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92화 (292/320)

292.

마음이 가벼워져서 그런지 기분이 더욱 업된 것 같았다. 나는 연습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한달음에 뛰어들었다.

“형들! 저 왔어요!”

“하온아!”

“하온이 어서와~”

“진하온 잘 놀았냐?”

“왔어.”

형들은 내 자리로 보이는 공간을 남겨 둔 채 동그랗게 둘러앉아 있었다. 나는 냉큼 빈 자리를 차지했다. 왼쪽에 강현 형, 오른쪽에 이서호. 정면에는 정이한이 보였다.

“아이디어 좀 나왔어요?”

바닥에 엎드려있던 유찬 형이 내 쪽으로 패드를 돌린 뒤 지금까지 나온 아이디어를 쭉 설명해 줬다. 우리는 곡이 많지 않기 때문에 무대 구성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아이디어 회의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8월에 컴백한 앨범의 타이틀 곡은 여름 시즌송이라 겨울에 부를 수 없으므로 논외. 그러면 남은 건 1집 타이틀과 수록곡이다. 수록곡 중에서도 인기 있었던 건 유찬 형이 작곡한 ‘우리는’이었고.

“정곤 형이 돈 생각하지 말고 자유롭게 아이디어 달래서 전부 내려놓고 얘기하는 중이야.”

“그래서 이렇게 폭죽이…….”

“그렇지, 뭐. 하온이는 해보고 싶은 거 있어?”

안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저희 노래 두 곡을 합쳐서 편곡하면 어떨까요.”

“두 곡? 뭐랑 뭐?”

“‘썸머 베케이션’이랑 ‘우리는’이요. 대신 썸머 베케이션은 여름 시즌곡이니까 멜로디만 따와서 구슬프게 바꾸는 거죠.”

나는 형들에게 내 생각을 전했다. 이서호의 바이올린 솔로로 시작되는 무대를. 예전부터 염두에 뒀던 이서호의 반전 매력을 보여주는 게 내 목적이었다. 바이올린과 겨울이 잘 어울리기도 하고.

“이서호가 바이올린을 다룰 줄 알아?”

“아, 응. 진하온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 되게 예전에 말하지 않았나?”

“당연하지.”

“서호 할 수 있겠어?”

“나 연습하면 할 수 있지!”

이서호는 흥분한 기색을 드러내며 유찬 형에게 자신감을 내보였다. 그 즐거워 보이는 모습에 유찬 형을 비롯한 내 얼굴에도 미소가 걸렸다. 과연. 내 원조 대형견답다.

“좋아. 썸머 베케이션을 메인 멜로디만 남기고 바이올린용으로 편곡하는 건 괜찮을 것 같다. 거기서 ‘우리는’으로 자연스럽게 넘기려면 손을 좀 많이 봐야 할 것 같긴 한데, 그건 A&R 팀장님이랑 이야기해 볼게.”

유찬 형은 내 아이디어도 패드에 끄적끄적 적어 넣으며 말했다. 늦게 왔지만 그래도 내 지분을 조금 넣어서 뿌듯했다. 하지만 특별 무대는 하나가 아니었고, 방송사 측에서는 다른 방송사 무대와 겹치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우리의 아이디어 회의는 계속됐다.

***

회의를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오니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죽어도 고 스킬이 운용되는 중인데도 피곤한 걸 보니, 오늘 힘들긴 힘들었구나 싶었다. 하루에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며칠 만에 숙소에 들어온 기분이니 말 다 했지.

“저 오늘 욕조에 몸 담그고 싶은데…….”

정이한과 이서호를 보며 말했더니 대답은 엉뚱하게도 강현 형에게서 돌아왔다.

“그럼 시간 늦었으니까 하온이가 욕조 쓰고, 이한 형이랑 서호는 우리 욕실 써.”

“그럴까?”

“난 마지막에 씻을랭!”

이서호는 순서가 되면 불러달라는 말만 남기고 쌩하니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거 게임 할 생각이네. 어쨌든 이서호는 마지막이니까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고.

평소라면 욕조에 물 받는 동안 정이한에게 먼저 씻으라고 권했겠지만……. 오늘은 안면에 철판을 좀 깔아야 했다.

“그럼 저 먼저 써도 돼요?”

안 된다고 할 리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묻는 나도 참. 당연하게도 정이한은 해맑은 얼굴로 대답했다.

“응. 편하게 씻어. 하지만 걱정되니까 오래 있지는 말고. 하온이 지금 되게 피곤해 보여. 잠들까 봐 걱정이네.”

“에이, 잠들 정도는 아니에요. 아마 한 시간 정도 걸리지 않을까 싶은데요.”

나는 예고 아닌 예고를 흘려 놓고는 주섬주섬 갈아입을 옷을 챙겨서 욕실로 들어갔다. 상태 이상 끝나면 체력 1부터 시작이니까 먼저 씻고 스킬 푸는 게 낫겠지?

제발 무난한 게 걸렸으면 좋겠는데.

의미 없다는 걸 알면서도 씻는 동안 염원을 담아 보았다. 그 사이 욕조에 물이 절반쯤 차올랐다. 나는 얼른 욕조에 들어가 자리 잡고 앉아 죽어도 고 스킬을 종료했다. 동시에 정지되어 있던 체력이 뚝 떨어지면서 익숙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제발 무난한 걸로! 빈혈이나 두통, 근육통은 괜찮아. 다른 건……. 잠깐. 그러고 보니 기절 걸리면 어떡하지? 빠져 죽는 거 아니야? 위치를 잘못 잡았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시스템: 상태 이상 ‘기절’에 걸렸습니다.>

이, 이런 젠장. 나는 기절하기 전에 허겁지겁 욕조 밖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몸에서 힘이 풀리면서 욕조 난간에 가슴이 짓눌렸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보다 얼굴은 내놔서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의식이 뚝 끊겼다.

