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
내게 주어진 5분은, 짧아도 너무 짧았다. 미련이 뚝뚝 넘치는 발걸음으로 겨우 중환자실을 벗어났다.
삐-삐-삐-.
일정한 소리를 내며 울리는 기계음만이 정이한이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중환자실 앞을 떠나지 못하는 내 귀에 그 소리가 끊임없이 반복 재생됐다.
누군가 내게 병실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익숙한 목소리였으나 머릿속에 맴도는 신호음 때문에 그게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고개를 젓기를 몇 번 반복하자 더 이상 내게 돌아가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중환자실의 문이 열렸다. 조금 전 봤던 그 의사였다.
“다행히 고비는 넘겼습니다. 수치가 조금씩 안정되어 이제는 통상 범위 내에 들어왔어요. 언제 또 급변할지 모르지만, 지금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어머니가 의사의 손을 꼭 붙잡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의사는 어머니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여 준 뒤 나를 봤다. 나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깊숙하게 허리를 숙였다.
중환자실 문이 다시 닫히자 정이한의 어머니께서 내게 왔다. 그리고는 내 손을 꼭 잡고 의사에게 했던 것처럼 고맙다고 연신 인사했다.
“……저, 때문인데…….”
“아니야. 네가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어. 이한이는 제게 소중한 걸 지킬 줄 아는 아이거든.”
그러면서 나를 꼭 안아 주셨다. 덩치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무엇 하나도 같은 게 없는데 그 품은 정이한이 주던 온기와 무척 닮아 있었다. 그리움이 터져 넘칠 것만 같았다.
“형이, 보고 싶어요…….”
“나도 그래. 나도 우리 아들이 보고 싶어. 나중에 같이 손잡고, 이한이 얼굴 보러 가자.”
“네, 네에…….”
“늦게 일어났다고 화도 내고…….”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울었다. 그런 우리를 위로하려는 듯 멤버들과 매니저 형들이 우리를 안아줬다. 나는 내 소중한 사람들의 온기를 느끼며, 정이한이 일어나길 바라고 또 바랐다.
신에게 소원을 빌어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면, 몇백 번이고 빌 수 있었다. 내 삶을 송두리째 바쳐야 한다면 그럴 수도 있었다. 정이한을 살려만 준다면, 그가 무사히 일어날 수 있게만 해준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넘기고 싶었다.
……잠깐. 신에게 소원을…… 빈다고?
나, 할 수 있잖아. 분명히 있었다. 환생한 직후 스킬을 살필 때 한 번 보고 기억 저편으로 치워버렸던 스킬. 나는 얼른 내 스킬창을 불렀다. 그리고 눈으로 주르륵 읽어 내려간 끝에 내가 원하는 스킬을 찾을 수 있었다.
데우스의 축복: 인생에서 단 한 번, 데우스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가장 간절한 소원 한 가지를 이루어줍니다.
가장 간절한 소원.
정이한을 살릴 수 있어.
시스템! 데우스의 축복을 사용하겠어. 데우스를 소환해 줘!
[시스템: 스킬 ‘데우스의 축복’을 사용합니다.]
조마조마했다. 정말 데우스가 와줄까? 정이한을 살려줄 수 있을까? 간절함에 숨이 막혔다.
[시스템: 어~ 불렀냐? 지금은 네가 이쪽으로 좀 와야겠다. 소환할게.]
……뭐?
시스템 메시지를 보고 무언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의식이 흐려졌다.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도중에 뚝 끊겼다.
***
……여기가 어디야?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풍경이 보였다. 우거진 숲, 바람도 불지 않는데 살랑거리는 들판, 색색의 꽃이 만개한 꽃밭, 하늘을 거울처럼 비치는 호수가 각각 네 구역으로 나뉘어 끝없이 펼쳐졌다. 그리고 나는 그 네 공간을 잇는 중앙에 혼자 서 있었다. 데우스가 나를 소환한다고 했으니 의식만 이쪽으로 넘어온 것 같았다.
비현실적인 풍경 때문인지 이곳이 현실과 저승의 경계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묘하지만 아름다운 이 공간이 섬뜩하기만 했다.
“너무하네. 신경 써서 꾸며놨더니.”
머리 위에서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데우스가 새하얀 슈트의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삐딱한 자세로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정이한을……읍!”
데우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입술이 달라붙은 것처럼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어차피 머릿속을 읽을 수 있으면서 굳이 막는 이유가 뭐야?
설마 소원 들어주겠다는 거 공수표였나? 그게 아니라면 내 입을 막을 필요가 없잖아. 그럼 정이한은 어떻게 되는 건데? 겨우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
“잠깐!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소원은 들어줄 거거든? 일단 기다려 봐. 모처럼 만났는데 뭐가 그렇게 급해?”
나는 의심 어린 눈초리로 데우스를 봤다. 정말이야? 소원 들어줄 거야? 정이한 살려줄 거냐고.
“다른 소원은 없어?”
……왜? 왜 그런 걸 물어? 정이한을 살리는 거 말고 다른 소원은 없어. 가장 간절한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고 했잖아. 나한테 지금 가장 간절한 건, 정이한이었다. 정이한 뿐이었다.
