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
“원래는 시크릿 클럽으로 가고 싶었지만, 미성년자가 세 명이나 있으니 대신 노래방이다!”
도라이 선배님은 번쩍번쩍한 간판을 가리키며 흥이 잔뜩 오른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서 회사까지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려나. 코앞에 형들을 두고 이런 데서 상태 이상 걱정이나 하고 있어야 한다니.
“와! 저 자컨 찍을 때 빼고는 노래방 진짜 오랜만이에요!”
어린 레인이 나이에 걸맞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다. 가장 막내지만 제일 덩치가 좋은 다윈은 얼핏 보면 시큰둥한 듯 보였지만, 뺨이 상기되어 있었다. 나위 형도 선배님 앞이라 얌전하게 굴었던 건지 ‘자기 그룹 노래는 부르지 말기’라면서 선수를 치고 있었다.
입을 쩍 벌린 노래방 입구가 음산한 던전처럼 느껴지는 건 나만 그런가. 촬영도 아니고, 고작 노래방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상태 이상…….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겉으로는 좋다고 웃었다.
“형! 저 왔어요!”
“오~ 우리 라이 아니냐!”
카운트를 지키고 있는 말쑥한 중년 남자가 선배님을 반가이 맞이했다. 왜 여기까지 데리고 왔나 했더니 단골인 모양이었다. 확실히 주변에 인적도 드물고 음산한 분위기라 우리가 다니기엔 좋아 보였다.
“오늘은 멤버들이랑 안 왔네?”
“저도 항상 걔네들이랑 노는 건 아니거든요-.”
노래 부르듯 끝 음을 길게 늘인 도라이 선배님은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저 항상 가는 방 비었어요?”
“당연하지. 전부 비었어.”
“형도 정말 특이해. 손님도 한 명 없는데 꿋꿋이 운영하고 말이야.”
저, 저런 민감한 주제를! 하지만 노래방 주인아저씨는 취향에 맞는 개그라도 들은 듯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음료수 사 가자. 뭐 마실래?”
도라이 선배님은 자연스럽게 냉장고를 열어 맥주에 손을 얹었다. 손가락 끝으로 더듬듯 캔을 매만지더니 그 옆에 있는 맥쿨을 집어 들었다.
“으. 맥주는 안 되겠지. 하온이는 초코우유 마실래? 핫초코는 없거든.”
“……네. 초코우유요.”
내 취향이 저기까지 소문이 났나. 다들 취향껏 음료수를 하나씩 고르자 주인아저씨가 우리를 룸으로 안내했다. 우리는 커다란 사각 테이블을 둘러싼 긴 의자에 각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형, 여기 장사 안 되는데 괜찮은 거예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주인아저씨의 태도가 묘하게 기억에 남아 물었다. 라이 선배님은 ‘아, 그 양반 강남 건물주야. 이건 취미 생활.’이라고 하길래 단번에 납득했다.
“이런 건 역시 막내가 먼저지!”
도라이 선배님이 다윈에게 마이크를 돌렸다. 엉겁결에 마이크를 받아든 다윈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그러다가 이내 선곡한 곡은…….
“신나게 불러보겠습니다. 라이 형의 <블루밍 썸>”
도라이 선배님의 솔로곡이었다. 순식간에 사랑에 빠져 주변을 모두 버리고 한 사람만 보다가 빠졌던 속도만큼 빠르게 식어버린 사랑을 그린 노래. 신나는 거랑은 결이 먼데?
“으하학! 그 곡 신나는 노래 아니잖아!”
내 말이. 블루밍 썸은 록발라드라고 봐야 했다. 아마도 사회생활용 선곡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다윈은 내 예상과 다르게 템포를 무지막지하게 올리더니 예고한 대로 신나게 불러 버렸다. 원곡자인 라이 선배님은 연신 웃느라 테이블을 쾅쾅 두들겼다.
저걸 저렇게 우스꽝스럽게 부른다는 건 절대 사회생활용이 아닌데? 다윈의 재롱인지 묘기 같은 노래에 신이 난 사람들이 벌떡벌떡 일어났다. 다들 미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누가 아이돌 아니랄까 봐 시간이 흐르니 뭔가 군무처럼 되어 가고 있었다.
서로의 동작을 모방하고, 눈치껏 고쳐가며 막춤인데 안무 같은 이상한 춤을 추며 다 같이 웃고 떠들었다. 얼떨결에 끌려 나간 나도 어느새 한 뭉치가 되어 몸을 흔들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죽어도 고 스킬을 쓴 나는 내 모든 걸 내려놓았다. 또래는 항상 어렵기만 했는데, 뭔가 즐거운 것도 같고. 조금 어색했던 처음과 달리 나는 낯선 멤버들과 어울려 신나게 놀고 있었다.
***
“……헉, 헉. 저희 지금 한 시간 내내 계속 춤춘 거 알아요?”
레인이 숨을 헐떡이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도라이 선배님으로부터 어린애 체력이 왜 그 모양이냐는 타박이 곧바로 이어졌다. 가장 많이 뛰고 흔들었으니 지친 것도 이해가 가지.
그보다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니. 너무 흥겹게 논 덕분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나도 내가 이렇게 놀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라이 형은 제 절반밖에 안 뛰었거든요!”
“노노. 내가 더 뛰었지.”
“헹.”
쌩하니 콧바람을 분 레인은 제 앞에 놓인 음료를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저거 탄산인데 잘 마시네.
