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
인페르노 촬영이 시작됐다. 촬영은 알아서 할 테니 PC방에서 친구들과 함께 노는 것처럼 플레이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리얼리티처럼 찍을 생각인가 보네. 카메라 무시하는 건 가뿐하지.
힐 없이 각자 생존하는 게임이다 보니 클래스 선택은 자유로웠다. 그래도 탱커 클래스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긴 하는데…….
“내가 검사할게.”
강조 선배님이 선뜻 검사 클래스를 청했다. 정이한은 창술사를 골랐다. 여기 오기 전에 몸도 그럭저럭 탄탄하고 중거리 공격이라 범위 공격을 회피하기 쉬운 창술사를 권했는데, 그걸 기억한 모양이었다. 기특하기도 하지.
“야, 강조. 제일 화려한 게 뭐냐?”
“법사.”
“그럼 난 법사 해야지.”
준 선배님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법사를 골랐다. 커스터마이징에 꽤 심혈을 기울이더니 본인의 얼굴과 닮은 캐릭터를 만들고 싶은 것 같았다.
내가 1인 레이드 공략할 때 쓴 캐릭터는 권법가였지만……. 굳이 이걸 또 할 필요는 없겠지. 지금 현재 파티 멤버가 탱 한 명, 중거리 한 명, 원거리 한 명이니까 안전하게 가려면 서브 탱 중에 하나 고르는 게 낫겠네. 권법가랑 검사를 빼면…….
아, 뭐야. 마녀가 아직 업데이트 안 됐어?
그럼 밸런스 생각하면 근거리 딜러를 하는 게 좋은데, 남는 근거리는 암살자뿐이다. 암살자는 한 번도 안 해 봤다. 이건 일명 ‘뒤잡이 캐릭’이라 서브 탱도 안 된다. 후방 공격 시 공격력 보너스가 있는 대신, 정면에서 공격하면 그만큼 데미지가 반감되는 클래스였다. 혼자 플레이할 때 절대 쓸 일 없는 캐릭이라 잡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검사가 죽으면 암살자 딜이 부족해서 어그로가 튈 확률이 높단 말이지. 그럼 저 게임 초보들도 죽어나갈 거고, 그렇다고 강조 선배님한테만 의지하면 게임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권법가는 하기 싫고.
좀 뛰어다녀야 하긴 하지만, 차라리 원거리 탱이 가능한 클래스를 골라볼까…….
나 왜 이렇게 진지하냐. 그렇게 하기 싫었는데 막상 게임 플레이 화면을 보고 있으니 거의 습관적으로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사람의 손에 키워진 동물이 제 야생성을 되찾은 것처럼 구는 내가 어이없었다.
“아, 이한아? 창술사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네가 잘 모르나 본데.”
정이한이 수련장에서 연습하는 걸 본 강조 선배님이 옆에서 계속 훈수를 뒀다. 그런데 제대로 된 훈수도 아니고, 정이한을 무시하는 듯한 어투라 짜증이 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권법가로 캐릭터를 만들어 버린 상태였다.
미쳤네. 캐삭하고 다시 만들어야 겠…….
“이한이하는 거 보니까 게임 할 줄 모르네. 여기는 왜 나왔어?”
나는 캐릭터 선택 창으로 나가려고 띄운 메뉴를 취소했다. 권법가 간다. 권법가에게는 죄가 없어. 감히 정이한을 무시해?
“아니, 하온이는 권법가야? 그거 막기 판정 0.3초인 거 알아? 타이밍 판정 칼같이 맞춰야해서 힘든데. 이 게임 공격 패턴 랜덤이라 다 보고 막아야 하거든. 하온이랑 이한이 엄청 죽겠네…….”
벌써 피곤하다는 듯이 구는 모양새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내가 이 게임을 하다가 과로로 뒤진 인간이다.