***

시끄러운 드라이기의 전원을 끈 정이한은 거실로 나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먼저 씻고 소파를 차지하고 있던 박유찬의 옆이었다.

이틀 전, 진하온과 함께 작업실을 나갈 때 마주친 뒤로 박유찬은 내내 할 말이 있어 보였다. 단둘인 지금이라면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을까 싶어서 의도된 선택이었다.

정이한의 생각이 맞았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려는지, 박유찬은 연신 옆자리를 힐끔거렸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화면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이틀 전, 진하온과 보낸 시간은 정이한에게는 찬란하게 아름다운 꿈결 같았다. 진하온이 아무 이유 없이 저를 만나러 와준 것도 처음이었고, 제 옆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꾸벅꾸벅 조는 건 또 너무 귀여웠다. 저러다 앞으로 고꾸라질까 봐 슬쩍 어깨에 기대게 했더니, 제 팔을 꼭 움켜잡고 깊게 잠든 것도.

무엇보다…….

‘하온이가 나를 또 의식해줬어.’

너무 과한 기대는 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면서도, 저를 보던 몽롱한 시선이 꼭 사랑에 빠진 사람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입 밖으로 내버리면 산산이 흩어질 착각이겠으나, 처음으로 느낀 그 감정을 정이한은 자신만의 추억으로 평생 간직할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정이한은 지금 박유찬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자신이 박유찬과 같은 입장이었어도 똑같았을 테니까. 궁금하지만, 상상하는 최악의 상황을 상대방의 입으로 듣게 될까 봐 두렵기도 한 심정을 왜 모르겠는가. 지금은 자신이 먼저 다가가야만 했다.

“유찬 형.”

“……으, 으응?”

텀을 두고 돌아온 대답에는 당황과 경계가 실려 있었다.

“그날 하온이랑 아무 일도 없었어.”

“……나, 나는 딱히 신경 안 썼는데.”

바로 어떤 말인지 알아들을 정도로 신경 쓰고 있었으면서. 정이한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키며 먼저 말 걸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럼 왜 그랬던 건지…….”

제 말을 번복한다는 걸 느꼈는지 박유찬의 목덜미가 발그스름해졌다. 점차 낮아진 목소리는 끊어질 듯 희미했다.

“우리 얼굴 빨개졌던 거?”

“응.”

정이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여상한 어투로 말했다.

“내가 하온이한테 복근 자랑했거든. 근데 하온이가 부끄러워서 해서 나도 덩달아…….”

차마 진하온이 제 배를 만졌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때를 떠올리자 다시 얼굴에 열이 몰리는 느낌이었다.

배에 진하온의 손이 닿았을 때, 마치 모든 의식을 그의 손끝에 빼앗긴 것만 같았다. 넓게 펼쳐진 손이 복부를 배회할 때 느꼈던 짜릿한 긴장감은 단연코 정이한이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낯선 감각이었다.

“그랬어?”

“응. 하온이가 도망쳐 나가서 나도 허둥지둥 따라가느라.”

해명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박유찬은 여전히 씁쓸해 보이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이내 조금 후련한 듯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날 위해 말해줘서 고마워. 내가 신경 쓰고 있었던 거, 알고 있던 거지?”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그럼 하온이가 날 좋아한다면 어떨 것 같아?”

이건 정이한에게 대답하기 쉬운 문제였다. 저 스스로도 진하온에게 선택받기엔 매력이 없다는 걸 아니까.

“형이라면 하온이가 슬프지 않게 사랑해줄 것 같아. 유찬 형은 다정하고, 세심하잖아. 하온이를 잘 부탁한다고 말할 것 같은데.”

“……속상하지 않아?”

정이한은 마치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렸다.

“속상하지. 어떻게 안 그러겠어. 그런데 내가 그런 티를 내면 하온이도, 유찬 형도 내게 미안해할 것 같아. 난 그런 거 보기 싫어.”

묵묵히 듣던 박유찬은 어쩐지 자괴감이 느껴지는 듯한 짧은 탄성을 냈다. 짧게 뱉은 숨에 그리 좋지 않은 감정이 담겼다는 걸 알아차린 정이한이 입을 다물었다.

“너나 강현이나 똑같네. 나만…….”

아주 작게 읊조렸으나 ‘이기적이다.’라는 말이 들렸다. 길게 한숨을 쉬던 박유찬은 무언가를 각오한 듯 뱉었던 숨만큼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온이만큼 너도 내게 소중한 사람이란 걸 잠깐 잊었었나 봐. 나 너한테 질투했거든. 근데 네 대답 듣고 나니 정말 쓸데없는 질투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형은 절대 이기적이지 않아. 그리고 우리는 팀이잖아.”

빙그레 웃어 보인 박유찬은 뭔가로부터 해방된 것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정수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욕실 문 앞을 지나치던 박유찬은 문득 걸음을 멈춘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도 욕조에 물 받나? 물소리가 계속 나는데?”

그럴 리가. 다 받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피곤해 보이던 얼굴이 떠오르자 정이한은 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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