“꺼억. 헙.”
아이돌도 피해 갈 수 없는 생리현상은 하필이면 노래가 종료된 그 순간에 룸을 가득 채울 듯 크게 울렸다. 잠시 이어진 침묵의 끝은 대폭소였다.
“끄하하핳!”
“레, 레인, 푸흐흫, 레인, 형. 지못미, 캬하학!”
다윈은 저 큰 덩치를 와삭 구긴 채 바닥을 구를 듯 굴었다. 얌전하고 조용해 보였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내 첫인상은 와장창 깨지고 있었다. 다윈은 상당한 비글미가 매력적인 발랄한 소년이었다.
“아! 웃지 마요! 다들 웃지 마! 다윈이 너!”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던 레인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아! 하온 형은 안 웃는 줄 알았는데!”하고 배신감을 토로했다.
미안. 그런데 웃긴 걸 어떡해.
차마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순 없어서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런 내 등에 레인이 덥석 매달려서는 나를 짤짤 흔들었다.
“악! 그렇게 숨죽여 웃는 게 더 싫어어억!”
“아하학, 미안, 으흐, 흑.”
그래도 웃긴 걸 어떡해. 탄산 잘 먹는다고 감탄하고 있었는데 바로 트름이라니. 심지어 소리도 컸다고. 이건 어쩔 수 없다. 내가 웃는 걸 용서해야 한다. 나는 짤짤 흔들리면서도 계속 실실거리며 웃었다.
웃음이 조금 진정이 되었을 무렵, 도라이 선배님이 마이크를 잡았다.
“아아. 여러분 아쉽지만, 이제는 우리가 헤어질 시간입니다.”
“아…….”
다윈이 아쉬움의 탄성을 냈다. 뻘뻘 흘리는 땀 때문인지 유독 야성미가 돋보이는 나위 형도 아쉽다고 말을 얹었다. 저 형도 강현 형처럼 말은 별로 없는데, 놀 때는 화끈하게 잘 놀더라. 역시 다들 춤 좋아하는 걸로는 뒤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노래방에서 한 시간 동안 놀았다고 이게 이렇게 달라지나. 어색해하던 처음과 달리 멤버들에게 정이 들었다. 어쩐지 우리 아크로바틱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선배님과 나위 형이 먼저 룸을 나갔다. 그 뒤를 따르는데 레인이 내 한쪽 팔에 매달려 귀엽게 뺨을 비비적거렸다.
“그럼 이제 다음 연습 때 봐요?”
눈높이가 비슷해서 무릎과 등을 굽힌 레인이 귀여워 웃음이 터졌다. 팀에서도 막내라 그런지 확실히 어리광이 자연스러웠다.
“응. 다음 주에 보겠네.”
조금 뻣뻣한 파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아, 기분 좋다. 형 저 머리 더 쓰다듬어 주세요.”
“……그렇게 좋아?”
다윈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우리 앞에서 기웃거렸다.
“최고야! 하온 형은 좀 힐링계 같아.”
“오오. 그럼 형, 저도 해주세요. 저도.”
“어, 으응.”
다윈이 내 앞에서 무릎을 굽히고 양손을 짚었다.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그게 꼭 영화 속 깡패들이 ‘형님’하고 인사할 때의 포즈와 닮아 있었다. 하지만 순박한 눈은 시골 소년의 것이라 그 언밸런스함에 나는 크게 웃으며 다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와…….”
“어때? 기분 좋지?”
“어! 완전!”
좋아해 주니까 좋긴 한데. 대형견 두 마리를 매달고 있는 기분이다. 그리고 이제는 진짜 나가야 해. 형들이 왜 안 오냐고 난리치겠다.
“얘들아, 우리도 이제 나가자.”
“아쉬워어어…….”
나는 다윈과 레인을 데리고 노래방에서 나갔다. 인적 없고 어둑한 골목에 라이트를 켠 차량 네 대가 줄지어 있었다. 각자 데리러 온 차에 올라타면서도 우리는 서로를 향해 손 흔드는 걸 멈추지 않았다. 나와 도라이 선배님은 세 사람이 떠나는 걸 배웅한 뒤에 차에 올랐다.
“하온이도 회사로 갈 거지?”
“네. 그래야죠. 형도 회사로 가요?”
“응. 우리 애들도 연습 중이야.”
이제 남은 건 언제 스킬을 끄고, 어디서 상태 이상을 보내느냐는 건데. 한 시간이나 놀고 난 뒤에도 한참 떠드느라 시간이 더 늦어져 있었다. 일단 형들 먼저 만나서 무대기획 회의부터 마무리하고, 그다음에 스킬 종료해야 할 것 같네.
이제부터는 시상식 시즌까지 쭉 바쁘게 돌아갈 예정이라 쉬는 날이 없었다. 게다가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상태 이상도 길어지고. 이러다가 페널티라도 걸리면 3일짜리다. 무조건 오늘 종료해야만 했다.
걸어서 10분인 거리를 차 타고 이동했더니 당연하게도 순식간에 도착해 버렸다. 나는 생각을 채 마무리하기도 전에 주차장에서 내려야만 했다.
도라이 선배님과 헤어져 연습실에 가기 전에 잠깐 화장실에 들렀다. 그러다 문득, 번개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욕조에서 몸 담근다고 하면 되겠네. 그럼 1시간 정도는 확보할 수 있고, 상태 이상은 30분이니까 충분했다. 나는 한층 가벼워진 마음으로 연습실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