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
이제 어떻게 되려나. 나 때문에 일이 전부 틀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상하게 후회는 되지 않았다. 뒷일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 태도를 바꿔야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유연이의 죽음을 이렇게나마 간접적으로 알렸다는 게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묵묵히 고개 숙이고 있는 아버지를 보며 생각을 이어갈 무렵, 아버지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처음 보는 애달픈 눈빛이었다. 강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나. 저렇게 금방 표정이 무너질 줄이야. 그러고 보니 날 두고 간 뒤 후련해했다는 게 미안해서 딱딱하게 굴었다고 했었지. 생각해보니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해줄 필요는 없었는데.
“……네 엄마와 애들한테는 비밀로 해줄 수 있겠니? 충격이 클 거야.”
“제가 원하는 대로만 해주신다면 그건 문제없어요.”
“하온이가 원하는 건 지금까지처럼 서로 연락하지 말고 살자는 거지?”
말에 담긴 의미와 달리 뉘앙스는 무척 부드러웠다. 상대가 내 의도대로 따라줄 것 같은 분위기에 나도 한층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말할 수 있었다.
“맞아요. 제가 없어도 행복하실 수 있잖아요. 그럼 저는 제 생각만 하면 되니까. 그게 우리 모두가 편할 것 같아요.”
아버지는 눈가에 씁쓸함을 주름처럼 걸고는 미소 지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그리고 널 싫어한다는 사람은 걱정하지 말거라. 네 엄마와 애들한테도 단단히 일러두마.”
이걸로 끝이라고? 돈을 달라거나 뭐 그런 것도 없고? 감정을 터트린 결과치고는 너무 쉽게 넘어가서 오히려 믿기지 않았다. 설마 교주가 벌써 작업을 끝낸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날 보는 눈빛에서 미처 끊지 못한 미련이 있어 보이는데…….
“마음에 안 드니?”
“아니요. 그게 아니라…….”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될까 봐 말을 할지 말지 고민이 됐다. 아버지는 내 뒷말을 기다려줄 생각인지 그저 가만히 앉아 계실 뿐이었다. 이대로 대화를 끝내면 나만 계속 찝찝해질 것 같은데. 차라리 깔끔하게 묻고 답을 듣는 게 낫겠어.
“아무런 조건도 없이 왜 제가 원하는 대로 해주시는지 이해가 안 돼서요.”
아버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너에겐 우리가 그렇게 보이는구나.’하고 한탄하듯 말했다.
“아들……이니까, 라는 이유만으로는 납득이 안 되는 거니?”
“……네.”
아버지는 본인의 발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시선을 따라갔다. 반질반질하게 닦인 바닥 위에 놓인 까만 양말이 이상하게 헛헛해 보였다.
“네가 삶을 포기, 하려 할 때 아무것도 해준 게 없잖니. 오히려 등을 떠민 사람 중 한 명이었겠지. 그게 어떻게 부모라고 할 수 있겠어.”
스스로를 비난하는 듯한 자조적인 어조였다. 내내 바닥을 보며 얘기하던 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괴로워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희미하게나마 미소가 비쳤다.
“그런 아들이 자신의 행복을 지키는데 우리가 없는 게 좋다면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해주고 싶다. 네 말마따나 네가 태어난 후 지금까지 부모다운 일을 한 번도 해주지 못했어. 유일하게 바라는 게 연락하지 말라는 것뿐이라면 그거라도 들어줘야지.”
……나 진짜 호구인가. 막상 저렇게 내 앞에서 작아져 있는 아버지를 보니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다. 그렇다고 찰나의 동정심에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저들은 지금까지 나 없이 행복하게 잘 지냈다. 그러니 앞으로도 그럴 테지.
무엇보다 내가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 다짐한 게 있었다. 나와 유연이는 한 몸이라고. 기댈 곳 없었던 그 아이를 나만은 외면하지 말아야 할 거 아니야. 평생 내 가슴에 안고 갈, 이 세계에 기억하는 이가 나밖에 없는 아이가 박유연이었다.
하지만 아주 조금, 정말 조금이지만 저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도 되겠지.
“……그래도 계약서에 사인해주셨잖아요. 부모님만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그걸 부모다운 일로 쳐주는 거니?”
내 예상과 다르게 아버지의 미간이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순식간에 십여 년 이상은 훅 늙어 보일 정도였다. 뭐, 뭐지? 나는 고맙다고 한 건데 왜…….
“고작 그 정도가 네가 기대한 전부였구나. 고작, 사인하나……. 우리가 그렇게 만든 거야. 우리가…….”
아버지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었……지만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 나는 저것도 안 해줄까 봐 걱정했었으니까. 본의 아니게 마음을 더 아프게한 것 같아 미안할 지경이었다.
“……하나만 물어도 될까.”
“말씀하세요.”
“……갑자기 아이돌이 하고 싶다고 한 건 그, 시도 이후였던 거니?”
“네. 그냥 뭘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우연히 무대 영상을 봤어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자신이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아이돌 그룹을요. 저도 저 위에 서면 한 명쯤은 저를 좋아해 주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어요. 저는 정말 딱 한 명만 있으면 됐었거든요.”
