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310화 (310/320)

309.

끊임없이 내릴 것 같은 눈이 비로 바뀌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와이퍼 밑으로 쌓였던 눈이 조금씩 녹고 있었다. 눈이 그쳤다고 바로 정체가 풀리는 건 아니라, 여전히 차는 가다 서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으으, 멀미나…….”

정이한이 앓는 소리를 내며 카시트에 몸을 기댔다.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걸 보니 속이 많이 안 좋아 보였다.

“속 안 좋아요? 눈 좀 붙여요.”

“응…….”

나는 정이한의 손을 꼭 잡은 채 손등을 살살 쓸어줬다. 나랑 닿자마자 회복되면 또 의심할지도 모르니 조금 이따가 구원 스킬 써줘야겠다. 잠든 상태면 더 좋고.

10분쯤 지나자 슬슬 정체가 풀리는 지 차가 속도를 내고 있었다. 여기서 회사까지 20분 정도 걸리려나. 어느새 비도 그쳐서 날씨가 화창하게 바뀌었다.

이제 스킬 써도 될 것 같은데. 스킬을 사용하자 정이한과 손잡고 있으면서 회복한 만큼의 체력이 도로 빨려 나갔다. 잠든 줄 알았던 정이한이 눈을 떴다.

“……하온아.”

멀미는 다 나았을 텐데 왜 아직도 저렇게 죽상을 하고 있지? 정이한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앓는 소리를 냈다.

“나 계속 속이 안 좋아…….”

허. 앙큼한 정이한 같으니라고. 정이한은 그냥 여우가 아니라 백 년 묵은 구미호가 아닐까. 그런데 나는 이 발칙한 행동이 왜 귀여워 보이는 거야.

“많이 안 좋아요?”

어디까지 가려는지 궁금해서 걱정되는 것처럼 물었다.

“나 머리 쓰다듬어주라…….”

정이한이 내 얼굴을 올려 보며 “응?”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스르륵 미끄러진 머리카락에 눈을 찔려 찡그리는 얼굴이 예뻐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이러면 돼요?”

창을 등진 채 눈을 찌르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정이한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기분 좋다며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다.

그때 차가 한 번 크게 흔들렸다.

“미친 거 아냐?”

정곤 형의 욕설이 뒤를 이었다. 깜짝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창밖을 봤다. 우리 바로 아래에 딱 붙어 있는 검은색 세단이 우리 쪽 차선을 침범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술 먹은 거 같은데. 피해야겠어.”

정곤 형이 차선을 바꿨다. 세단이 멀어졌다. 검은색 세단은 똑바로 달리지 못하고 차선 두 개를 넘나들며 휘청거렸다.

“제가 경찰에 신고할까요?”

정이한이 정신이 바짝 든 목소리로 물었다. 아픈 척하는 건 끝났나 보네.

“차 번호 물어볼 텐데 일단 신고해 봐. 여기서는 차 번호가 안 보이거든.”

계속 검은색 세단을 주시하는 정이한이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번호판이 보이면 이야기해주려고 했는데,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도로의 위치와 주행 방향을 알려준 정이한이 전화를 끊었다.

“다른 사람도 신고했나 봐. 그쪽이랑 통화하면서 추적한대.”

사고 나기 전에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그보다. 나는 장난기를 가득 담아 정이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멀미는 나았어요?”

“어? 아, 어. 그러게. 놀라서 나았나 봐.”

정이한이 뚝딱이가 됐다. 떠듬거리는 목소리는 어떻게 봐도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정말 거짓말 못 해. 더 놀릴까 하다가 모르는 척해주기로 하고 “다행이네요.”하고 대답하며 웃었다.

“어……?”

정이한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무언가를 주시하는 시선이 나를 지나쳐 있었다. 정이한을 따라 고개를 돌렸을 때, 다급하게 외치는 목소리가 내 뒤통수를 때릴 것처럼 크게 터졌다.

“형! 조심해요!”

검은색 세단이 차선을 사선으로 가로질러 우리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정곤 형이 순간적으로 속도를 높였다. 상체가 뒤쪽으로 눌리는 느낌과 함께 정이한이 “하온아!”하고 나를 불렀다.

정이한에게 꽉 끌어 안겨짐과 동시에 강판이 찢어지는 듯한 소음이 들렸다. 몸이 들썩였다. 순간적으로 숨이 콱 막힐 듯한 충격이 전신을 때렸다. 차가 기우뚱거렸다.

이대로 넘어가면 어떡하지? 그럼 정이한이 크게 다치는 거 아니야? 최악의 상황이 머릿속에 들끓었다. 정이한에게 똑바로 앉으라고 말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끼이이익, 하는 타이어 마찰음과 무언가가 긁히는 듯한 불쾌한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기우뚱대던 차가 중심을 잡는 듯 흔들리는 폭이 줄어들었다. 속도가 줄어들고 있었다.

“씨발, 저 새끼 일부러 박은 거야!”

정곤 형이 거칠게 욕설을 내지르며 다시 속도를 올렸다. 정이한은 여전히 나를 안고 창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이한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게 불안해서 정이한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계속 말이 나오지 않았다. 따닥따닥하는 이빨 부딪히는 소리가 거슬렸다.

