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90화 (290/320)

290.

영상이 끝나자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들렸다. 이거 연습하면 다른 건 연습하기 힘들 것 같다는 투정도 간간이 들리는 걸 보니, 내 눈에만 어려워 보이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형은 뭐 하고 싶어요?”

나만큼 흥분한 것 같은 강현 형은 정말 신중히 고민하는 듯 보였다. 조금 전 봤던 안무를 복기하듯 눈을 내리깐 채 한참 뜸을 들이던 형이 말했다.

“나는 천. 아니, 아크로바틱도 좋아 보이는데. 마지막 건 내 스타일이랑 안 맞고……. 일단 천. 천으로 하는 게 제일 마음에 들어.”

이렇게 신나 보이는 강현 형 오랜만이다. 괜히 내가 다 기뻐서 방긋거리고 있었더니 형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온이는? 뭐 하고 싶어?”

“음. 마음에 드는 게 하나 있긴 한데, 형 의견도 궁금해요. 제가 뭐 하면 좋을까요?”

강현 형은 자신이 할 안무를 고를 때처럼 신중하게 고민했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기대됐다.

“하온이는 원래 춤 선이 우아하고 예뻐서 마지막 안무하면 잘 어울릴 거야. 하지만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면, 아크로바틱이 낫겠지. 좀 위험해 보이긴 하지만.”

길게 말한 강현 형은 마지막으로 “내가 맞췄어?” 하고 물었다. 나는 개구쟁이라도 된 것처럼 눈과 입꼬리를 바짝 치켜세우며 대답했다.

“네. 저 아크로바틱이 하고 싶어요.”

강현 형은 그럴 줄 알았다며 웃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정하는 걸까. 하고 싶은 거 하게 해주는 건가. 그러다가 한 종류에 많은 사람이 몰리면 연차 순으로 잘리려나. 그럼 내가 불리한데…….

“그럼 지금부터 각 안무 별로 구성된 멤버를 호명하겠습니다.”

열심히 고민한 보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선택권은 없었구나.

제일 먼저 천 안무부터였다. 군인 느낌이 가득한 안무다 보니 호명되는 사람들은 다 선이 굵고 파워풀한 춤을 추는 사람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백강현 씨.”

“네.”

강현 형은 응원하듯 나를 본 뒤 이동했다. 같이 무대에 서게 될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게 보였다. 이어서 두 번째. 내가 하고 싶었던 안무라서 괜히 긴장됐다.

꼭 내 이름을 불러주길…….

두 손을 꽉 잡고 리처드 선생님의 입을 뚫어지게 봤다. 진하온 불러라. 진하온. 진하온. 진하온. 염원을 담아 쏘았더니 갑자기 선생님과 눈이 딱 마주쳤다.

“……진하온 씨?”

“네!”

나다! 활짝 웃으면서 한 발짝 나서는데 선생님은 손바닥을 들어 보이면서 나를 저지했다. 아, 아닌가? 나는 엉성하게 발을 내디딘 채로 멈춰선 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온 씨는 세 번째 팀으로 예정했는데…….”

“……아.”

그래. 그렇군. 그네를 타고 정점에 올랐다가 단번에 바닥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괜히 설레발을 쳤어. 그런데 왜 헷갈리게 내 이름을 불러서는…….

“이 안무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어쩌면 기회를 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뜸 들이지 않고 얼른 대답했다.

“네! 꼭 해보고 싶어요.”

나는 가타부타 말을 덧붙여서 어필하는 것보다 의지를 담은 한 마디에 모든 걸 걸었다. 이미 내 태도에서 간절한 마음이 느껴졌기에 나를 부르신 걸 테니까.

“흐음.”

리처드 선생님이 들고 있던 패드를 봤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선생님의 손가락이 패드 위에서 휘적거리는 걸 긴장된 마음으로 지켜봤다.

“괜찮겠네요. 진하온 씨는 두 번째 팀으로 오시죠.”

“와! 감사합니다!”

너무 기쁜 마음에 잔뜩 흥분한 심정이 목소리에 고스란히 담겼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튀었다. 리처드 선생님까지 웃고 계시네……. 멍청한 행동으로 주목받았다는 생각에 금세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래도 발을 움직이는 건 멈추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먼저 호명된 사람들이 하나 같이 날 보고 웃고 있었다. 멤버 중에 친분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이 정도면 첫인상 대차게 말아 먹었다고 봐도 되겠지…….

“마지막 멤버는 도라이 씨.”

헐. 선배님이다! 선배님은 곧장 내게 오셔서 어깨를 확 끌어안았다.

“우리 뉴삐, 형아랑 잘해보자?”

갑자기 엄청 든든한데. 나는 신나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

본격적인 연습을 하기에 앞서 잠시 쉬는 시간이 생겼다. 우리 팀에서 가장 연차가 오래된 도라이 선배님이 사람들을 한데 모았다. 가볍게 서로 통성명을 하며 나이를 밝혔다. 어떻게 동갑이 한 명도 없지.

“뭐 고민할 거 없이 다들 형, 동생 하면 되겠네. 편하게 형이라고들 불러.”

하지만 대선배님을 편하게 형이라고 부르긴 어렵겠지. 아니나 다를까 다들 주저할 뿐 쉽게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테오스와 연차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시그널의 나위 선배님이 “잘 부탁드립니다. 형.”하고 말했을 뿐이었다.

