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
“기다려!”
정이한이 데우스를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정이한의 손은 안개처럼 흩어진 데우스의 흔적만 헝클어트렸을 뿐이었다. 정이한은 아무것도 쥐지 못한 제 손을 허망하게 보다가 다급히 내 양어깨를 붙잡아왔다. 절박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취소해. 네 소원이라며? 그럼 취소할 수 있는 거지?”
“형.”
내 목소리에서 단호함을 읽은 걸까. 정이한의 얼굴이 잔뜩 찡그려지더니 고개를 숙였다. 내 어깨에 닿은 정이한의 이마가 나를 원망하듯 툭툭 두들겼다.
“왜 그랬어……. 왜……. 나는 기쁘다고 했잖아. 행복하다고 했잖아. 내 꿈도, 내 삶의 의미도 전부 너한테 받은 거였어.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네가 나 때문에 희생하려고 하는 건데. 어째서…….”
나는 아까 정이한이 내게 했던 것처럼 그를 꼭 안아줬다. 내가 정이한을 원망했듯이, 지금 정이한이 나를 원망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내가 미우려나.
아무렴 어때. 정이한이 눈을 뜨는데. 그의 삶이 계속된다는 확신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었다.
정이한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그만큼 내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갔다. 가느다란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꼭 해야 할 말이 있는데 지금은 좀 그렇네. 정이한을 진정시킨 뒤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우리 조금 걸을까요?”
정이한의 손을 잡고 끌어당기자, 별다른 저항 없이 내게 끌려왔다. 어디로 갈까. 들판이나 꽃밭은……. 딱 봐도 앉을 만한 곳이 없고, 호수는 무서우니까 내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신기하게도 숲으로 들어가는 오솔길이 나 있었다. 데우스가 만든 공간이라고 했으니 디테일을 꽤 고려했다고 해야 하나.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니 모닥불을 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심지어 의자까지 있다. 마치 ‘여기 앉아서 대화하시오.’하고 써 붙인 것만 같았다.
우리가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불씨 하나 없던 모닥불의 나뭇가지가 활활 타올랐다.
타닥타닥.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모닥불이 타들어 가자, 갑자기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뒤이어 나뭇잎 스치는 소리와 함께 지저귀는 새, 시냇물 흐르는 소리,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기분 좋은 흙냄새와 상큼한 풀 내음까지 맡을 수 있었다.
멈춰있던 시간이 재생된 것처럼, 그저 아름다운 병풍 같았던 공간에 갑자기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그 속에 서서 감탄하던 나는 문득 든 생각에 눈매를 구겼다.
……데우스,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타이밍이 너무 좋잖아. 조금 찝찝해져서 오히려 떨떠름해졌다. 그래도 앉을 만한 곳은 여기뿐일 것 같아서, 나는 넓은 통나무 의자에 정이한을 데려가 내내 고개를 푹 숙인 채 터덜터덜 따라오던 정이한을 앉혔다.
“……경치가 너무 예뻐요. 형도 한 번 봐봐요.”
언제나 내 말을 잘 들어주던 정이한이 이번엔 고집을 부렸다. 고개를 푹 꺼트린 채 절레절레 젓는다.
“형, 우리…….”
이런 말까지는 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정이한의 눈이 보고 싶었다.
“이 시간이 지나면 끝인데, 제 얼굴 안 볼 거예요?”
정이한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내 말을 부정하고 싶은 듯한 눈이 흐릿했다. 젖은 얼굴이 안쓰러워서 손바닥으로 문질러줬다.
“이한 형 그렇게 되고, 형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알아요? 계속 저를 봐요. 나한테서 시선, 돌리지 마요.”
“……하온아.”
“마지막으로 제 기억에 남는 형의 얼굴은 미소였으면 좋겠어요. 저는 형이 웃는 걸 되게 좋아하거든요. 말은…… 안 했지만 너무 예쁘고, 반짝반짝해서 항상 좋아했어요.”
나는 정이한과 똑바로 마주 보며 웃었다. 정이한이 나를 따라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은 이거면 된다. 그래도 나를 보고 있으니까.
“제 비밀 하나 알려드릴까요?”
정이한이 내게 했던 말들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나 또한 이기적이게도 정이한이 날 기억해주길 바랐다.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 건 그래서였다. 뭐, 날 잊고 행복하게 살아간다면 그것 또한 좋고. 중요한 건 정이한이 행복해지는 거니까.
아아. 이거였구나. 그가 잊어도 좋다고 했던 말이. 이제서야 정이한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정이한이 더 애틋했다. 너도 이런 마음이었구나. 이렇게나 날 사랑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나는 정이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저는 영혼이 닳고 닳아서 더는 환생할 수 없어 소멸만 앞두고 있었대요. 일명 폐급 영혼. 웃기죠?”
“……무슨, 소리야.”
“그런데 그렇게 되면요.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저를 싫어한대요.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얽히고 싶지 않은 거죠. 제게 다음이 없으니까.”
“내게 너는 희망이었어.”
여전히 울음기가 배어 나왔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나는 웃음을 흘린 뒤 덤덤하게 말했다.
“그래서 저는 한 번 죽었어요.”
“……뭐?”
