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
젖은 머리를 털며 나온 백강현은 이상한 눈으로 박유찬을 봤다. 씻으러 들어갈 때도 박유찬은 딱 저렇게, 팔짱을 낀 채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런데 백강현이 씻고 나온 지금까지 석상이라도 된 듯 같은 자세로 앉아 있다니. 거의 구십도 이상 숙인 고개의 각도까지 아까와 똑같았다.
“유찬 형.”
대답이 없어 한 번 더 불러봤지만, 이름의 주인은 응답하지 않았다. 멘탈 터질 만한 일이 생긴 건가. 백강현은 박유찬의 침대에 걸터앉아 단단히 접힌 팔을 건드렸다.
“와악!”
깜짝 놀란 비명에 백강현의 반듯한 이마가 살짝 구겨졌다가 펴졌다. 하염없이 흔들리는 박유찬의 동공이 허공을 배회하다가 뒤늦게 눈앞의 상대를 인지한 듯 또렷해졌다.
“아……. 강현이구나.”
“무슨 일인데.”
“일은 무슨…….”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지만, 온몸으로 무슨 일 있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응시하자 박유찬의 시선이 백강현의 얼굴에 힐끔힐끔 닿았다가 떨어졌다. 꼭 말을 할지 말지 고민하는 것처럼.
“우리 일이면 이야기하고, 개인적인 일이면 안 해도 돼.”
백강현이 말한 ‘우리 일’은 디아스와 관련된 일을 뜻하는 거였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박유찬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너도 알고 있었어?”
“뭘.”
“아니, 하온이랑 이한이…….”
귀를 바짝 세우게 하는 이름이 언급되었다. 가슴 안쪽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아추대 때 진하온이 정이한을 보던 눈빛이 떠올랐다. 걸그룹 멤버들과 인사하는 정이한을 보던 진하온의 서운하고, 속상해 보이던 그 시선이 지금 다시 떠오른 이유를 백강현은 알 것 같았다.
‘역시……. 이한 형인가.’
박유찬을 이렇게까지 좌절하게 할 만한 일이라면, 진하온이 어느 정도 선택을 했다는 의미였다. 본인이 자각을 했든, 아니든.
“오늘 이한이가 답장이 없길래 경연곡 작업 끝났는지 보러 갔거든. 그런데 하온이가 이한이 작업실에서 나오더라고.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서는. 그래서 나는 열이라도 난 줄 알았는데…….”
박유찬은 힘없이 이한이도 똑같이 벌게진 얼굴로 나왔다고 중얼거렸다.
“둘 다 왜 그러는지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 묻지 못했어. 그런데 그게 계속 신경 쓰여서. 하온이의 그, 수줍은 듯한 빨간 얼굴이 계속 아른거려…….”
눈앞의 동생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라도 구하는 것처럼, 박유찬은 절실해 보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강현은 선뜻 입을 열 수 없었다.
‘아마도 하온이의 마음이 이한 형에게 기울고 있는 것 같아.’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삼켰다.
“좀 더 어필해야 하나? 나 그동안 너무 아무것도 안 하지 않았어? 하온이가 부담스러워하는 게 너무 눈에 보여서 꾹 참았는데, 너무 참은 건가? 우리가 보지 않을 때 이한이는 계속 어필한 거 아니야?”
“진정해.”
백강현이 박유찬의 어깨를 지그시 짚어 눌렀다. 충혈된 눈으로 외치던 박유찬이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건 잠시뿐이었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침착해? 너도 하온이 좋아하는 거 아니야? 하온이가 이한이랑 잘 돼도 좋아? 정말 아무렇지 않아?”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가슴 안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찬 바람이 드나드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하온이가 우리 눈치 보는 걸 원해?”
눈치 빠른 아이다. 자신들의 태도가 바뀌면 안절부절못할 가능성이 컸다. 백강현이 진심으로 보고 싶은 건 기쁨으로 환하게 물든 하온이의 얼굴이다. 눈치를 보며 억지로 웃는 얼굴이 아니라.
“그럴 리 없잖아.”
“그럼 평소처럼 지내는 게 정답이야.”
“그러다가 이한이랑…….”
“약속했잖아. 서로 방해하지 말고, 온전히 하온이의 선택에 맡기기로.”
만약 진하온이 정말 정이한을 선택했다면 남은 두 사람의 선택지는 정해져 있었다. 받아들이고 응원해주는 것. 처음부터 그렇게 하기로 한 약속이었으니까. 하지만 감정은 이성처럼 그렇게 딱 잘라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것도 감수해야지.’
주먹을 움켜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데도, 백강현은 고통 따위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무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잠이 안 오네. 아까 유찬 형 태도가 확실히 이상했지. 뭔가 오해를 한 것 같기는 한데, 그 이후에는 금세 평소처럼 굴어서 다시 말을 꺼내기도 애매했다. 아으, 신경 쓰여.
뒤척이던 내 눈에 건너편에서 잠들어 있는 정이한이 들어왔다. 훔쳐보듯 쳐다보다가 결국 나는 접은 팔을 베고 정이한을 향해 모로 누워버렸다. 정이한은 내게 편안함과 안정을 주니까 보다 보면 잠이 오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암막 커튼을 친 방은 어두컴컴했다. 지금의 정이한은 그림자를 마주 보는 것처럼 형체가 불분명한데도, 한편으로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이건 또 무슨 경우지.
이러다가 잠 못 자는 거 아니야?
잠이 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정신이 점점 말똥말똥 선명해졌다. 나는 정이한을 쳐다보는 걸 그만두고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따듯한 우유라도 데워 마셔야겠다.