나도 좀 애매한 게, 막내인 다윈은 나보다 후배니까 편하게 대할 수 있는데, 레인은 18살이지만 레인이 속한 크로스트는 우리보다 선배인 그룹이었다. 이 바닥 족보 꼬이기 참 쉽다니까. 그래도 선배는 선배라고 불러야겠지.

“하온 형. 형도 저 불편해하지 말고 편하게 레인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런데 선배님이 먼저 내게 손을 내밀었다. 파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레인은 머리색만큼이나 청량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 그래도 선배님이신데.”

“괜찮아요. 형이 저한테 선배라고 하면 저도 어색해서. 하핫.”

레인이 콧등을 검지로 긁적이며 웃었다.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던 도라이 선배님은 “얘들아, 잠깐 모여 봐.”하고 이목을 집중시켰다. 선배님은 사람들을 둘러보고는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다들 우리 안무 봤잖아.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 아무도 다치지 않고 할 수 있어. 유대감이 필요하단 말이야. 유.대.감. 그러니까 호칭으로 어색해하지 말고, 어려워하지 말고, 임시라고 생각하지 말고. 진짜 내 그룹이라고 여겨야 해.”

대뜸 형이라고 부르라고 시킨 건 다 이유가 있었구나. 그냥 친화력이 좋아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그런 이유로 오늘 연습 끝나고 스케줄 있는 사람?”

다들 서로의 눈치만 보는 사이 내가 손을 올렸다.

“……저요.”

“뭔데?”

“멤버들이랑 무대 기획 하기로 했어요…….”

“그럼 좀 늦어도 되는 거지?”

그, 그러면 안 되는데. 멤버들한테도 미안하고, 내 체력도 곤란해진다.

“오래는 안 걸려. 딱 한 시간.”

“아, 그럼 저는 됩니다.”

다들 한 시간 정도의 여유는 있는 건지, 아니면 차마 거절할 수 없기 때문인지 나를 제외한 모두에게서 승낙의 말이 나왔다. 도라이 선배님이 웃는 얼굴로 나를 압박해 왔다.

“우리 뉴삐가 설마 형아를 부끄럽게 하지 않겠지? 직속 후배인데?”

“조금 전에 진짜 내 그룹이라고 생각하라면서요…….”

“어허.”

도라이 선배님은 짐짓 근엄한 척하며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게 부담스러워서 상체를 뒤로 젖히며 어쩔 수 없이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게요.”

이후 분위기는 거의 친목을 목적으로 한 사담 위주로 흘러갔다. 그러다가 쉬는 시간이 끝나갈 무렵,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한두 명씩 흩어졌다. 나는 그사이에 얼른 강현 형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강현 형!”

시간이 없어서 빠른 걸음으로 종종거리며 뛰다시피 걸었다. 내 목소리를 들은 형이 나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온아.”

“형, 저 라이 형이랑 같은 그룹이거든요.”

“응. 알지. 형이랑 같이 있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왜?”

나는 비극적인 소식을 전하는 사람처럼 눈썹을 축 늘어트리고 말했다.

“연습 끝나고 1시간 정도, 시간을 내달래요. 화합, 친목. 뭐 그런 걸 한다고…….”

“아아. 좀 늦는다는 거지? 멤버들한테는 내가 설명할게. 괜찮으니까 천천히 있다 와.”

당연히 내 상황을 모르기에 강현 형은 내가 부담 갖지 않도록 배려해 주고 있었다. 그게 고마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억지로라도 데려가 줬으면 하는 마음이 충돌했다. 온종일 나를 신경 쓰이게 한 체력은 지금 30%밖에 남지 않았다.

연습 끝나고 나면 아슬아슬해질 것 같은데, 거기에 1시간이나 더 밖에 있어야 한다고? 이제 고민해야 하는 건, 예정된 상태 이상을 어디서 보내느냐에 대한 문제였다.

“우으…….”

형들한테 미안한 마음과 상태 이상에 대한 부담 때문에 나는 강현 형한테 안기듯 기대면서 칭얼거렸다. 형은 나를 토닥여주며 미소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우리끼리 하고 있을 테니까.”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지만…….

“……네에.”

***

나에게만 가혹하게도 그룹별로 별도의 연습실이 제공됐다. 같은 공간에서 연습한다고 하더라도 강현 형한테 기대서 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공간까지 분리되니까 왠지 체력이 더 훅훅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기분 탓인 거 알지만, 그냥 느낌이 그런 걸 어떡하냐고.

리처드 선생님의 지휘 아래에서 제각각 포지션을 나눈 뒤 본격적인 연습이 시작됐다. 다들 퍼포먼스 담당 멤버들이라 안무 습득력이 빨라서 진도가 쭉쭉 빠지고 있었다. 그만큼 내 체력도 쭉쭉 빠지고 있었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은 기본적인 동선과 동작만을 습득한다는 거였다. 본격적으로 서로 들리고, 던져지고, 돌려지고 하는 건 다음 연습 때라고 한다. 오늘 그나마 체력을 5%라도 남긴 건 그 덕이었다.

이제부터 1시간인가. 얌전히 앉아서 대화만 하면 그래도 상태 이상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달콤한 음료랑 디저트 같은 것도 먹으면 더 괜찮고. 어떻게든 돌려본 희망 회로는 도라이 선배님이 데려간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앞에서 좌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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