“그대로는 어려운데……. 일단 이야기를 좀 해 보고 결정하는 건 어때?”
데우스가 또 한 번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동시에 나는 모든 사고가 정지한 것처럼 우뚝 멈췄다. 놀란 얼굴로 두리번거리던 사람이 나를 발견했다.
“하온아!”
“……이, 이한, 형?”
정이한은 허둥지둥 내게 다가와 내 몸 여기저기를 툭툭 두들겼다.
“하온아,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 아픈 데는?”
구급차에 실려 가며 달싹이던 입술이 떠올랐다. 그러자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진짜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났나? 왜 이렇게 눈물이 헤퍼졌는지 모르겠다. 내 눈물에 놀란 정이한이 내 뺨을 닦아주며 허둥거렸다.
“……어디 아파?”
나를 걱정하는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뒤늦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이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날 안고는 등을 토닥여줬다. 너무나 간절히 원했던 품이었다. 따듯하고 포근한, 위안이 되는 정이한의 품…….
곧 정이한의 팔에 힘이 들어가더니 숨이 막힐 정도로 꽉 끌어안겨졌다. 나는 정이한을 밀어내는 대신 그의 등에 팔을 둘렀다. 이대로 하나가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 죽은 거지?”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멀쩡하게 살아 있거든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이한이 머쓱하게 웃었다.
“미안. 갑자기 기억났어…….”
“뭐를요? 뭐가 기억났는데요?”
정이한의 팔에서 힘이 풀렸다. 마치 금방이라도 나를 놓을 것 같아 이번엔 내 쪽에서 정이한에게 매달렸다. 절대 떨어질 수 없다는 의지를 담아 꼭 끌어안았다.
“이서호가 크게 울다가 쫓겨나고, 강현이한테 하온이를 슬프게 하면 어떡하냐고 타박도 듣고, 유찬 형이 너 숨겨놨으니 일어나서 보러 가라고도 했고, 어머니가 얼른 일어나고 울었고…….”
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정이한은 말을 멈추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개를 슬쩍 들자 기다렸다는 듯 내 이마에 입술이 내려앉았다.
“하온이가 내가 없어서 힘들고 무섭다고 했던 것도 기억나. 너를 꼭 안아 주고, 달래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는 게 답답했거든.”
……내가 중환자실에서 했던 말이었다. 전부 듣고 있었구나…….
“그런데 지금 이런 이상한 공간에서 널 안고 있으니 나는 죽은 거고, 이건 신이 보여주는 꿈 같은 거 아닐까 싶어서.”
“안 죽었어요. 그렇죠? 데우스.”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하지만 언제 사라졌는지 그 자리에 데우스는 없었다. 도대체 어딜 간 거야?
“데우스? 누굴 찾는 거야?”
정이한이 갸웃거렸다. 나는 데우스를 찾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사람 머리 위에 있는 걸 좋아하니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싶어서였는데, 하늘은 텅 비어 있었다.
“……어디 갔지?”
“누군데? 중요한 사람이야?”
“중요한 사람 맞긴 해요.”
사람은 아니지만, 일단 그렇게 대답했다. 이걸 설명을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여!”
갑자기 정이한의 등 뒤에서 얼굴이 불쑥 솟아올랐다.
“까, 깜짝이야. 좀 평범하게 나오면 안 돼요?”
“그럼 재미없잖아.”
데우스는 한없이 가벼운 걸음으로 정이한의 주위를 빙 돌았다. 정이한은 낯선 사람의 등장에 내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경계해야 하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일단 대답부터 해주자면.”
데우스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마치 스크린이라도 띄워 둔 것처럼 허공에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중환자실이었다. 내가 마지막에 봤던 모습 그대로, 수많은 기계에 묶여 있는 듯한 정이한이 보였다.
“어? 나…….”
정이한은 영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나는 차마 저 모습을 볼 수 없어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때 데우스가 말을 이었다.
“저 청년은 아직 안 죽었어.”
“……아직?”
신경에 거슬리는 단어였다. 인상을 찡그리며 데우스를 봤다. 설마 아니겠지? 어깨를 으쓱인 데우스가 또 한 번 손가락을 튕겼다. 영상이 사라졌다.
“응. 아직.”
아직이라니. 아직이라면…….
나는 생각을 잇고 싶지 않아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소원을 빌면 되는 거잖아. 데우스가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곧 죽어. 이곳에 부를 수 있던 것도 그것 때문이고. 물론 넌 계약자니까 논외.”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던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발치 아래로 뚝 떨어졌다. 세상이 온통 먹칠을 한 것처럼 까맣게 변해갔다. 아름다웠던 풍경이 빛을 잃었다. 나는 내 옆에 찰싹 붙어 있는 정이한의 손을 꽉 잡고 데우스를 쳐다봤다.
“……소원, 들어줄 거죠?”
“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어. 그 말은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시간이 고정돼 있다는 뜻이야. 순리를 비틀 수 있는 건, 게임에 참가한 너처럼 신과 계약한 계약자뿐이야.”
그럼…… 방법이 없단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