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
“지금 반죽하고 있었어요?”
“응. 손이 더러워서 안아줄 수가 없네.”
그때 형의 팔을 타고 비닐장갑에 묻어 있던 반죽이 흘러내렸다. 이러다가 걷어 올린 소매까지 묻을 것 같아서 반사적으로 형의 팔을 잡았다.
“형, 반죽 흘러요!”
“좀 묻어도 괜찮아.”
티슈가 있는 식탁까지 팔이 닿지 않아서 내 손을 행주처럼 이용했다. 팔뚝부터 손목까지 슥 닦으며 올리자 내 손바닥 아래에서 형의 팔 근육이 도드라지는 게 느껴졌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힘줄까지 불거진 팔은 튼튼한 기둥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왜 갑자기 근육 자랑하고 그래요?”
“좀 놀라서.”
평소 얼굴색 변화가 별로 없는 강현 형인데, 귀 끝이 조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걸 보니 내가 실수했구나 싶어 슬그머니 팔을 내렸다. 내 손에도 하얀 반죽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꼭 강현 형한테 물든 것 같은, 그런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슬쩍 한 발짝 물러나며 손을 내 등 뒤로 돌렸다.
“어, 그, 제가 도울 건 없어요?”
어색함을 숨길 수 없었다. 강현 형은 붉어진 귀와 다르게 평소와 같은 어조로 말하며 돌아섰다.
“하온이는 쉬고 있어. 형들 오는 시간에 맞춰서 튀기려고 좀 늦게 시작했어. 하온이도 비슷하게 도착할 줄 알았는데.”
“그러게요. 저는 잠들어서 몰랐는데, 생각보다 빨리 왔더라고요.”
퇴근 시간이랑 겹쳐서 엄청 막힐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나는 깨끗하게 손을 씻은 뒤 강현 형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얼른 가서 형 도우라는 상주 형의 배려였나 봐요.”
“쉬라니까.”
“저 같은 고급 인력을 부려 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요?”
시키지 않으면 내가 찾아서 하면 되지. 뭔가 할 게 없나 둘러봤는데 아직 기름을 끓이기 전이었다. 어쩐지 기름 냄새가 안 나더라니.
“제가 기름 끓일까요?”
“아, 아니야. 기름 많이 안 할 거라 내가 조정할게.”
“그럼 전 뭐해요?”
“일단 씻고 와.”
“저 별로 안 더러운데…….”
강현 형이 얼른 가서 씻으라며 말로 내 등을 떠밀었다. 약간 쫓겨나는 기분이 들긴 하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해야지.
“그럼 전 먼저 씻고 올게요. 저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요!”
“그래.”
후다닥 움직여 샤워하고 나오니 거실에 희미한 기름 냄새와 함께 힘차게 돌아가는 후드 소리가 들렸다. 기름을 저렇게 끓이는데 생각보다 냄새가 많이 안 나네. 성능이 의외로 좋은가 보다.
“형, 저 씻고 나왔는데 도와줄 거 없어요?”
강현 형은 내 쪽을 힐끔 보고는,
“머리 말리고 와.”
다음에 할 거리를 알려줬다. 우…….
***
끊임없이 강현 형 근처를 서성거려봤지만, 백수 확정이라는 결과만 얻었다. 형은 내가 뭔가를 해보려고 움직이면 귀신같이 알고 눈을 흘겼다. 오히려 얌전히 있으라고 하는데도 말 안 듣는다고 타박까지 들었다.
“원래 기름 요리는 위험해. 거기 얌전히 앉아 있어.”
“네에…….”
나는 의자를 빼서 거꾸로 앉았다. 등받이에 팔을 겹쳐 올리고 신중하게 치킨을 튀기는 강현 형을 구경했다. 지글거리는 치킨 튀겨지는 소리와 고소한 냄새가 시각과 후각을 자극했다. 그런데 요리사가 강현 형이니까 눈요기까지 아주…….
어? 도어락 누르는 소리다!
“형들 왔나 봐요.”
의자에서 일어나는 사이 현관문이 열렸다. 형들의 인사보다 유찬 형의 노성이 먼저 들려왔다.
“이서호! 집에 오면 신발 정리하라고 했지!”
……아. 맞다. 아마 내 신발일 텐데? 아까 허둥지둥 들어온 뒤에 깜박 잊고 있었다.
“유찬 형…….”
“어, 하온아. 우리 왔다.”
유찬 형은 언제 소리 질렀냐는 듯 나를 보고 생글거렸다. 찰떡같이 이서호가 범인이라고 믿는 형한테 내가 했다고 말하기 민망하네. 그나마 지금 이서호가 없는 게 다행이었다. 있었으면 억울하다고 굴러다녔을지도.
슬그머니 신발을 정리하려는 내 어깨를 유찬 형이 짚었다. 형은 굳이 허리까지 숙여 내 손에서 운동화를 빼앗았다.
“그걸 왜 네가 정리해? 서호보고 하라고 해. 하온이가 항상 해주니까 서호가 버릇을 못 고치는 거야.”
“……형, 이거 제거…….”
너무 내가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으니까 괜히 더 민망해졌다. 그 때문인지 내 목소리는 모깃소리만큼 기어들어 갔다.
“응? 뭐라고 했어?”
아, 너무 작았나. 나는 유찬 형이 치워둔 운동화 쪽으로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형, 저거, 제 신발……이에요.”
“……으으, 응?”
얼굴에 불날 것 같아.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운동화 한 켤레를 가지런히 모아 신발장에 쏙 넣었다. 그리고 이서호를 위해서라도 꼭 해야만 하는 말을 했다.
“서호 형은 아직 안 왔어요……. 오늘 늦을걸요…….”
“푸흡.”