살금살금 움직여 방을 나와 주방 쪽으로 꺾은 순간, 숨죽여 움직인 보람도 없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으, 억…….”
가까스로 고개를 치켜든 이성이 새벽에 괴성을 질러 멤버들을 깨우는 걸 막아줬지만, 그 대가로 어디서 들어 보지도 못한 이상한 앓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강현 형이 불도 켜지 않은 채 홀로 식탁에 앉아 있었다.
“아, 미안. 놀랐어?”
나는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손으로 꾹 누르면서 불을 밝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빛을 거부하듯 시렸다. 눈부심에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 곧장 냉장고를 향하며 물었다.
“안 자고 뭐 해요?”
컵을 꺼내 우유를 따르는 동안에도 강현 형은 조용했다. 나는 우유 컵을 전자레인지에 돌려놓고 뒤를 돌았다.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 뭔가 느낌이 좀 이상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인다고 해야 하나.
“몸이 안 좋아요?”
윙윙거리는 전자레인지 소음을 뒤로한 채 나는 형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내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강현 형의 까만 동공이 조금씩 올라갔다.
“형?”
“……그냥 잠이 좀 안 와서.”
오늘 이상하네. 어디 아픈데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 구원 스킬이라도 써볼까. 정말 아픈 데가 없다고 해도, 피로 해소는 해줄 수 있으니까. 다음 미션이고 뭐고 진짜 구원 스킬 올리는데 포인트 올인해야 하나.
그런데 무작정 스킬을 쓰기에는 조금 마음에 걸리는데. 이 형 눈치가 좋아서 걱정된단 말이지. 나랑 닿은 뒤 몸이 좋아지면 바로 이상하다고 생각할 게 뻔하잖아.
지난번 정이한 때처럼 식은땀 흐르는 경험을 또 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형을 그냥 두고 갈 수도 없어서 어떻게 하면 눈치채기 어렵게 은근슬쩍 형에게 닿을 수 있을지 고민하던 때였다.
“하온아.”
“네?”
강현 형의 진중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뭔가 진지한 대화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스킬 쓰는 걸 조금 뒤로 미루며 형의 말에 집중하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형답지 않게 한참 주저하다가 막 형이 첫 마디를 꺼내려고 했을 때였다.
땡-.
“우유 다 데워졌네.”
눈치 없는 전자레인지 같으니라고!
“그건 괜찮아요. 그보다 할 말이 뭔데요?”
자리에서 일어난 형은 나 대신 전자레인지를 향했다.
“일단 마셔. 잠 안 와서 마시는 거지?”
“형도 마실래요? 한 잔 더 데울까요?”
“난 괜찮아.”
탁, 소리와 함께 우유 잔이 출렁였다. 나는 내 앞에 컵을 내려놓은 형의 팔을 다짜고짜 붙잡았다. 찰나의 순간, 형의 손바닥에 빨간 상처 자국이 있는 걸 분명 봤다.
“강현 형, 다쳤어요? 어디 봐요.”
안쪽으로 말아쥔 손가락을 억지로 펴 확인해 보니 손바닥에 네 개의 초승달 모양의 상처가 나 있었다.
“어쩌다 다친 거예요? 소독했어요?”
“다쳤다고?”
“……몰랐어요?”
나는 어이없어하며 형의 손바닥을 가리켰다. 이렇게 아파 보이는데 전혀 몰랐어? 몰랐다는 건 결국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잖아.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벌떡 일어났다.
“가만히 앉아 있어요.”
나는 서둘러 거실에서 구급 상자를 가져왔다. 상처 입은 것도 몰랐다면 그냥 구원 스킬 쓸 걸 그랬어. 그러면 싹 나았을 텐데. 지금 스킬을 쓰면 확연히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겠지. 문득 어물쩍거린 과거의 내가 쓸모없게 느껴졌다.
“왜 다치고 그래요. 속상하게…….”
소독솜으로 형의 손바닥을 문질렀다. 따가울까 봐 호호 불면서 안색을 살폈는데 형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연고를 바르고 방수 밴드를 찾아 붙여 놓고 나니 반대쪽 손도 신경 쓰였다.
“반대쪽 줘요. 확인해 보게.”
강현 형은 가타부타 말없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역시. 이쪽도 다쳤네. 이건 아무리 봐도 주먹을 꽉 쥐어서 생긴 상처 같지? 누가 우리 형 속상하게 했냐. 내 앞에 보이기만 해봐. 아주 그냥 콱. 가만 안 둘 테니까.
“누가 형 속상하게 했어요. 저한테 일러봐요. 제가 다 무찔러 줄 테니까.”
강현 형은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 조금 풀린 것 같아.
“정말 무찔러 줄 거야?”
“그럼요.”
나는 호언장담하며 턱을 치켜들었다. 형을 웃겨주려고 일부러 과장되게 행동했는데 그게 정답인 것 같았다. 강현 형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계속 스텝이 꼬여서 안무가 잘 안되더라고. 어떻게 무찔러 주려고?”
“……그, 그건.”
이건 예상 못 했는데? 강현 형이 기대에 찬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아니, 뭐야? 이거 뭔데. 오밤중에 갑자기 넌센스 퀴즈 앞에 놓인 기분이었다. 기상 미션도 아니고 말이야.
이리저리 고민하던 나는 센스 있는 대답은 나와는 거리가 멀다는 걸 인정하며…….
형의 허벅지를 툭툭 두 번 두들겼다.
“너, 너 왜 그랬어!”
몰려드는 민망함에 웅얼거리는 내 목소리와 강현 형의 웃음소리가 한데 섞였다.
“형이 시키는 대로 잘했어야지…….”
새로운 흑역사가 생겼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내 머리 위로 형의 손이 올라왔다.
“하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