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
“울지, 마…….”
정이한이 인상을 찡그렸다. 하라는 대답은 안 하고. 지금 내 눈물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울컥거리는 감정이 계속 몸 안에서부터 눈물을 타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겠다. 내 입에서 히끅거리는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더듬거리며 올라온 차가운 손이 내 뺨을 쓸어내렸다.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 듯, 정이한은 그렇게 하염없이 내 뺨만 계속 문질러댔다.
“약속, 할 테니까 울지 마…….”
“……약속했다. 절대로 정신 잃으면 안 돼.”
정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계속 비집고 나오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이 상황에 울고 있는 내가 어이없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도 모자랄 판에. 나는 눈에 힘을 주며 나갈 수 있는 공간이 있는지 살폈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는지, 바로 옆 창문을 비집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창문은 이미 깨져 있었지만 전부 떨어져 나간 건 아니었다. 나는 먼저 너덜거리는 창을 발로 밀어내 나갈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그다음 좁은 공간에서 몸을 움직여 정이한의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갈고리처럼 팔을 접은 채 체중을 이용해 조금씩 몸을 움직였다. 두들겨 맞은 듯한 통증에 힘이 빠지려고 할 때마다, 정이한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조금씩 끌어내다 보니 어느새 창문이 가까워졌다. 폐가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숨이 모자라 거칠게 헐떡거렸다.
“저기요! 괜찮아요?”
그때 밖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데우스라도 만난 것처럼 가슴이 펄떡였다. 우리를 도와주러 사람들이 모인 게 틀림없었다.
“도, 도와주세요!”
“얼른 나와요!”
“다친, 사람이 있어요. 다친 사람부터……!”
남자는 안을 살펴보고는 “그쪽도 다쳤으니까 일단 나와요! 저 사람도 구해줄 테니까!”하고 외쳤다.
“여기요! 여기 손 좀 빌려주세요!”
남자가 팔을 흔들며 외쳤다. 두 명의 남자들이 더 다가왔다. 내 몸에 묻은 피는 내 것이 아니었지만, 실랑이할 시간에 움직이는 게 정이한을 위한 거겠지. “부탁, 드립니다.”
나는 남자의 도움을 받아 빠져나왔다. 그제야 도로의 풍경이 보였다. 사고에 휘말린 차량이 한, 두 대가 아니었다. 미끄러운 도로 때문에 연쇄추돌이 난 것 같았다. 나는 처참한 광경에서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보다 먼저 구조된 건지 정곤 형이 차에 기댄 채 늘어져 있었다.
“정곤 형!”
나는 허겁지겁 달려가 형의 상태를 살폈다. 이마가 좀 찢어진 것 같은데, 겉으로 보기엔 다른 외상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불안했다.
도저히 혼자서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마음이 꺾이고 무너질 것만 같았다. 나는 차가운 공기를 폐 속 깊이 들이마시며 정신을 다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뒤늦게 체력에 생각이 미쳐서 내 체력바를 확인했다. 이미 바닥으로 떨어져 상태 이상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서둘러 죽어도 고 스킬을 써서 상태를 연명시킨 뒤, 겉옷을 벗어 정곤 형에게 덮어줬다.
그 사이 남자들이 정이한을 정곤 형 옆으로 옮겨줬다. 그리고는 곧 구급차가 올 테니 일행들을 지키고 있으라며 내 어깨를 두들겨 줬다. 어디선가 여기도 도와달라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곧장 그쪽으로 바삐 걸어갔다.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본 건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었다. 남자들은 앞뒤로 찌그러져서 엉망이 된 검은색 세단의 운전자를 구조하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사고를 낸 가해 차량 같았다.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문 뒤 정이한 앞에 쪼그려 앉아 조심스럽게 정이한의 허벅지 위에 손을 얹었다. 푹 꺾인 고개는 그가 정신을 잃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으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러겠다고 약속도 했으면서…….
“거짓말쟁이…….”
눈과 비로 엉망이 된 땅에 내 눈물이 투둑투둑 떨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 바닥. 그제야 질척거리는 땅 위에 두 사람이 앉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분명히 차에 담요가 있었을 텐데. 아니면 여분의 옷이 있을지도 몰랐다. 뭐라도 찾아보려고 일어나려던 때, 내 팔목에 차가운 손가락이 닿았다.
“이한 형!”
나를 보는 정이한의 눈동자에 파란 하늘이 담겨 있었다. 그 순간 벅차오르는 감정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정이한을 끌어안았다. 터져 나온 울음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흐으, 흑…….”
“하, 온아, 괜찮아……?”
나는 정이한에게 매달리다시피 안겨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내 등을 토닥이는 손길은 여느 때와 같이 다정하기만 했다. 괜찮아. 괜찮을 것 같아. 아직 상황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는데도 안도감이 들었다.
“쿨럭쿨럭, 컥.”
“이, 이한 형! 괜찮아요?”
정이한이 몸을 잘게 떨며 기침했다. 그의 입술이 유달리 붉게 물들었다.
“어쩐지, 속이 안 좋네. 아직, 멀미 하나 봐.”
정이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다시, 존댓말…… 하네.”
“지금 상황에 무슨 소리예요…….”
정이한은 떠듬거리는 목소리로 다친 데는 없는지 물었다.