“네. 조언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래도 열심히 해볼게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방싯방싯 웃었다. 짜증 날 때 웃는 건 내 특기고, 게임도 특기라 이 말이다.
***
“야야! 나 죽어……!”
준 선배님이 괴성을 질렀다.
“아! 어쩌라고!”
강조 선배님은 짜증을 냈다가 이게 방송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뒤늦게 목소리 톤을 정돈했다.
“그냥 죽어.”
그렇다고 내용이 친절해진 건 아니지만.
나는 준 선배님만 쫓아다니는 보스의 꽁무니를 그저 졸졸 따라다녔다. 딜을 거의 넣지 않았으니 내게 어그로가 튈 일도 없었다.
커다란 도깨비 방망이가 허공에서 휘둘러졌다. 쾅! 도깨비 방망이에 찍힌 바닥이 움푹 패며 마법사의 체력이 순식간에 회색으로 변했다.
“아, 탱이라며? 뭐하냐?”
“네가 무식하게 딜 꽂아 넣으니까 그렇지! 시작하자마자 궁 날리는 법사가 어딨어?”
“궁이 뭔데.”
“F로 쓴 그 스킬!”
“아하. 이게 궁이야? 난 몰랐지.”
태연하게 대답하는 준 선배님을 강조 선배님이 노려봤다.
“이한 형, 잠깐 뒤로 좀.”
“응응.”
정이한은 딜을 넣다 말고 내 캐릭터가 미는 대로 뒤로 쭉 빠졌다. 동시에 빨리 딜 안 넣고 뭐 하냐는 강조 선배님의 외침이 들렸다.
“아, 뭔가 좀 위험해 보여서요. 지금 갈게요.”
정이한에게는 그대로 있으라는 의미로 팔을 한 번 건드린 뒤, 나는 캐릭터의 방향을 돌렸다. 그때 빙글빙글 회전하는 보스의 공격 범위가 점점 커졌다.
저렇게 검만 들고 있으면 막타 맞고 날아갈 텐데. 나는 할 줄 아는 건 검을 드는 것밖에 없어 보이는 검사를 한심하게 본 뒤, 타이밍에 맞춰서 막기 스킬을 눌렀다.
팅, 하는 맑은소리가 보스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았다는 걸 증명했다. 그리고 강조 선배님의 캐릭터는 내 예상대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어?”
나는 우연히 방어를 성공한 것처럼 어리둥절한 눈으로 끔벅거렸다.
“헉! 빨리, 빨리 움직여! 빨리!”
강조 선배님의 애타는 비명과 다급한 키보드 소리가 들렸다. 검사를 노린 도깨비 방망이가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빠직, 하는 소리와 함께 검사의 체력이 쭉 떨어졌다. 종족 특성이었다. 도깨비 계열은 상태 이상에 걸리면 데미지가 두 배로 들어가거든.
“하, 죽었네. 일단 다시 하자. 너희도 빨리 죽어.”
이 사람을 보고 있자니 준 선배님이 되게 좋은 사람 같네. 하긴 텐스타 멤버가 열 명이나 되니까 전부 좋은 사람일 순 없겠지. 그렇다고 이해하고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선배님, 조금만 연습해 봐도 될까요?”
“하긴 뭘 해. 어차피 죽을 텐데.”
“야, 강조. 적당히 하자. 하온이는 하고 싶은 거 해. 형아가 지켜줄게.”
준 선배님이 히죽거렸다. 강조 선배님은 준 선배님을 힐끔거린 뒤 ‘그러든가.’하고 중얼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뭔가 상하관계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정이한을 노리는 보스의 거대한 종아리에 딱 달라붙었다. 연계기를 사용해 딜을 꽂아 넣자 금방 보스가 나를 보고 방향을 돌렸다.
내 화면을 구경하던 준 선배님이 놀라워했다.
“엥? 방금 뭐한 거야?”
“그냥…… 나오는 대로 눌렀어요.”
