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
식어가는 손가락처럼 차가운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 감각이 선연해서 목덜미까지 냉기에 붙잡힌 것만 같았다. 온몸이 내게 불안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거였구나. 그 빌어먹을 범죄자가 나한테 담기고 간 흔적이.
기억을 되짚어 보며 깨닫는 것과 머리로 아는 것. 그리고 실제로 경험하는 건 느낌이 달랐다. 실제로 느끼는 건 더욱더 고약하고 불쾌했다. 이대로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쳐 당장이라도 안락함을 얻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굴복하면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거지. 나는 김혜미 실장님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불안을 인정하고 안고 가거나, 마주 보고 극복해야 한다고.
나는 손바닥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내 의지와 달리 잔뜩 몸이 움츠러들어 떨리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진정하고 잘 생각해 보자.
저 사람들은 내게 해를 끼치지도 않을 거고, 저들 때문에 멤버들과 헤어지는 건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성과 상식으로 판단하자고.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나는 굳은 마음을 먹고 숨을 들이쉬었다. 저들 틈에 섞이는 거다. 그게 바로 정면 돌파 아니겠어. 뚝뚝 떨어지는 체력이 신경 쓰였지만, 오늘은 각오를 좀 다져야 할 것 같았다. 죽어도 고 스킬을 쓰더라도 내 트라우마를 향해 한발 다가가 보자.
유연이의 가족들도 그랬잖아. 나를 찾는다는 어머니의 연락을 무조건 돈 때문이 아니겠냐고 판단했었다. 정말 어머니로서 아들이 그리워서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직접 겪고 나서야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거잖아.
그리고 그 행동 덕분에 그들에 대한 내 감정을 떠나, 최소한 가족 때문에 발목 잡힐 일은 없을 거라는 안도는 얻을 수 있었다. 찾아가지 않았다면 절대 알 수 없었겠지.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야.
트라우마가 아니더라도 후배 된 도리로서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을 해야 했다. 먼저 인사하고, 살갑게 굴어보자. 분명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나는 자꾸만 걷기 싫어하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줘 삼삼오오 모여있는 사람들 틈으로 다가갔다. 눈이 마주치는 족족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내 긴장이 무색하리만치 살가운 인사가 돌아왔다.
다들 이번에 내가 찍은 광고에 대해 주로 이야기를 했다. 정말 인물에는 CG 하나도 없이 메이크업만으로 남자와 여자를 표현한 건지 등의 질문부터 광고 잘 되어서 축하한다는 인사까지. 신기하게도 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하나하나 대답해주며 조금씩 긴장이 풀려가는 걸 느꼈다. 지금 괜찮아졌다고 다음에도 괜찮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지금처럼 하면 언젠가 잊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런 긍정적인 사고가 나를 웃게 했다.
“뉴삐야!”
헛. 나는 얼른 나를 부른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도라이 선배님이다! 아, 강현 형이랑 같이 있었네. 아는 얼굴들이 반가워 한달음에 두 사람을 향해 냅다 뛰었다.
“선배님!”
“어허, 그거 아니지. 아니랬지?”
“혀, 형!”
“올치!”
교육받는 하룻강아지가 된 기분이었지만, 나쁘지 않아서 헤실헤실 웃었다. 도라이 선배님은 나와 강현 형을 데리고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었다. 이미 나와 인사를 끝냈다는 선배님들의 말에 도라이 선배님이 기특하다며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셨다.
한참 즐겁게 이야기하는 도라이 선배님을 구경하며 뒤에 서 있을 때, 강현 형이 내 어깨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 하온이, 그…….”
조심스러운 목소리는 주변 눈치가 보이는지 한껏 낮아져 있었다. 그런데도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차마 뱉지 못하고 짓씹는 게 보였다. 누가 어떻게 들을지 모르니 조심하는 게 당연하긴 해.
“저 괜찮았어요.”
그렇게 말하며 방긋 웃었는데, 형의 미간은 여전히 미세한 주름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형이 나를 보고 있질 않네? 어딜 보는…….
형의 시선 끝에는 가늘게 떨리고 있는 내 손이 있었다. 되게 웃기네. 이게 왜 아직도 떨리고 있지? 이러면 내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 아니야.
“미안해. 하온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라이 형이 끌고 가는 바람에.”
강현 형의 손끝이 내 손가락에 닿았다. 잡아도 되는지 망설이듯 톡톡 건드리는 감촉이 간지러웠다. 나는 대뜸 형의 손가락 사이에 내 손가락을 끼워 넣어 맞잡았다. 그 바람에 놀란 건지 순간 강한 악력이 느껴졌다가 금세 풀렸다.
“사실 조금 무섭긴 했거든요. 근데 가만히 있으면 언제까지나 그럴 것 같아서 저 움직였어요. 결과는 좋았고요. 손 떨리는 건 그 흔적.”
지금은 완전 괜찮다는 말을 덧붙이며 나는 형을 보고 웃었다.
또 형이 저렇게 웃는다. 씁쓸하고 외로워 보이는 미소. 예전에는 강현 형이 웃기만 해도 심장이 벌렁거릴 정도로 멋있었는데, 왜 달라진 거지. 내가 이렇게 만든 건가.
