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88화 (288/320)

288.

“야야, 적당히 해라. 애 잡겠다.”

서운 선배님이 준 선배님의 어깨를 잡았다. 그제야 준 선배님이 품에 가둬둔 나를 풀어줬다.

“임마, 넌 항상 과격해서 탈이야. 그러니까 애들이 맨날 도망 다니지.”

“우리 애들은 쪼끄만 것들이 요리조리 잘 피해 다니잖아. 하온이는 잡으면 잡는 대로 잡히니까 잡는 맛이 있다고 해야 하나?”

“우리가 형을 하루 이틀 봐? 그걸 잡히게? 그보다 하온아 괜찮아? 어우, 저 무식한 인간.”

텐스타의 막내인 다인 선배님이 나와 준 선배님 사이로 끼어들었다. 막내여도 유찬 형보다 나이가 많은 형인데, 아담하고 동글동글한 인상이라 귀엽게만 보였다. 무엇보다 마약 멤버도 아니고.

“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으윽. 하온이는 여전히 귀엽구나…….”

다인 선배님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올려봤다. 그러자 서운 선배님이 코웃음을 쳤다.

“야, 누가 누굴 귀여워하냐?”

내 말이. 여기서 제일 귀여운 사람이 나보고 귀엽다네.

“엘베 왔다. 가자, 가자.”

준 선배님이 나와 다인 선배님을 한꺼번에 끌어안고 연행하듯 엘리베이터에 태웠다. 다인 선배님이 빽빽 소리를 질렀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진짜 누구에게나 이러는구나.

하지만 이번에는 한 번에 두 사람을 포획했기에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다. 나는 슬쩍 상체를 숙여 빠져나와 잽싸게 서운 선배님 뒤로 휙 숨어 버렸다. 이 사람도 마약 멤버가 아니다. 게다가 아추대에서 강현 형이랑 씨름할 때 막상막하의 경기력을 보여줬던 믿음직한 사람이다.

“오. 내가 선택받은 모양인데?”

서운 선배님이 히죽거리며 준 선배님을 도발했다. 그는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 어떻게 나를 버리고……! 나랑 제일 친하잖아, 하온아!”

“저희 안 친한데요…….”

“허…….”

내 진심을 담은 농담에 준 선배님을 제외한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장난치는 분위기라 하고 싶은 말을 농담처럼 내뱉었더니 속이 다 시원하다.

“그런데 하온이는 왜 우리 회사에 왔어?”

다람쥐 같은 다인 선배님이 얇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아, 저 스칼렛 선배님들 연습실 찾아왔어요.”

“아…….”

갑자기 날 보는 다인 선배님의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왜 저런 눈으로 보지……. 마치 나를 애잔하게 보는 듯한, 그런 느낌인데.

“힘내. 시간은 가고 결국 끝이 오니까.”

“……네?”

다인 선배님의 말뜻을 영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철학적인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뭘까. 정말 불길하게.

“흐흫흑. 인형 놀이한다고 좋아하겠네.”

서운 선배님이 고개를 돌린 채 어깨를 떨며 웃고 있었다. 어째서? 이 사람들 반응이 왜 이렇지? 짐작 가는 건 스칼렛 선배님들과 관련이 있다는 건데…….

“아! 하온이 보러 가고 싶은데 그 마녀들…….”

준 선배님이 양팔을 붙잡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 순간 스칼렛 선배님들에 대한 호감도가 확 올라갔다. 뭐야. 저 사람이 싫어하는 거면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런 근거 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목적한 층에 도착했다.

“아, 선배님들. 저는 가보겠습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선배님들이 제각각 내게 손을 흔들어줬다.

***

스칼렛 선배님들은 나를 보자마자 ‘루비 소년’이라고 외쳤다. 오랜만에 들어 보는 별명이네. 선배님들은 친화력이 어마어마했다. 분위기 걱정할 필요가 없었네.

오히려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목소리에 정신이 혼미했다. 이것저것 질문을 받은 것 같은데,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분이 말을 걸어서 제대로 대답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마냥 좋다며 웃어주시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정신없던 시간은 스칼렛의 리더인 사피 선배님이 박수를 두 번 치는 것으로 끝냈다. 이제 좀 제대로 된 회의가 시작되려나 봐. 우리는 연습실 중앙에 동그랗게 둘러앉았다.

“원래는 기존 우리 파트를 하온이한테 나눠 주려고 했는데, 아예 6인으로 안무 수정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바꿨어. 그래서 오늘은 곡만 정할 거야. 다들 오케이?”

“예이!”

“응!”

다른 선배님들이 시원하게 대답했다. 곡만 정하는 거면 오늘은 일찍 끝날지도 모르겠네. 태평하게 생각하고 있는 내 쪽으로 선배님들의 시선이 모였다. 놀라서 어깨를 움츠리자 사피 선배님이 방긋 웃으며 나를 불렀다.

“자, 그러면 하온아?”

“네, 네?”

“우리가 몇 곡 추리긴 했거든. 그리고 하온이가 오기 전에 우리끼리 정한 게 있어.”

“……그게 뭔데요?”

사피 선배님의 미소가 훨씬 짙어졌다. 메인 댄서인 사피 선배님의 강렬한 인상이 묘한 압박으로 다가왔다.

“하온이한테 제일 잘 어울리는 무대 의상으로 곡을 고르자고.”

“……아. 구,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다고 말하기도 전에 마린 선배님이 불쑥 끼어들었다.

“거절은 거절한답!”

“우선 옷부터 입어볼까? 루비 옷을 입혀보고 싶긴 한데 루비가 너무 말라서 안 맞을 것 같더라고.”

