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
강현 형은 다른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서 풍겨오는 분위기가 꼭 미풍에 흔들리는 갈대숲에 혼자 있는 것 같았다. 쓸쓸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한 그런 이중적인 느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우리 눈치 보지 말고 직진해.”
으응? 갑자기 왜 이런……. 조금 전까지 내 멍청한 행동에 웃고 있지 않았나? 하지만 별일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넘기기에는 형의 태도가 너무 진지해 보였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우리를 위해 하온이가 자신의 감정을 자각해도 숨기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가? 나는 형들한테 빨리 답을 주고 싶어서 계속 고민하고 있었는데.
“저는 형들을 빨리 자유롭게 해주고 싶은 쪽인데…….”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 어떤 건지 경험하게 되면, 하온이 성격상 우리를 매몰차게 대할 수 없을 것 같거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취급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맞는 말이라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그렇긴 하지. 내가 멤버들을 좋아하는 건 어린아이가 친구를 좋아하는 감정과 마찬가지였다. 어떤 아이도 사탕과 진심으로 사랑에 빠지진 않으니까.
누군가를 특별하게 좋아하게 되었을 때 드는 감정을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나는 사랑에 빠진다는 감정이 가늠되질 않았다. 사랑 노래는 많이 불러봤고, 들어도 봤으니 나도 텍스트로는 그게 어떤 건지 안다. 설레고 두근거리고, 계속 생각나고 보고 싶은…… 정이한?
잠시만. 나 오늘 정이한 보고 계속 두근거리지 않았나? 조금 전에도 얼굴 보다가 잠이 달아나는 것 같아서 나온 거잖아. 그럼 내가 정이한을 좋아해?
아니야. 뭔가 아닌 것 같은데. 오늘은 좀 특수한 상황이었잖아. 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알쏭달쏭했다. 일단 잘 모르겠으면 아닌 거 아닌가. 보통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화악, 하고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던데.
“사랑에 빠지면 어떤 기분인데요?”
“내가 거기까지 도와주진 못하겠다. 직접 경험해 보면 알아.”
강현 형은 그렇게 말하며 식탁을 두 손으로 짚고 일어났다.
“우, 너무해요.”
궁금증만 만들어 놓고 이렇게 퇴장하시나. 내가 볼을 부풀리자 형은 웃으면서 내 어깨를 가볍게 툭, 두들겼다.
“우유 다 식었겠다. 얼른 마셔.”
강현 형은 나만 남겨 두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형의 말대로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우유를 마시며 나는 내가 정이한을 좋아하는 건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이서호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고, 정이한과 키스……,
으. 으윽. 그런 부끄러운 짓을 어떻게 해!
나는 남은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마신 뒤 빈 컵을 내려놓았다. 역시 아닌 것 같아. 조금 찜찜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뒷정리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갔다.
정이한은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일단 잠을 청하려고 조용히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많은 생각의 파편들이 어지러이 쏟아져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내 마음과 형들의 마음, 교주의 회귀 목표, 특별 무대, 메인 미션에 대한 생각들이 들쑥날쑥 머릿속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길 반복했다.
이대로 밤을 꼴딱 새우는 건 아니야? 그럼 체력 회복이 안 되고, 체력 회복이 안 되면 합동 무대 연습은 어떡하지?
자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바심이 나서 오히려 정신이 더 말똥말똥해지는 것 같았다. 눈은 뻐근하게 아픈데 왜 잠을 못 자는 거야. 이런 괴로운 경험은 거의 없었기에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잠 좀 자자. 잠 좀.
“하오, 온아…….”
으어, 깜짝이야. 나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움켜쥐고 정이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 잠꼬대였어? 내가 깨운 줄 알았네…….
도대체 무슨 꿈을 꾸길래 내 이름을 부른 거야?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정이한의 표정이 궁금했다. 어떤 얼굴로 꿈을 꾸고 있을까. 좋은 꿈인가. 그랬으면 좋겠는데. 반쯤 감은 눈으로 멍하니 정이한을 바라보다 가만히 오르내리는 가슴의 인영을 보면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새벽녘의 고요함이 정이한의 숨소리를 강조해주는 것 같았다. 일정한 호흡 소리를 듣다 보니 웃기게도 정이한이 랩퍼가 맞구나 싶었다. 어떻게 숨 쉬는 소리도 이렇게 일정…….
***
알람이 울리는데도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나는 거슬리는 알람을 5분 뒤로 미루고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랬는데…….
“하온아. 이제 일어나야 해.”
정이한이 나를 흔들었다. 아직 5분 안 지났는데?
“좀 더 잘래요……. 오 분 뒤에…….”
“지금 8시 30분이야.”
……응? 몇 시라고?
“네? 뭐라고요?”
나는 놀라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순식간에 잠이 확 달아났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걸린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지며 소리를 냈다.
“에고.”
정이한이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서 내게 건네줬다. 충격을 받고 켜진 휴대폰 액정에 8시 31분이라는 시간이 선명했다.
“아니, 저 왜? 분명 5분 뒤에 다시 울리는 걸로 맞췄는데…….”
“안 그래도 7시부터 계속 울리더라고. 피곤한 것 같아서 정곤 형한테 물어보니까 8시 30분에 깨워도 된다던데?”