“……형이, 지켜줬잖아요. 하나도 안 다쳤어요.”
정이한이 다행이라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평소처럼 아주 예쁘게. 나는 정이한의 어깨를 꽉 쥐었다가 놓으며 일어났다. 나를 따라 정이한이 턱을 들었다.
“차에서 덮을 것 좀 찾아볼게요.”
희미하게 끄덕이는 고갯짓을 본 뒤 나는 허리를 숙여 차 내부를 들여다봤다. 가슴 안쪽이 욱신거렸지만, 나보다 정이한과 정곤 형이 더 아플 테니까 이 정도로 우는소리 할 순 없었다.
차를 한 바퀴 돌아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이쪽은 완전히 부서져서 짓눌려 있었다. 만약, 내가 맨 뒤에 앉지 않았다면 정이한이 앉아 있었을 곳이었다. 저절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이봐요! 당신 많이 다쳤어! 어디 가요!”
등 뒤에서 들리는 소음에 정신이 돌아왔다. 담요를 찾기 위해 몸을 깊숙이 숙였을 때였다.
“아악!”
이어서 들리는 고통스러운 듯한 비명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우리를 구해줬던 남자가 팔을 붙잡고 주저앉아 있었다. 그 팔을 타고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내 시선이 느리게 움직였다. 시선의 끝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이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 그 칼을 쥐고 있었다. 피범벅이었으나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나는 충격에 입을 벌렸다.
……소파남.
그를 조심하라는 경고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그의 등 뒤에 보이는 검은색 세단을 보자마자 모든 아귀가 들어맞았다.
스튜디오 빌딩에서 봤던, 눈이 채 녹지 않았던 검은색 세단의 주인이 소파남이었구나. 무리해서 끼어든 것도 우리 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던 건가. 내가 거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
아, 강조…….
소파남이 휘청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소파남의 손에 들린 피 묻은 칼날이 햇볕을 받아 섬뜩하게 반짝였다.
“나는, 다 잃었는데 왜 너만……?”
술에 취한 것처럼 불분명한 발음이었다. 실핏줄이 터져 충혈된 눈은 광기에 차 있었다. 칼날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이 검은색 아스팔트에 먹혀 사라졌다. 질척이는 바닥은 꼭 괴물의 혓바닥 같았다.
“……너도 뺏겨야 공평하지.”
뭉개진 발음이 점점 정확해지더니 마지막에 가선 명료해졌다. 기이한 안광을 번뜩이는 소파남이 비틀거리며 점점 가까워졌다.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소파남이 들고 있는 칼도 꼭 무대용 소품처럼 느껴졌다. 칼날에 반사된 빛이 눈을 찌르고 나서야 불쾌한 잔상과 함께 현실감이 훅 밀어닥쳤다.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비척비척 걸어오는 소파남이 나를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희미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이제 곧 구급차와 경찰이 올 터였다. 소파남을 조금만 붙잡고 있으면, 그는 경찰에 제압되겠지.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 나갈 듯 박동하는 심장을 애써 무시한 채 나는 소파남에게 말을 걸었다.
“……나와 대화가 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소파남이 느릿하게 팔을 들어 올렸다. 소름끼치는 칼끝이 향한 곳은, 내 반대쪽이었다. 정곤 형과 정이한이 있는.
“소중한 거, 맞지?”
소파남이 찢어질 듯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해할 수 없는 즐거움과 기쁨이 그 웃음에 서려 있는 것 같았다. 끽끽대는 웃음이 돌연 멎었다. 동시에 소파남이 빠르게 달렸다.
“안돼!”
세상이 온통 느려졌다. 더 빨리 뛰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느렸다. 그 사람들을 건드리지 마. 헤치지 마!
나는 무작정 소파남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닿지 않을 것 같은 몸이 내 손에 잡혔다. 우리는 넘어져 몇 바퀴를 굴렀다. 심장을 얼려버릴 듯한 냉기가 전신을 두들겼다. 내가 느끼는 한기가 얼음물과 다름없는 땅 때문인지, 내 소중한 사람들을 향한 칼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흐하학! 어차피 난 다 잃었어. 강조, 그 새끼도 쳐 죽이려고 했는데 늦었거든. 빌어먹을 눈!”
소파남이 내 위에 올라타 있었다. 놈에게 짓눌린 어깨가 아팠다.
“이렇게 된 거 너라도 잡아야겠어.”
휙 치켜든 팔이 나를 향해 내리꽂혔다. 나는 가까스로 소파남의 팔을 붙잡았다. 내리누르는 힘이 거세서 조금씩 내 가슴을 향해 칼끝이 밀려 내려왔다.
“하, 온이한테 손대지 마!”
“안돼! 형! 오지 마!”
정이한에게 소리친 건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나를 괴롭히기 위해 소파남이 처음에 고른 건, 내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정이한은 고민도 없이 소파남을 향해 달려들었다.
두 사람이 엉겨 붙었다. 엎치락뒤치락하며 흐르는 피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전신이 벌벌 떨렸다. 정이한을 구해야 해. 어떻게든 몸에 힘을 줘서 일어났을 때 파란 제복이 내 앞을 가리고 섰다.
몇 번의 경고 끝에 경찰 여러 명이 동시에 달려들었고 소파남은 제압됐다. 그런데 그의 손에 들려 있어야 할 칼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