나는 맞잡은 손을 물끄러미 내려봤다. 이제 이런 식으로 접촉하면 안 되는 걸까.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건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학습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나는 그게 결핍되어 있기에 내가 하는 행동이 잘하는 건지, 잘못하는 건지 때로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형, 이런 거 부담스러워요?”
모르면 물어보는 수밖에. 나는 깍지 낀 손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솔직하게 대답해줄 것 같은 강현 형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왜?”
“음. 그냥 그런 것 같아서요.”
강현 형은 맞잡은 손을 내려 보다가 내 귓가에 바짝 입술을 가져다 댔다.
“지금은 상관없지만,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나랑은 이러면 안 돼.”
“왜요?”
“그 사람이 싫어할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형은 허리를 세웠다. 본인 할 말만 하고 가버리다니. 나는 형의 어깨를 짚고 뒤꿈치를 세웠다. 형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형의 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댔다.
“그럴 사람이면 제가 좋아하지 않을걸요.”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나와 멤버들을 갈라놓을 순 없다. 나는 콧김을 뿜으며 강현 형을 올려봤다. 형은 의외의 대답을 들은 것처럼 조금 놀란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선명한 미소를 띠었다. 내가 좋아하는, 심장이 요란스럽게 두근거리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렇겠네.”
으……. 이제 외로워 보이지 않는 건 좋은데 페로몬을 너무 마구 뿌려대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극단적일 필요가 있냐고. 정말 심장에 해로운 형이라니까. 나는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 도라이 선배님과 눈이 딱 마주쳤다. 마치 갈망하던 장난감을 손에 넣은 아이와 같은 짓궂은 미소가 만면 가득 떠올랐다.
“뭐야, 뉴삐랑 삐약이! 왜 둘이서만 속닥거려. 무슨 얘기 했어? 응?”
“삐약이라고 하지 말라니까요.”
신경질적인 강현 형을 완전히 무시한 도라이 선배님은 내 쪽으로 다가와 냉큼 귀를 들이밀며 자기 귀를 찌를 듯 가리켰다. 나는 그런 선배님에게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속닥거렸다.
“여기 모인 사람 중에 라이 형이 제일 멋있는 것 같다고 했어요.”
선배님은 내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분 좋다는 듯 으하하, 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만큼 큰 소리가 내 등에서 똑같이 나고 있었다.
“우리 뉴삐가 사회생활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한다니까! 아하학!”
“아, 아파요. 아! 아!”
농담 아니고 진짜로.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등이 따갑고 얼얼했다.
“형. 하온이 그만 때려요.”
“이게 때리는 거냐? 예뻐하는 거지. 그치, 하온아? 하나도 안 아프지?”
나는 필사적으로 선배님의 팔을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아파요, 진짜. 정말. 너무.”
“그, 그래? 미안…….”
“괜찮아요…….”
얼얼한 등에 손이 닿지 않아 꼼지락거리고 있으니 강현 형이 내 등을 쓸어줬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우릴 보던 도라이 선배님은 깍지 낀 손에 뒤통수를 기대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형이나 동생이나. 너희는 왜 그렇게 서로 애틋하냐. 유별나다고 해야 하나, 특별하다고 해야 하나.”
“저희가 드러나지 않은 일이 좀 많았잖아요. 애틋해질 수밖에 없죠. 특히 하온이는 더 그래요.”
강현 형도 아무렇지 않게 응수하며 계속 내 등을 살랑살랑 쓰다듬어 주었다. 오오. 체력이 차고 있어. 강현 형이 주는 포근함에 한껏 기대며 어리광을 피우는 사이 안무가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짙은 블론드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거의 서부 영화에 총잡이로 나올 것 같은 그런 분위기랄까. 왁자하던 공간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안녕하세요. 리처드입니다.”
멋들어진 콧수염이 움직이며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유창한 한국어가 튀어나왔다.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나라고 다르진 않았고.
“한국에 온 지 12년 되었으니 한국어는 자신 있습니다.”
목소리만 들으면 외국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한 발음이었다. 그게 언밸런스 해서 꼭 더빙된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총 세 가지의 안무를 가져왔습니다. 여러분은 각 안무 그룹별로 연습을 하게 됩니다. 일단 영상부터 보시죠.”
그렇게 틀어준 안무는, 왜 여기가 퍼포먼스 팀이라고 불렸는지 알 수밖에 없는 난이도였다. 들고 다니기만 해도 힘들 것 같은 길고 넓은 천 하나를 절제된 군인처럼 활용하는 안무, 아크로바틱 동작이 많아 화려하고 풍성해 보이는 안무, 무용이나 발레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안무까지.
쉬워 보이는 게 하나도 없다. 나는 들어차는 호승심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세 개의 안무 중 내 마음에 꽉 차는 게 딱 하나 있었다.
재밌겠다! 빨리 배우고 싶어서 저절로 몸이 들썩거렸다. 그리고 어쩌면 춤 스탯의 한계를 돌파한다는 콩고물이 떨어질지도 모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