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97화 (297/320)

297.

“하온이랑 강현이 화이팅.”

“우리는 밑에서 보고 있을게.”

“강현 형! 진하온! 무대 뿌수고 와!”

시상식의 포문을 여는 건 퍼포먼스 팀의 특별 공연이었다. 첫 번째가 강현 형의 팀이었고, 이어서 우리가 두 번째였다. 대기실을 나서는 우리에게 응원 메시지가 쏟아졌다.

“아래에서 만나요!”

나와 강현 형은 멤버들과 인사한 뒤 함께 백스테이지를 향했다. 흥분과 닮은 긴장감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기분 좋은 울렁거림이었다.

“다치지 않게 조심해.”

“형도요. 아까 리허설 보니까 처음보다 더 과격해진 것 같던데요.”

“너네만 할까.”

“아하하.”

좀 그렇긴 해. 리처드 선생님은 안무는 진화하는 거라면서 그 자리에서 안무를 변형시키셨다. 하지만 그렇게 바꾼 게 훨씬 멋있고, 흐름이 깔끔해서 더 힘들어진 동작임에도 군말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강현 형 팀도 마찬가지였겠지.

“하온 형!”

우리가 제일 먼저 온 줄 알았는데 먼저 대기 중이던 레인이 나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뛰어왔다. 나는 강현 형과 인사를 하고 방향을 틀었다. 한달음에 달려온 레인이 내 팔에 매달렸다. 검은색 슈트가 레인을 훌쩍 성숙하게 보이게 만들었지만, 귀여운 눈빛은 여전했다.

“와, 형. 같은 슈트인데 형은 왜 섹시해 보이지?”

“……평범하지 않나?”

“절대 아니거든요!”

레인은 자꾸 내 슈트를 만지작거리면서 감탄했다. 이런 칭찬은 진짜 익숙해질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말을 돌릴 겸 슬쩍 물었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설레서요!”

잔뜩 흥분한 레인의 뺨이 발그스름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이 친구도 정말 무대를 사랑하는구나 싶었다.

“형은 아니에요?”

“나도 설레지.”

내 얼굴에 저절로 환한 미소가 피었다. 연습하는 동안 춤 스탯 승급 메시지를 보지 못한 건 조금 아쉬웠지만, 그 한까지 모두 담아 무대에서 뛰어다닐 생각이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즐거워서 가슴이 거칠게 쿵쾅거렸다.

나는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금 멍한 눈으로 날 보는 레인에게 고개를 바짝 붙였다.

“사실 지금 당장 방방 뛰고 싶을 정도야.”

레인이 화들짝 놀라며 제 귀를 양 손바닥을 겹쳐 감싸 안았다. 울먹거리는 것 같기도 해서 당황한 내가 눈을 끔벅거렸다.

“하, 하온 형. 형은 진짜 천상 아이돌 같아요.”

“……갑자기?”

레인은 허겁지겁 고개를 빠르게 위, 아래로 움직였다. 무대를 앞두고 설레해서 그런가. 그건 레인도 마찬가지인데. 나는 미소를 머금으며 “너도 그러면서 뭘.”하고 가볍게 이야기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저 방금 형이 웃었을 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니까요? 그, 그런데 귓속말 공격까지 하니까 전 함락 당했다구요오오……!”

레인은 빨갛게 달궈진 얼굴로 기차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빠르게 종알거렸다. 그리고 나는 레인이 왜 그러는지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매력 스탯 때문이구나.

“뭘 함락당했는데?”

내 머리 바로 위에서 불쑥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팔을 올린 라이 형의 손가락이 흥미롭다는 듯 까딱거렸다.

“아무래도 제가 하온 형한테 입덕한 것 같아서요.”

어쩐지 심각해 보이는 얼굴의 레인이 별안간 내 손을 꼭 붙잡고는 “형! 무대 끝나도 저랑 계속 연락해야 해요? 약속이에요?”하며 닦달했다. 왜 심각한 얼굴을 하나 했더니 합동 무대 끝나면 내가 매몰차게 연락 딱 끊을 줄 알았나? 나랑 연락하고 싶다고 부탁하는 게 귀엽기도 하고 약간 섭섭하기도 했다.

“서운한데…….”

“네? 왜요!”

“레인이는 내가 무대 끝나면 차단할 줄 알았던 거야?”

“아니요? 당연히 아니죠!”

레인이 다급하게 내 말을 부정하며 도리질 쳤다. 그러다 제가 어떤 말을 했는지 뒤늦게 떠올린 듯 앙큼하게 혀를 빼물더니 헤헤, 하고 귀엽게 웃었다.

“가만히 듣고 있었는데, 레인아. 네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있어.”

라이 형이 무언가 조언을 해줄 듯 의미심장하게 말문을 열었다. 레인이 눈을 끔벅이면서 그게 뭔지 묻자 형의 입꼬리가 장난스레 올라가는 게 보였다.

“레인아, 너 이미 예전에 우리 뉴삐한테 입덕했어. 너만 몰랐을걸?”

“네에? 제가요? 진짜요? 아니, 언제요?”

금시초문이라는 듯 커다랗게 눈을 뜬 레인이 내게 해명을 구하듯 끔벅거렸다. 나라고 알 리가 없는데…….

“노래방에서 뉴삐한테 이미 넘어갔던데? 매번 강아지처럼 머리 만져달라고 애교부렸잖아.”

“……어?”

레인은 허를 찔린 사람처럼 잠깐 굳었다가 이내 중얼거렸다.

“그게 그거였구나……. 하온 형한테 입덕해서 내가 힐링 받았던 거였어!”

