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83화 (283/320)

283.

소파남이 위험하다는 경고를 받았으니, 상식적인 판단으로는 엮이지 않는 게 옳았다. 그럼 당연히 차단하는 게 답이잖아. 그런데 정체를 알 수 없는 거슬림이 마음속에서 계속 까슬거렸다. 나는 액정 위에서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을 힘주어 안으로 말아 쥐었다.

그때였다.

시야 한쪽에 번쩍거리는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갑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며 빛나는 시스템 메시지 때문에 헉, 하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매니저 형이 곧장 왜 그러느냐며 물어왔다.

“아, 영상 보는데 갑자기 깜짝 놀라게 하는 장면이 나와서요…….”

“그런 걸 무서워했어? 겁 없는 줄 알았더니.”

“무서운 게 아니라 그냥 놀란 거예요. 저도 평범하게 놀라거든요…….”

“아하하. 그래그래.”

어쩐지 웃음소리에 나를 귀여워하는 듯한 뉘앙스가 풍겼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젠 익숙하다. 그보다 매니저 형의 관심을 내게서 돌렸다는 게 더 중요했다. 나는 순간적인 임기응변치고는 꽤 그럴듯하게 속인 나 자신을 칭찬하면서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했다.

<시스템: 메인 미션 완료! 보상으로 포인트 3,000이 지급됩니다!>

메인 미션이 지금 완료됐네. 진짜 타이밍하고는. 그래도 좋은 소식이었다. 나는 거슬리는 짐 덩이처럼 느껴지는 소파남을 뒤로 미뤄둔 채 먼저 내 상태 창부터 확인했다.

메인 미션은 ‘더 많은 대중에게 디아스 인지시키기’였다. 알아서 차곡차곡 올라가던 퍼센트가 점점 느려져서 좀 신경 쓰였는데, 이번 광고 덕에 단번에 오른 모양이었다.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완료했으니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었다.

나는 운전 중인 매니저 형을 곁눈질했다. 형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내 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휴대폰을 보는 것처럼 꾸민 채 상태창을 불러왔다.

[E급 진하온(19) - 아이돌]

체력: 120

매력: S (4,512/10,000)

노래: S- (6,999/7,000)

춤: S- (6,999/7,000)

연기: A- (890/2,000)

작사: D- (최대 성장)

작곡: E+ (최대 성장)

남은 포인트: 3,958

포인트가 많아졌네. 노래랑 춤은 여전히 승급하기까지 1포인트가 부족하고.

내 스스로의 힘으로 경험치를 채워서 승급하고 싶었던 두 개의 스탯을 노려봤다. 특별 무대 연습을 앞둔 지금 포인트 2를 써서 승급한다는 건 너무도 달콤한 유혹이었다. 무엇보다 남은 포인트가 많잖아. 4천에 가까운데 2포인트 정도는 투자해도 되지 않을까. 뒷일이고 뭐고 모르겠다. 일단 중요한 건 지금이잖아. 고민은 짧았고, 선택은 쉬웠다.

시스템! 포인트를 써서 노래 스탯 승급해줘.

<시스템: 조건이 맞지 않습니다.>

어라……. 그럼 춤은?

<시스템: 조건이 맞지 않습니다.>

조건이 뭔데? 시스템은 잠잠했다. 나는 황당한 마음으로 내 상태 창과 눈싸움했다. 저 1이 죽어도 오르지 않더라니 이유가 있었네. 그나마 작사나 작곡처럼 최대 성장이 아닌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성장할 수는 있다는 거니까.

S로 넘어가려면 지금까지 하지 않은, 새로운 시도를 해 봐야 하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저 ‘1’이 내포하는 경험치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걸까. 결론은 어느 쪽이든 결국 내가 뭔가를 직접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춤과 노래 말고 올리고 싶은 스탯은 없으니 스킬이나 올릴까. 원래 포인트 모아서 올리려던 게 스킬이기도 했고. 다른 건 몰라도 멤버들 상태 이상 회복시켜 주는 구원은 꽤 쏠쏠하던데.

잠정적으로 스킬 승급하는 쪽으로 결정한 나는 그전에 새로 업데이트된 메인 미션부터 확인했다. 다음 미션과 포인트를 보고 포인트를 얼마나 쓸지 정해야 할 테니까. 그런데…….

<메인 미션>

─ 선택하세요.

이게 뭐야. 뭘 선택하라는 건데? 보상, 페널티, 남은 기간도 하나 없이 단출하기 짝이 없는 미션. 이런 건 처음 봤다. 그런데 왜일까. 저 삭막함이 불길한 경고 같았다.

나는 바닥에 스멀스멀 번져가는 불길함을 발로 뻥뻥 차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시스템에게 힌트를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외통수 같으니라고!

시스템의 도움을 받긴 글렀다. 나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했다.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 내가 했던 미션은 전부 아이돌 활동과 관련된 거였다. 그러면 이것도 그 일환이라고 봐야 하는 건가.

하지만 선택하라니. 인생은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잖아. 그중 어떤 게 미션이 요구하는 선택인지 내가 어떻게 아느냐 이거지.

