 했는데. 나는 그게 마지막인 줄 알고……. 아, 이렇게 돌아가서 정이한 만나면 되게 머쓱할 것 같은데…….

“뭐야. 마음에 안 들어? 그럼 다른…….”

“아뇨! 아뇨아뇨! 엄청 마음에 들어요. 다른 건 절대 싫어요. 이걸로, 저 금도끼 은도끼 해주세요.”

“으하하. 오냐.”

호탕하게 웃는 데우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데우스의 뒤에서 동글동글하고 순박한 얼굴이 고개를 쏙 내밀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 사람들과 너무도 닮아 있었으니까.

“……유연이?”

“헤헤.”

쑥스러워하며 웃는 유연이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이 녀석이 너한테 할 말이 있다더라고.”

데우스가 유연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내 앞에 세웠다. 유연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줄 수 있었다. 유연이는 머뭇거리다가 내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고마워요, 형.”

“……어? 뭐가?”

“형이 절 위해 기도해준 거, 저한테 닿았어요. 제 죽음을 슬퍼하고 아픔에 공감해주셨잖아요. 그때 처음으로 저는 혼자가 아니게 됐어요.”

처음 유연의 죽음을 엿보았을 때 그를 위해 애도했었다. 그 말이 전해졌을 줄이야. 조금 쑥스러워져서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게, 위로가 됐어?”

“엄청요. 그리고, 음.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조심스럽게 건네는 말에 나는 얼른 끄덕였다. 유연의 부탁이라면 당연히 들어줘야지.

“응. 뭐든지 다 들어줄게.”

“제 가족들……. 부탁해도 돼요?”

“……뭐?”

예상하지 못한 말이라서 나도 모르게 멈칫거리고 말았다. 유연은 코끝을 긁적이며 웃었다.

“부모님의 진심을 알았어요. 저를 사랑하고 싶었고, 사랑하려고 노력했다는 걸.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요. 제 영혼이 끝에 도달했으니 거스를 수 없었겠죠.”

유연은 마치 성자 같았다. 나는 아직도 내 가족을 용서하지 못했는데…….

“좋은 분들이거든요. 좋은 아들이 되고 싶었는데 저는 못 했으니까. 아, 물론 형만 괜찮다면요. 절대 억지로 부탁하는 거 아니에요. 형의 마음이 우선이죠.”

유연이 가슴 앞에서 손을 휘적거렸다.

“으잉? 그랬어? 그럼 그 집 넷째로 태어날래?”

“네?”

데우스가 끼어들자 유연이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차피 네 영혼은 다시 윤회의 고리에 들어갈 거니 그 정도야 쉽지.”

“어……. 그럼 그렇게 할래요! 부탁할게요!”

“오냐. 대신 기억은 없을 거야.”

“괜찮아요!”

유연이 해맑게 웃었다. 그럼……. 우리 집 막내가 유연이야? 허, 부모님이랑 화해해야겠다. 유연이 보러 가야 할 거 아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내심 뿌듯하게 웃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다 해줘요?”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지 않나? 물론 나야 아주 좋지만, 또 너무 퍼주니까 의심이 솟았다. 이유 없는 호의는 언제나 수상한 거니까.

“하여간 의심 많은 녀석. 몇만 년 만에 1등 한 거라 기분 좋아서 그렇다. 됐냐?”

“그, 그런 거라면…….”

그럼 혹시 이것도 알려주려나. 데우스의 기분이 좋다니 나는 슬쩍 교주에 관해서도 물었다. 데우스는 아주 뿌리를 뽑으려고 든다며 눈을 흘겼으나 “우리 쪽 주최가 아니라 확실하게 말해줄 순 없어. 그냥 생각한 대로 해.”라고 대답해줬다.

그러니까 내가 교주에게 조언했던 게 맞다는 거네. 참회의 방식으로 선행을 쌓아야 한다는 거. 데우스는 대답 대신 눈을 접고 조용히 웃어줬다.

“내킨 김에 전부 대답해줄게. 물어봐.”

데우스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꼭 덤비라는 것 같아서 어이없었다. 우리가 싸우는 것도 아닌데.

“뭐야? 궁금한 거 없어?”

“……있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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