작게 시작된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쾌활하게 바뀌었다. 복잡한 수식을 풀어낸 수학자처럼 아주 통쾌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어? 레인이 이제 안 거야?”

나위 형이 히죽거리며 나타났다.

“아, 나위 형도 알고 있었어요? 말 좀 해주지!”

“하온이만 졸졸 따라다니길래 아는 줄 알았지.”

“어라? 근데 다윈이도 하온 형이 머리 쓰다듬어 주는 거 힐링 된다고 했는데요?”

어리둥절하게 묻는 레인에게 라이 형은 “우리 뉴삐가 옴므파탈이야~”이라며 자랑스러워하셨다. 하지만 이쯤 되니 내가 요사스러운 힘을 이용해 사람을 홀린 것만 같았다. 진실을 밝힐 수 없는 나는 그저 웃었을 뿐이었다.

“헉. 다들 왜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다윈이 큰 다리로 성큼성큼 달려오며 분명 자신이 제일 먼저 왔을 줄 알았다며 울상을 지었다. 형들이 빨리 가라고 재촉한 건 다 이유가 있었다면서 시무룩하게 어깨를 떨궜다.

그런 다윈이 귀여웠는지 다들 사악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저런. 라이 형은 막내의 자세가 안 되었다며 기강을 잡는 척했다. 옆에서 나위 형이 추임새를 넣었고, 레인은 너 어떡하냐면서 안절부절못한 척했다. 하나 같이 눈이 아주 장난기로 똘똘 뭉쳐 있었다.

“하, 하온 형…….”

다윈이 피난이라도 오는 것처럼 내게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울먹거리는 얼굴이 안쓰러웠다.

“다들 그만 해요. 진짠 줄 알잖아요.”

결국 내가 나서자 라이 형이 재미없다며 휘파람 불었다. 다들 장난이었다는 걸 깨달은 다윈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다섯 명의 팀원이 모두 모이자 주변 소음을 압도할 정도로 떠들썩해졌다. 그 홍수 속에 파묻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오프닝이 시작되었다.

언제 떠들었냐는 듯 조용해진 우리는 백스테이지에 마련된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했다. MC들이 무대에 올라가고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세 명의 MC가 등장하자 환호성이 백스테이지까지 밀려 들어왔다.

카메라가 객석을 한 바퀴 훑었다. 우리 응원봉과 슬로건을 든 디어리가 귀신같이 내 눈에 쏙쏙 골라 들어왔다. 디어리를 보자 다시금 설레는 긴장감이 온몸에 고였다. 빨리 무대에 올라가고 싶다. 오직 그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오프닝이 끝나고 곧 강현 형 팀의 공연이 소개되었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 강현 형이 내 쪽을 바라봤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큰 목소리로 “화이팅!”하고 외쳤다. 형은 내게 매끄러운 미소로 대답하고는 무대를 향했다.

강현 형 팀의 무대는 그야말로 웅장하다는 말이 잘 어울렸다. 새하얀 천과 대비되는 검은색 제복을 입은 여섯 명의 멤버들이 무대를 지배했다. 마치 군신 같은 자태였다.

딱딱 맞는 절도 있는 동작과 나풀거리며 흔들리는 넓고 긴 천은 얼핏 장르가 다른 것처럼 보였다. 여섯 명을 칭칭 감을 수 있을 것 같은 길고 넓은 천은 무대 내내 그 끄트머리 하나 바닥에 닿지 않았다. 그건 마치 단단해 보이는 군신의 심장 같기도 했고, 사랑의 상징물 같기도 했다.

“멋있다…….”

홀린 듯한 다윈의 목소리에, 스크린에 푹 빠져 있던 내가 응답했다. 내 목소리도 무대에 홀린 것 같은 건 매한가지였다.

“그러게…….”

“우리도 멋있어!”

레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나는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고 레인에게 미소 지으며 짧게 끄덕거렸다. 하지만 잠시라도 눈을 뗀 게 아쉬워서 다시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했다. 진짜 멋있다. 그중에도 강현 형이 제일 멋있어. 잘나가는 아이돌 사이에 있어도 강현 형의 미모와 춤은 독보적이었다. 내가 다 뿌듯할 지경이었다. 저 사람이 우리 디아스의 메인 댄서라고 소리라도 치고 싶은걸. 여기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알고 있겠지만.

어마어마한 함성과 비명 속에 무대가 끝났다. 이제 우리 차례였다. 라이 형이 우리를 한데 모았다. 우리는 서로의 겹겹이 어깨동무를 하도 동그랗게 모였다. 우리 바로 앞에서 그렇게 멋진 무대를 보여줬는데도 불안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구호 외친다. 하던 대로만!”

“하자!”

“좋아!”

스태프의 신호를 받고 가볍게 몸을 풀던 우리는 각자 위치를 향했다. 무대 위로 올라간 사람이 둘, 무대 리프트 위에 올라간 사람이 셋이었다. 나위 형과 다윈, 그리고 나는 리프트였다.

“하온아, 스타트 잘 끊어야 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컨디션이 좋았다. 이서호 말대로 무대를 찢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신감 넘치는 내 목소리에 나위 형은 든든하다는 듯한 얼굴로 날 봤다.

익숙한 MR이 시작됐다. 이곳에서 보이지 않는 라이 형과 레인의 움직임이 내 머릿속에 고화질 VOD처럼 재생됐다. 드디어 우리 차례였다.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리프트가 덜컹거리며 올라갔다. 마침내 꽉 막힌 머리 위 공간이 열렸다. 쓰나미처럼 몰아치는 함성과 빛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이제 무대에서 뛰어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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