갑자기 미궁에 내동댕이쳐진 것만 같았다. 빛도 들어오지 않고, 춥고 눅눅한 곳에 나 혼자 덜렁 남겨진 듯한 불쾌감. 그 서늘한 감각에 나는 휴대폰을 쥐지 않은 손으로 팔을 문지르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내 본능이 속삭이고 있었다. 이 선택이 뭔지 모르겠으나 굉장히 중요할 거라고. 어쩌면 그 순간이 오면 ‘아, 이게 미션이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저기서 말하는 선택 이후로 내 운명이 크게 달라질 것 같으니까.

하지만 나는 지금이 좋아. 아무것도 바꾸고 싶지 않았다. 뭘 선택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지만, 전생과 지금. 둘 중 하나의 삶을 고르라는 거라면 나는 아무런 고민도 없이 지금을 고를 수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시트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남은 기간이 없는데 그럼 그때가 올 때까지 계속 마음 졸이며 기다려야 하는 건가…….

우우웅-.

손에서 울리는 휴대폰 진동에 몸을 흠칫 굳혔다. 또 소파남이다. 읽씹하지 말고 확인하면 답장 달라는 어이없는 문자였다.

사과하고 싶다면서 뭐가 이렇게 당당한지. 처음에 온 문자도 내가 무조건 나가야 하는 것처럼 보낸 뻔뻔함에 새삼 치가 떨렸다. 뭐? 사과하고 싶으니까 만나자? 언제 시간 돼? 제발 한 번만 만나달라고 애걸복걸해도 모자랄 판에 어떻게 이런 식으로 굴지.

조금 전까지 내 신경을 거슬렀던 교주의 경고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 대신 자리 잡은 건 치밀어 오르는 짜증뿐이었다. 이 자식은 진짜 갱생 불가다. 문라이트의 정다금 선배님도 괜히 연락받지 말라고 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자기가 재기하기 위한, 목적이 뻔히 보이는 사과를 받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니 너까지 난리 피우지 말라고. 어떻게 내 번호를 알아냈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돈 많으니까 어디서든 샀겠지. 사생도 알아내는 판에.

나는 시원하게 소파남의 번호를 차단해 버렸다. 그러고 났더니 뭔가 조금은 후련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안한 마음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미션으로 내가 이 세계를 잃어버린다면, 그래서 형들과 헤어지게 되면 어떡하지…….

나는 눈두덩이에 팔을 얹었다. 온통 새까맣게 변한 시야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정이한이었다.

“형, 지금 숙소에 아무도 없죠?”

“그렇지. 왜?”

“……그럼 저 회사로 갈게요.”

지금 당장 정이한이 보고 싶었다. 이유도 모른 채 그저, 정이한이 웃고 있는 걸 봐야만 할 것 같았다.

***

막상 정이한의 작업실 앞에 도착하니 머리가 좀 차분해졌다. 너무 막무가내로 왔나. 괜히 일하는 데 방해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머뭇거렸다. 그런데 정이한이 문을 열고 나왔다.

당연하게도 내가 있을 걸 예상하지 못한 정이한은 깜짝 놀라 어벙한 얼굴을 했다. 크게 확장된 눈, 벌어진 입술, 뒷머리를 긁던 자세 그대로 굳은 팔과 어정쩡하게 벌어진 다리가 주는 콜라보가 귀여우면서도 웃겼다.

“풉.”

웃음이 새어 나오자 정지 상태로 굳어 있던 정이한이 땡 신호를 받은 것처럼 팔을 스르륵 내렸다. 놀란 얼굴이 곱게 물든 꽃잎처럼 화사한 미소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하온아! 갑자기 웬일이야? 토크쇼는 잘하고 왔어?”

“말도 말아요. 다들 자꾸 제 얼굴 가지고 놀렸어요…….”

“어? 하온이 얼굴이 대한민국 국보인데 어딜 어떻게 놀렸다는 거야?”

“……그렇게요.”

정이한 너마저! 밀려드는 배신감에 허탈하게 어깨를 늘어트렸다.

“아! 하하! 방송 예정일 언제야? 꼭 봐야겠다.”

정이한은 내가 부끄러워하는 게 귀여웠을 것 같다며 흐뭇하게 웃었다. 진짜. 정이한이 왜 보고 싶어져서 온 거야, 나는. 후회된다. 후회돼.

“몰라요. 안 알려줄래요.”

“에이, 화내지 말고. 응?”

정이한이 예쁘게 눈웃음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내 눈을 들여다보는 맑은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으니 또 마음이 헤실헤실 풀어진다. 역시 내 기분 풀어주는 재주가 있다니까.

“저희 한창 바쁠 때 방영될 거예요. 시상식 기간이랑 겹치더라고요.”

“그럼 VOD로 봐야겠네. 아, 하온아. 나 화장실 좀 다녀올 테니까 작업실에 들어가 있을래? 아니면 볼일 있어서 지나가던 길이었어?”

“형 보러 온 건 맞는데, 저 방해 안 돼요?”

“전혀. 하온이는 항상 대환영이지.”

정이한은 오히려 모처럼 온 건데 가지 말라며 애교 부리듯 말했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정이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햇살처럼 밝은 미소가 내 머릿속의 먹구름을 가르며 들어왔다. 그래서일까. 문득 메인 미션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