정이한이 내 뺨을 붙잡았다. 저를 보게끔 내 얼굴을 고정한 뒤 도로에 가득 쌓였던 눈을 녹인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다. 분명 이렇게 화사한 미소인데 불안으로 심장이 철렁였다.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줄게.”

왜 지금 그런 말을 하는데? 뭔데? 너는 지금 뭘 보고 있는 건데!

콰아앙!

한 번 더 강한 충격이 엄습했다. 안전벨트에 가슴이 꽉 조이며 통증이 일었다. 시야가 기우뚱거리며 넘어가고 있었다. 정이한은 내가 받아야 할 충격을 제 몸으로 흡수하려는 듯 나를 강하게 옭아맸다.

쿵!

모든 게 흔들렸다.

끼기기기긱!

강철이 아스팔트에 긁히는 소리가 소름 끼쳤다. 어떻게 된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차가 옆으로 넘어간 건지, 뒤집힌 건지도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감각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다가 다시금 큰 충격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펑 소리와 함께 매캐한 화약 냄새가 났다. 흐려지는 의식 너머로 정이한의 신음이 들렸다.

***

머리에 피가 몰리는 듯한 어지러움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나는 안전벨트에 고정된 채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차가 뒤집힌 건가…….

정이한은?

곧바로 차 내부를 훑었다. 목을 움직일 때마다 온몸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어디가 아픈지도 모를 정도로 전신이 욱신거렸다.

“……이! 쿨럭, 흐으, 윽.”

목소리를 내려고 하자 가슴에서 격통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내 아픔보다 나처럼 거꾸로 매달려서 늘어진 정이한이 더 중요했다.

딸깍, 딸깍.

안전벨트가 잘 풀리지 않아서, 여러 번 시도한 끝에 겨우 벨트를 풀었다. 동시에 나는 천장이었던 바닥으로 떨어졌다. 밖의 온도를 그대로 머금고 있는 듯한 냉기가 서늘했다.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며 소리를 지르는 육체의 고통을 무시하고, 무릎을 세워 정이한의 어깨를 짚었다. 정이한의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뚝뚝 떨어지는 액체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이, 한 형……. 이한 형!”

손이 덜덜거렸다. 두 번 다시 빛을 머금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힌 눈이 무서웠다. 나는 막무가내로 정이한을 옭아매고 있는 벨트를 풀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몸을 내 몸으로 받아냈다.

쿵!

내 힘으로 버틸 수 없는 무게에 전신이 짓눌렸다. 그런데도 아프지 않았다. 몸의 아픔은 심장에서 오는 통증에 밀려 사라졌다. 나는 정이한을 품에 안고 뺨을 쓰다듬었다. 따듯해…….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러게 왜 나를 안고 있었어! 안전벨트를 느슨하게 하니까 크게 다쳤잖아! 이런 식으로 지켜준다고 누가 좋아할 거 같아? 눈을 뜨면 원망하고 싶은 말이 소용돌이쳤다.

“이한 형, 정이한, 정이한……. 일어나요. 눈 좀 떠……. 이런 게 어딨어. 이러는 게 어딨어…….”

하지만 내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애원이었다. 시야가 일렁거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깜박이면 잠시 멀쩡해졌으나 금방 다시 뿌옇게 흐려졌다. 그때 내 손등에 체온이 닿았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온……아. 괜찮…….”

작은 속삭임이었지만, 분명히 나를 부르는 목소리였다.

“정이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들었어. 환청이 아니야.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고. 이대로 넋 놓고 있을 때야 아니야.

스킬, 스킬을 쓰자. 내가 정이한을 회복시켜줄 수 있어. 나는 곧장 정이한에게 구원 스킬을 사용했다.

<시스템: 조건이 맞지 않습니다.>

어째서! 상처가 너무 커서? 지금 내 스킬로는 치료를 못 해? 그러면 남은 포인트를 모두 사용해서 구원 스킬 레벨을 올려줘. 빨리!

스킬 승급 메시지가 연달아 들렸다. 구원 스킬이 B등급까지 올라갔다. 그 상태로 다시 한번 스킬을 발동했지만…….

<시스템: 조건이 맞지 않습니다.>

……왜? 어떻게 해야 써줄 건데! 그냥 치료해! 치료해 달라고!

<시스템: 조건이 맞지 않습니다.>

그 조건이 뭐냐고! 나는 미친 사람처럼 구원 스킬을 발동했다. 조건이 맞지 않다는 메시지가 일그러진 시야를 가득 채웠다.

“하온, 아. 울지, 마……. 어디 아, 파……?”

내 뺨에 정이한의 손이 닿았다. 다정하게 뺨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안 되는 걸 계속 붙잡고 있어 봐야 정이한의 상태만 더 나빠질 뿐이다. 한시라도 빨리 병원으로 옮기려면 일단 여기서 나가야 했다.

“정이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 내가 구해줄 테니까. 알겠어?”

나를 보는 눈동자가 크기를 키웠다. 왜 대답을 안 해. 초조한 마음에 대답을 재촉했다. 물기에 젖은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엉망진창이었다.

“지금, 지금 여기서 나갈 거니까 정신 제대로 붙잡고 있어. 알겠으면 대답해. 대답하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