놀란 정이한의 눈이 보름달처럼 크게 뜨였다.
“우리 마지막에 촬영했던 게임 기억하죠? 인페르노.”
“당연히…….”
“그 게임 하다가 과로로 죽었어요. 저 죽기 전에는 게임 너튜버였거든요. 빠듯하게 먹고살 만큼 벌 수 있었던.”
“그래서 게임을 그렇게 잘했던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 지었다. 일부러 웃으려고 하는 게 아닌데 헤프게도 계속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데우스를 만났어요. 저한테 기회를 준다고 했어요.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
나는 정이한에게 데우스를 만난 이후 있었던 일과 SR에 들어가기 위해 뭘 했는지, 내가 겪었던 미션과 스탯과 스킬에 대해 설명했다.
“사실 형들이 이상하게 여겼을 때 얼마나 뜨끔했는지 몰라요. 전부 구원 스킬 써서 형들 회복시켜준 거였거든요.”
“……초능력 이야기 나눴던 거 생각나.”
“그리고 형. 멀미난다고 거짓말했죠? 제가 이미 회복시켜놨었는데.”
정이한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달아올랐다. 나는 그를 내심 귀여워하면서 키득거렸다.
“어, 어쩐지 갑자기 멀쩡해지더라…….”
정이한이 부끄러워하면서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저 몸 약하지 않아요. 그간 이상했던 건 전부 상태 이상 때문이에요.”
“상태 이상?”
나는 내 체력 시스템에 대해 설명했다. 내가 계속 휴식을 취했던 이유와 상태 이상 때문에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었다는 것들에 관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는데 정이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그때 욕실에서 잠든 거 아니고 그것도 상태 이상이었어?”
“……아. 어, 그, 그렇죠?”
“뭐였는데? 기절이었지?”
“그으, 렇죠?”
“너, 진짜. 욕조에서 기절했다가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하려고 그랬어!”
이렇게 혼날 줄이야. 나는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좋아서 웃냐는 타박이 이어졌다. 새초롬하게 눈을 좁힌 채 노려보는 얼굴이 마냥 귀여웠다.
“저도 놀랐어요. 기절 걸릴 줄은 몰랐거든요. 부랴부랴 얼굴만 쏙 빼놨는데 설마 형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올 줄이야.”
“나는 기절하는 줄 알았어…….”
정이한은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사고 날 때…….”
“……아. 네.”
“그때 네 모습이 떠올랐어. 네 팔을 타고 흐르는 물이 왜인지 피처럼 보였었거든. 그게 무서워서 필사적으로 너를 안았어. 그러지 않으면 착각이 아니라, 정말 피 흘리는 널 보게 될까 봐 두려웠어.”
정이한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응시했다. 그러다 한숨을 토하듯 말을 이었다.
“……소원을 철회해줘. 나는 하온이 없이 살 수 없어. 나 혼자 깨어난 들, 죽은 세상이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정이한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폐부를 쥐어 짜낸 것 같은 희미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하온이는 아니잖아…….”
“왜 아니라고 생각해요?”
“네가 지금 이러는 거, 죄책감이야.”
단언하는 듯한 어투에 내가 반문했다.
“형, 정말 몰라서 그래요?”
정말 내 마음을 몰라서? 나보다 먼저 알았으면서. 그는 분명 내가 누굴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다. 내가 정이한에게 보였던 모든 행동이 의미했던 바를 읽지 못했을 리 없었다. 내가 멍청해서, 내가 바보라서 알아차리는 데 오래 걸렸을 뿐이었다.
“하온이는 내가 없어도 괜찮아. 죄책감은 금방 희미해질 거고, 유찬 형이랑 강현이, 서호가 빈자리를 채워줄 거야.”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걸까. 내가 입 밖으로 낸 적 없었으니까.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나를 돌려보내려고 수를 쓰는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여우 같은 정이한한테 한두 번 당했나?
정이한은 또다시 내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축축하게 젖은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저 봐요. 저 보고 다시 말해봐요.”
정이한은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정이한의 턱을 잡고 강제로 내 쪽으로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눈꺼풀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보기 싫으면 계속 그러고 있어요.”
내 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에게 화가 나서, 또다시 내게서 도망친 눈동자가 싫어서 나는 충동적으로 움직였다. 어쩌면 또다시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이서호의 말 때문일지도 몰랐다.
키스할 수 있으면 그게 사랑이라고.
정이한의 얼굴에 나로 인한 음영이 생기는 걸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어느새 정이한이 헛숨을 들이켜는 게 피부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대로 서로의 입술이 닿았다.
정이한의 입술은 부드럽고 따스했다. 놀라서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정이한의 숨이 달았다. 부끄러워서 절대 못 한다고 생각했던 행위를 내가 먼저 하게 될 줄이야.
하지만…… 이 감촉이, 예상외로 너무 좋았다.
마치 내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한 접촉이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은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증거였다. 뻣뻣하게 굳은 정이한의 눈이 느리게 끔벅거렸다. 정이한이 내쉬는 숨결에 솜털이 간질거렸다.
당혹감에 물든 눈동자에 비치는 건 오직 나뿐이었다. 그게 기쁘고 좋아서, 나는 맞닿은 입술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