도깨비 방망이가 치솟은 상태로 흔들거렸다. 저러다가 곧 멈춘 방향으로 공격이 들어올 터였다.
“어? 외, 왼쪽? 오른쪽?”
왼쪽이네.
“모르면 찍어!”
준 선배님의 응원과 함께 나는 “그럼 왼쪽이요!”하고 키보드에서 손가락을 허둥거리다가 타이밍 맞춰서 방어 스킬을 켰다.
0.3초가 뭐 그리 어려운 거라고.
“오! 막았다!”
“와…….”
하지만 계속 이러면 우연으로 보이긴 힘들겠지. 나는 적당한 타이밍에 방어에 실패한 척하며 캐릭터를 굴렸다. 그리고 방망이에 맞아서 아웃. 홀로 남은 정이한은 1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잘한 거지. 게임 감각도 좋네.
“하온이 잘하네.”
“형도 잘하던 데요.”
우리는 서로를 기특해하며 웃었다.
이제 슬슬 빌드업 좀 해 볼까? 내 목표는 탱 스틸이다. 강조 선배는 탱에 자부심 좀 있는 모양이니 탱 뺏기는 것만큼 짜증 나는 일은 없을 거다.
이어지는 연습 시간 내내 검사가 죽으면 탱을 이어받아 더 오래 버텼다. 그러다 결국 준 선배님으로부터 내가 원하는 말을 들었다.
“하온이가 탱하면 안 되나? 강조 너 너무 일찍 죽어.”
“……나 검사인데?”
“하온이가 더 잘하잖아.”
강조 선배님은 인상을 확 찡그렸다가 억지로 펴면서 말했다.
“쟤도 처음부터 하면 나랑 비슷하게 죽을걸.”
“그럼 일단 하온이 탱으로 한번 해 보자.”
“그러든가…….”
“어, 그러면. 제가 한 번 열심히 해 볼게요.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나는 빼지 않고 탱 제안을 덥석 물었다. 이렇게 쉬운 도깨비한테 맞아 죽어주느라 고생했으니 이번엔 끝을 낼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건 가장 하위 레이드고, 감 좀 있는 사람들은 30~40분이면 파악 끝나는 보스다. 이제 슬슬 잡아도 되겠지.
“와, 뭐야? 엄청 안정적인데?”
준 선배님이 감탄했다. 나는 머쓱한 듯 웃다가 “어, 이거 광역 같아요.”하고 말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준 선배님과 정이한의 캐릭터가 뒤로 순식간에 쑥 빠졌다. 그리고 다음 턴은 보스의 회전. 별로 아프지 않은 1, 2타를 맞고 3번째 넉백 타격만 여유롭게 막아냈다. 검사가 또 데굴데굴 굴러갔다. 잘 굴러다니는구나.
뒤에서 때리면 더 오래 버틸 텐데, 강조 선배님은 굳이 내 옆에 나란히 서서 공격했다. 그러다 결국 광역 공격에 맞아 죽고, 강조 선배님 없이 내 탱만으로 도깨비를 잡았다.
상위 레이드로 가면 이렇겐 안 되겠지만, 하위 레이드의 특징은 이렇게 한 명만 잘해도 하드캐리가 된다는 거였다. 게다가 이 도깨비는 예전에도 4인용도 혼자 거뜬하게 잡았으니까 당연한 결과였다.
칭찬받아서 머쓱해하는 나와 달리 강조 선배님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게 누가 정이한 구박하래. 정이한만 안 건드렸어도 얌전히 있다 갈 생각이었는데.
***
촬영이 끝나고 가벼운 마음으로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비상구에서 분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강조 선배님이었다. 누군가한테 내 욕을 하는 것 같았다. 저렇게까지 화가 났을 줄이야. 역시 내가 공략을 잘했지.
속으로 통쾌하게 웃으며 돌아가려던 때, 통화 중인 상대방의 이름이 들렸다. 나는 그대로 굳은 채 걸음을 멈춰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