아버지는 조용히 내 말을 경청했다. 이건 유연이가 아닌 내 이야기였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내 기억밖에 없었기에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그런데 저는 지금 제가 기대한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요. 멤버들도, 그리고 팬들도 절 좋아하고, 저도 그 사람들이 정말 좋아요. 저는 지금 행복해요. 너무 행복해서 오히려 겁쟁이가 되어 버린 것 같지만요.”
말하다 보니 너무 티엠아이까지 나불거린 것 같았다. 쓸데없는 사족이 더 이어질까 봐 나는 입을 합 다물었다. 아버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 시간이 지나서 우리를 용서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이 오면 좋겠구나.”
나를 보며 웃는 아버지를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버지는 마치 우리 멤버들이 날 보는 것처럼 상냥하고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용서할 수 있는 날……. 그건 유연이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물을 수 있다면 말이지.
“……그럴 수 있게 되면, 연락할게요.”
***
아버지와 대화를 끝내고 나오니 식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침 데리러 가는 중이었다며 어머니가 집 안에 핀 꽃들처럼 화사한 미소와 함께 우리를 마중했다.
어머니는 우리가 무슨 대화를 했는지 묻지 않으셨고, 그래서 점심을 먹는 내내 겉으로는 평화로운 분위기가 유지되었다. 그런 분위기는 유준과 유란, 거기에 교주까지 합세해 세 사람이 떠들어 준 덕이었다.
솔직히 맛은 있었지만, 입맛이 없어서 얼마 먹지 못했다. 그런 내가 안타까운지 어머니는 계속 고기반찬을 얹어주셨고, 어머니가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내 눈치를 살폈다. 이러니 속 편하게 밥이 넘어갈 리 있나.
그렇게 불편한 점심을 먹고 나니 소화제 생각이 절로 났다. 이따 상주 형한테 물어봐야겠다. 저녁에 강현 형이 튀겨준 치킨 먹으려면 소화 시켜야 하니까.
“선배님.”
교주가 사근사근한 미소와 함께 날 찾아왔다. 눈치를 보니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도 할 말이 있으니 간절하긴 한데, 마땅히 둘이서만 대화할 장소가 없잖아.
산책이라도 다녀온다고 할까…….
“산책하러 가실래요?”
내 생각 읽었냐?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곧장 마스크와 모자를 찾았다.
“가요.”
어머니와 유란은 우리를 따라가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머니를 데려가고, 유란은 끝내 같이 가고 싶다는 말을 못 했다. 덕분에 교주와 단둘이 아파트를 나설 수 있었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조용히 이야기할 만한 곳이 있는지 재빠르게 둘러봤다. 주말이라 그런지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꽤 보였다.
“저쪽.”
교주가 가리킨 곳은 아파트와 담 사이의 화단 길이었다. 화단이었으나 가운데가 흙길인 걸 보면 주민들이 이용하는 산책로인 것 같았다.
“지금 사람 없으니 저기서 얘기하지.”
교주가 먼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나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 교주를 따랐다.
“아저씨랑 무슨 얘기 했어? 뭔가 바뀐 거지?”
“어, 응. 어떻게 알았어?”
“너랑 얘기하고 나온 뒤 스킬 안 먹히는 상태로 바뀌었으니까.”
“스킬 못 쓴다고?”
“그래.”
잠깐, 그러면 다른 가족한테도 못 쓰는 거 아니야? 쓸 수 있다 하더라도 갑자기 사람이 달라져 버리면 이상해 보일 거 아니야. 유준과 유란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머니한테는 절대 못 쓴다. 바뀐 티가 확 날 사람 같으니깐.
“갑자기 왜?”
“원래 잘 안 통하는 성격이야. 그래도 지금 틈이 있어 보여서 비집어 보려고 했는데, 너랑 대화 끝내고 틈이 완전히 막혔어.”
“아…….”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짤막하게 간추려 말해줬다. 자살 같은 이야기는 전부 빼버리고, 결과만. 잠자코 듣던 교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온 보람도 없이 알아서 다 해버렸잖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긴 했네.”
교주는 팔짱을 낀 채 눈매를 좁혔다.
“그럼 박상준 쪽이나 마무리해야겠네.”
잠깐 박상준이 누군지 헷갈렸지만, 나는 금방 텐스타의 준 선배님의 본명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다른 건 몰라도 선배님들 이름은 열심히 외워놨으니까.
“아. 어어. 그럼 다른 가족들한테도 못 쓰는 게 맞는 거지?”“쓸 수는 있지만, 네 명 모두에게 쓰는 게 아니면 위험이 커. 그중 한 명이라도 위화감을 느끼면 나중에 스킬이 깨질 가능성이 높거든. 그럼 안 쓰는 게 좋지.”
“그럼 됐어.”
“그래도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이더라.”
“뭘?”
“김호채. 너희 부모님들 돈에 흔들릴 위인이 아니야.”
교주는 기껏 준비한 선물을 건네주지도 못했다며 웃었다.
“선물이 뭐였길래?”
“명품백. 그런 거 줬다간 분위기 싸해졌을걸.”
“……환불받자.”
교주는 뭐가 웃긴 지 저 혼자 키득거렸다. 그러다 문득 웃음을 싹 거둔 뒤 조금 전보다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너 그 집 사람 아니지? 뻐꾸기알 같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