사피 선배님은 가볍게 일어나서 연습실 구석으로 총총 걸어가셨다. 그제야 내 눈에 흰 천에 덮인 이동식 행거가 보였다. 저게 왜 저기 있을까, 란 의문을 가지면 멍청한 거겠지. 천 밑으로 삐져나온 의상이 한두 벌이 아닌 것 같아 저절로 몸이 떨렸다.

“그래서 내 걸로 준비했어.”

사피 선배님은 행거에 덮인 천을 거둬내며 말했다. 걸그룹의 화려한 무대 의상이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스칼렛은 청순과는 거리가 먼 그룹이라 천의 면적이 좁은 옷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어, 사, 사피 선배님 옷도 제게는 작지 않을까요?”

그래도 내가 남자인데. 내 몸으로 걸그룹 옷을 입는 것은 조금 힘겹지 않을까. 사피 선배님은 눈대중으로 나를 훑어보다가 갑자기 내 허리를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

“……!”

놀라서 입을 벌리는 나를 향해 선배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을 뗐다.

“이 허리면 맞을 것 같은데. 내가 좀 통뼈거든.”

사피 선배님은 평이한 어조로 말하며 행거에서 옷을 한 벌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걸 내 품에 안겨준 뒤 산뜻한 미소와 함께 “갈아입고 와.”하고 말했다. 리더라서 그런가. 묘하게 거절하기 어려운 기세가 느껴졌다. 애초에 거절할 수도 없고 말이지…….

그렇게 내 옷 갈아입기 쇼가 시작됐다. 선배님들의 준비성이 얼마나 좋은지 이동식 탈의실까지 연습실에 가져다 두셨더라. 확실히 허리는 맞았지만, 전체적으로 끼는 느낌이었다. 허리라도 숙이면 어딘가가 찢어질 것 같은…….

“역시 좀 작은데요…….”

“아악! 너무 예쁘자나!”

“일단 사진 찍자, 사진!”

나중에 비교해 보려면 사진이 있어야 한다며 선배님들은 나를 열심히 찍어댔다. 그리고 ‘다음!’을 외치셔서 어정어정 탈의실로 들어가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갈아입고, 다시 갈아입고, 또 갈아입고, 갈아입고, 갈아입고…….

왜 서운 선배님이 인형 놀이라고 했는지, 다인 선배님이 결국 끝이 올 거라고 했는지 너무 절실히 이해해 버렸다. 정말이지 춤추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가뜩이나 모자란 체력이 빠른 속도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어우, 전부 다 너무 예쁘다. 진짜 뭐 하지? 나 못 고르겠어!”

“난 체크 포인트가 좋을 것 같은데.”

루비 선배님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체크 포인트 의상이 어떤 거더라. 솔직히 이제는 뭘 어떻게 해도 상관없었다. 그냥 이 시간이 끝나기만을 바랄 뿐…….

“확실히 하온이 피부가 하얘서 레드가 어울리긴 해.”

“응. 의상도 지금은 사피 언니 거로 입었는데 나랑 비슷하게 맞춘 걸로 제작하면 더 예쁠 거야.”

“아, 맞네! 루비 언니랑 컨셉 맞출 거지?”

마린 선배님이 빠르게 손뼉 치며 까르르 웃었다. 이외에 몇 곡이 후보에 올랐지만 결국 최종 결정은 루비 선배님의 의견인 체크 포인트로 결정됐다.

“봐봐. 내 의상 이거거든.”

밑단이 레이스로 된 레드와 블랙 체크무늬의 짧은 스커트와 끈으로 조이는 검은색 가죽 코르셋. 그리고 가터벨트 조합이었다.

“참고로 뒤는 등 부분이 터져서 끈으로 고정하는 건데.”

“……아.”

“하온이에게 맞춰서 제작하면 정말 예쁠 거야.”

루비 선배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고운 눈을 더 곱게 접으셨다. 다섯 분 중에 가장 말씀이 없던 캐럿 선배님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이거 혹시 스포해도 되나? 우리 릴댄 찍는 거 어때? 다섯 번째 멤버 빠지고, 첫 번째 멤버가 아닌 하온이 뒷모습 딱 나오면서 끝나는 거. 순서는 먼저 하는 멤버들은 상관없고, 루비 다음에 하온이면 좋겠다.”

“헐, 나 완전 좋아!”

사피 선배님이 비하인드를 찍는 방송국 감독님께 스포해도 되는지 물었다. 카메라가 위, 아래로 느릿하게 끄덕여졌다.

“좋아! 그럼 곡은 체크 포인트로 픽스. 안무 수정은 한 일주일쯤 걸릴 것 같거든. 본격적인 연습은 그 이후에 하고, 스케줄 따라 일주일에 최소 한 번 이상 만나서 연습하는 걸로. 릴댄은 의상 나온 뒤 촬영하면 될 것 같은데 하온이 괜찮아?”

한 번에 정리해서 쏟아내듯 말하는 사피 선배님의 말을 열심히 경청하고는 끄덕거렸다.

“네. 전 괜찮아요.”

“오케이. 그럼 안무 나오면 다시 연락할게.”

그렇게 기가 쪽 빨린 채 스칼렛 선배님들과 헤어졌다. 나는 거의 죽기 직전의 물고기처럼 흐느적거리며 주차장을 향했다.

오늘 진짜 체력 관리 안 되네.

그래도 퍼포먼스 팀에 합류하면 강현 형이 있을 테니까 형한테 의지할 수 있겠지. 그러나 막상 도착하고 보니 내 예상과 다르게 강현 형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곳에서 이미 대기하고 있던 낯선 사람들의 시선에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다들 아이돌이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손끝에서부터 열이 사라져 차갑게 식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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