정이한이 웃으니까 더 부끄럽잖아! 괜히 옆에서 웃는 정이한을 흘겼더니 정이한은 단번에 제 입술에 손을 포갰다. 유찬 형은 눈을 끔벅이다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 하온이가 웬일이래. 항상 잘 정리하더니. 나는 서호인 줄 알았잖아.”
“……숙소에 오니까 좋아서, 서둘러 벗느라 깜박했어요.”
으으, 민망해……. 내 고개가 자꾸 아래로 숙어졌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하온이 오늘 기분은 어때? 괜찮아?”
유찬 형은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 톤과 함께 대화의 화제를 바꿔줬다. 덕분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슬쩍 목을 세웠다.
“괜찮아요. 앞으로 또 가족을 만나러 갈진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았어요.”
“그렇다니 다행이네.”
유찬 형의 눈이 초승달처럼 예쁘게 접혔다. 형은 내 머리를 쓰다듬은 뒤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아무도 자세하게 묻는 사람이 없네. 내 기분만 살필 뿐, 내 사정에 대해 캐묻질 않았다. 궁금하지 않을 리 없을 텐데.
“그런데 형, 자세히 안 물어봐요? 궁금하지 않아요?”
“얘기하고 싶어?”
생각지 못한 유찬 형의 되물음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하고 싶냐고? 거기까지 생각해 보고 물어본 게 아니었기에 나는 스스로에게 반문해야만 했다.
내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형들한테 모든 걸 털어놓는 상황을 상상해 봤다. 분명 다들 내게 공감해 줄 거고, 그만큼 속상해하고 화를 내줄 터였다. 하지만 그건 내가 보고 싶은 표정이 아닌걸.
예전에는 형들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싶었던 때도 있었는데. 신기하지. 내가 형들에게 갖는 애정이 커진 지금은, 오히려 숨기고 싶었다. 형들은 지금의 내 모습만 알면 되지 않을까. 굳이 지나간 일을 끄집어낼 필요는 없잖아.
교주는 나에 대한 감정이 담백하기에 내 과거를 들어도 자신의 궁금증이 해결되어 후련해할 뿐, 나를 불쌍하게 보지 않았다.
하지만 형들은 아닐 거잖아. 나를 대하는 형들의 태도에서 안타까움이나 안쓰러운 감정이 보이면, 그게 더 속상할 것 같았다. 모든 걸 털어놓고 나면 과거에서 빠져나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욱 선명해진 과거의 그림자에 발목을 붙잡힐 것만 같았다.
그런 건 싫어.
“아니요. 아닌 것 같아요.”
“그럼 괜찮아. 그런 개인 사정은 말하는 사람이 이야기하고 싶을 때 들어주는 거잖아.”
“……그렇군요.”
유찬 형은 수채화로 그려낸 듯한 미소를 지었다. 저절로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지는 미소였다. 이거면 돼. 이런 미소를 받을 수 있으면 충분했다. 나는 유찬 형을 따라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그때 도어락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또 들렸다. 다급하게 삑삑대는 소리는 무척 급한 용건이라도 있는 것만 같았다.
누구지? 매니저 형? 상주 형? 이서호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비밀번호를 틀렸는지 삐비빅 거리는 오류 소리가 났다.
“…….”
어……. 진짜 누구지? 비밀번호를 틀렸다는 알람이 마치 화재경보기가 울린 것처럼 크게 들렸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거칠게 뛰었다.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렸다.
“하온…….”
정이한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는 익숙한 외침에 묻혀 흩어졌다.
“나도 치키이이이인!”
저 녀석이 진짜. 사람 놀라게 하고 있어.
우당탕 소리와 함께 이서호의 운동화가 현관에 데굴데굴 굴렀다. 운동화처럼 굴러들어온 이서호는 코를 킁킁거리며 자연스럽게 주방을 향했다.
“하온아.”
정이한이 다시 나를 불렀다. 그러고 보니 아까 불렀던 것 같기도. 내가 정이한을 쳐다봄과 동시에 유찬 형이 소리 질렀다.
“이서호! 신발!”
“아아아, 혀엉. 나 치킨 먹으려고 진짜 열심히 했단 말이야! 이 시간에 오는 게 쉬운 줄 알아? 거의 기적이라고! 기적!”
유찬 형이 길게 한숨 쉬었다. 이서호는 부엌으로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프다고 소리쳤다. 치킨 먹으려다가 강현 형한테 손등을 맞은 모양이었다. 언제나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화롭네.
“아, 이한 형. 왜요?”
이서호에게 시선을 빼앗기는 바람에 한 발 늦게 고개를 돌렸다. 정이한은 나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별일 아니라며 눈웃음을 지었다.
“뭐야, 아직 안 먹은 거였어? 형들! 진하온! 빨리 와! 치킨 다 됐대!”
이서호가 우리를 불러제꼈다. 저게 끝까지 신발 정리 안 한다면서 유찬 형이 이를 으득 갈았다. 아마 이서호는 신발 정리를 하지 않으면 치킨을 못 먹지 않을까.
생각해 보니, 이서호는 내가 엉망진창으로 벗어둔 신발의 범인으로 오해받았어도 그리 억울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서호가 먼저 들어왔으면 분명 우리 두 사람의 신발이 나란히 어질러져 있었을 테니까.
“서호 형 오니까 숙소가 꽉 차는 것 같아.”
“내 존재감이 좀 어마무시하긴 하지.”
당차게 대답한 이서호는 자신만만하게 턱을 치켜들었지만, 그대로 유찬 형에게 귀를 잡혔다.
“신. 발. 정. 리. 해.”
“아악! 악! 알았어, 알았어! 폭력반대! 반대에에!”
으음. 평화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