나는 황망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일단 씻고 나올게요.”
형들 오늘 힘내라고 든든하게 아침 차려 주려고 했는데 물 건너갔네. 딱 5분만 더 잔다는 게, 어떻게 1시간 30분을 더 자냐. 이게 말이 되나.
평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씻고 나오니 고소한 버터 냄새가 위를 자극했다. 헨젤과 그레텔이 과자 성에 이끌린 것처럼 나도 냄새를 따라 부엌을 향했다.
“시간 없는 것 같아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걸로 준비했어. 토스트 괜찮지?”
뒤집개를 들고 있는 정이한이 성스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완전 좋죠. 원래 제가 아침 차리려고 했는데…….”
“그런 것 같아서 일부러 더 안 깨웠지.”
“다른 형들 아침은요?”
정이한은 쓰레기통의 달걀 껍데기를 가리키며 웃었다.
“토스트 먹였어.”
“그럼 저 때문에 새로 만드는 거예요?”
“막 구워야 맛있잖아. 바삭하고.”
이건 좀, 감동인데. 베이컨에 계란 프라이가 얹어진 토스트가 내 앞으로 배달되었다. 한 입 크게 베어 먹었더니 아삭, 하는 소리가 났다. 토스트는 고소하고, 달콤하고, 짭조름한 맛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져 있었다.
내가 토스트 하나를 순식간에 뚝딱 해치우는 사이 정이한은 드라이기를 들고나와 대기했다. 거실 소파를 툭툭 두들기길래 냉큼 가서 앉았다. 소파 등받이 뒤에 선 정이한이 장난스레 말했다.
“손님, 머리 말려드릴게요.”
“아하하. 잘 부탁드립니다.”
“맡겨 두세요.”
위이잉-.
뜨거운 바람과 정이한의 손길이 내 머리카락을 살랑거렸다. 아, 기분 좋다. 허공을 바라보며 간질이는 느낌을 즐기고 있던 나는 뒤늦게 체력바에 생각이 미쳤다. 잠을 좀 못 잔 게 신경 쓰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체력이 80%밖에 채워지질 않았다.
하필 오늘 체력이 부족할 건 뭐야. 그나마 오후 늦게는 멤버들과 다 같이 모일 테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체력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골몰하는 내게 정이한이 물었다.
“오늘 스칼렛 선배님들이랑 합동 무대 컨셉 잡는 날이지?”
“네. 오전에 곡 고르고 가볍게 맞춰보기로 했어요. 그다음에는 강현 형이랑 퍼포먼스 팀 만나고요. 안무 보고, 그룹 나누는 것까지 한댔어요. 시간 되면 연습도 한다고 했는데 얼마나 할지는 모르겠고요.”
드라이기의 전원이 꺼졌다. 정이한은 마지막으로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을 슥슥 빗어 정리해 준 뒤 “다 됐다.”하고 뿌듯하게 말했다. 나는 깔끔하게 마른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보고는 소파에 완전히 기대며 턱을 세웠다.
“오늘 서비스 너무 좋은 거 아니에요?”
“좋았어?”
정이한은 나를 향해 고개를 꺾어 내려보며 웃었다. 이렇게 올려 보니 또 색다른 느낌이네. 사나워 보이던 인상이 거꾸로 보니 상당히 유순해 보이는 게 신기했다. 날 보는 눈빛 때문에 그런가.
“네. 좋았어요.”
“그럼 종종 해줄까?”
“아침에 잘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괜히 한 번 투덜거렸더니, 정이한이 눈을 반짝였다.
“하온이가 해달라고 하면 일찍 일어날 수 있지.”
무조건 벌떡 일어날 거라면서 호언장담하는 정이한을 향해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그럴 것 같아서 농담으로라도 좋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내 머리 하나 말리자고 깨우면 그게 더 미안하니까.
“고맙지만, 형 마음만 받을게요.”
“해주고 싶은데…….”
서운한 듯 입맛 다시는 정이한을 향해 활짝 웃어 보인 뒤 벌떡 일어났다.
“저 이제 옷 갈아입고 올게요.”
“응. 나 기다릴게.”
정이한 덕분에 편안하게 외출 준비가 끝났다.
***
스칼렛 선배님들의 소속사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자니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말주변 없는 내가 후배로서 분위기를 잘 띄울 수 있을지……. 이서호라면 순식간에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면서 귀여움 듬뿍 받을 텐데.
“어? 이게 누구야~ 하온이잖아!”
발랄한 목소리가 반가움을 한껏 드러냈다. 나는 얼른 방향을 틀어 꾸벅 허리를 굽혔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맞네. 스칼렛이랑 텐스타랑 같은 소속사였지. 엘리베이터에 모여드는 네 명의 텐스타 멤버 중에는 준 선배님까지 있었다. 나를 부른 목소리의 주인공이네. 하필 만나도…….
준 선배님이 내 어깨에 팔을 두른 채 제 품 안쪽으로 나를 마구잡이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내 머리카락을 제 맘대로 헝클어트렸다. 모처럼 정이한이 예쁘게 정리해준 건데!
“윽, 선배님, 놔 주세요.”
벗어나려고 버둥거렸지만 더럽게 힘이 셌다. 내 체력 떨어지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