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
순간적으로 내 모든 신경이 교주에게 쏠렸다. 뒤늦게 그를 너무 믿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치솟았다. 아무런 경계 없이 그에게 가족들을 보여주고, 내가 가족을 꺼린다는 것에 대해 너무 많은 힌트를 줬다. 만약 교주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가족을 이용하는 건 소파남이 아닌 그가 될 터였다.
하지만…….
나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눌렀다. 믿기로 했으니까 믿어야지. 내가 신뢰를 보여야 상대도 나를 믿어 줄 테니까. 게다가 교주를 믿기로 결정 한 건 나 자신이었다. 나는 내 판단을, 그 당시 교주가 보였던 진정성을 믿기로 했다.
만약 배신당한다면 교주의 마음이 변한 거겠지. 그건 내 선택에 따른 결과이므로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진짜로 교주가 날 배신한다는 걸 알게 되면 화날 것 같긴 하단 말이지.
나는 절대 배신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를 담아 교주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교주는 속내를 알 수 없는 깊은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맞아, 맞아! 나랑 유준 오빠는 존똑이잖아. 진짜 같이 걷기만 해도 돌아다니는 남매 인증 광고판인데…….”
유란은 말을 하다 말고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시선이 신경 쓰여서 쳐다보니 유란은 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잠시 후 유란의 어깨가 크게 한 번 위로 들렸다가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다시 나를 향해 몸을 돌린 채 눈을 내리깔았다.
“오빠, 미안해. 내 오빠인 거 알면서도 자꾸 긴장돼서 그래. 어, 어릴 때처럼 오빠 피하는 게 아니야. 이게 현실이 맞나 싶어서…….”
유란은 내 눈치를 살피듯 슬쩍 눈동자를 도르륵 굴려 나를 올려봤다. 긴장한 듯 일렁거리는 작은 동공이 보였다. 이 아이는 아직 어려서 그런 걸까. 유연의 부모님이나 유준과 같은 분노나 서러움이 일지 않았다.
그래서 가볍게 웃어 보였더니 유란은 순식간에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배시시 마주 웃어 보였다. 들판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일제히 만발하여 흔들리는 것 같은 순수한 미소였다. 유란은 분위기가 낯간지러웠는지 대뜸 소리를 지르듯 버럭 외쳤다.
“내, 내가 진짜 혈육만 아니었으면 오빠 팬이었을 걸! 나 어릴 때 오빠 불편해서 도망쳐 다닌 거, 분명 어린 내 눈에도 하온 오빠가 너무 잘생겨서였을 거야.”
원인은 내가 더 이상 유연이 아니기 때문이겠지만, 나는 그냥 미소를 유지했다. 평정심을 가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던 조금 전과 달리 지금은 평소의 나처럼 굴 수 있었다. 전부 멤버들의 응원 덕분이었다.
유란은 뒤늦게 헉,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켠 뒤 교주를 보며 변명하듯 말했다.
“당연히 재혁 오빠가 최애예요! 하온 오빠가 혈육 아니었어도! 이것만은 확신합니다!”
변명이 아니라 다짐인가? 교주가 사근사근하게 웃어주자 유란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렸다. 완전히 홀렸네, 홀렸어. 유란을 보던 교주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고 느꼈을 때, 별안간 그의 입이 열렸다.
“그러면 하온 선배님은 누굴 닮으신 거예요?”
……도대체 이 이야기는 언제 끝나는 거야. 나는 당연히 내 엄마를 빼닮았다. 그래서 더 끔찍해했지만.
남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향했다. 답을 알려줄 사람에게 의지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저 사람이라고 알 리가 없잖아.
“너희 외할아버님이 아주 잘 생기셨거든. 하온이는 외할아버님을 닮았어.”
이게 이런 설정이라고……? 격세 유전 뭐 그런 건가? 신이 짜 놓은 판이라 그런지 나름대로 치밀한 모양이었다.
“헐! 나 보고 싶은데! 아빠 사진 있어?”
유란이 보름달처럼 커다란 눈을 하고 아버지의 팔을 흔들었다.
“네 엄마한테 있을 거야. 아빠는 없어.”
유란은 곧장 일어나 부엌으로 쪼르르 달려가며 엄마를 부르짖었다. 그런 유란의 뒷모습을 지그시 응시하던 아버지와 문득 눈이 마주쳤다.
“일은 어떠냐. 할만해?”
“……어, 아! 네.”
깜짝이야. 나한테 말 걸 줄 몰랐는데. 이렇게 또 어벙하게 굴지. 교주 앞에서 어리바리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힘든 건 없고?”
“네.”
“건강은?”
“좋아요.”
“멤버들이랑은 잘 지내고?”
“……네.”
짤막한 대화가 몇 번이나 오갔다. 왜 자꾸 꼬치꼬치 캐묻는 거지? 더는 물어볼 말이 떨어졌는지 아버지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교주를 한 번 보더니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온아. 잠깐 아빠와 가자.”
어딜? 멀뚱거리며 앉아 있자 몇 걸음 가다 멈춘 아버지가 뒤를 돌아봤다. 안 오냐고 채근하는 듯한 눈치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자는 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날 데려간 건 또 다른 방이었다. 여기도 곳곳에 화분이 잔뜩 놓여 있었고, 벽에도 주렁주렁 매달린 화분이 가득했다. 단정하게 큰 침대 하나와 화장대, 그리고 옷장이 있는 걸 보니 안방인가 보네.
“단둘이서 대화 좀 하고 싶어서 불렀다.”
“…….”
나는 할 말이 없는데. 침대 끝에 걸터앉은 아버지는 넓게 벌린 다리 위에 제 팔꿈치를 괴었다. 그 상태로 아버지는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뒤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비장하지? 하고 싶은 말이 짐작도 되지 않아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나는 너한테 아빠가 아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나온 말은 다소 생뚱맞게 느껴졌다. 유연이처럼 생각하고 유연이처럼 반응하고 싶어도 정보가 없단 말이야, 정보가.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계약서에 사인해주고 돌아가며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을 다 한 것 같은, 알 수 없는 후련함을 느꼈다.”
아버지는 나를 지그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게 미안해서 널 보고 웃을 수가 없었어. 미안하다, 하온아.”
미안할 필요 없는데. 오히려 내가 원하는 바였다. 게다가 사과를 받을 사람은 역시나 내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일부러 아버지의 사과는 못 들은 척하며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다행이라고?”
무엇이 다행이냐고 되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인 뒤 대답했다.
“그럼요. 다행이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편안했고, 저는 좋은 소속사 식구들과 멤버들을 만나서 지금껏 잘 지냈는걸요. 절 좋아해 주는 디어리도 있고요.”
나는 아주 잘 지내고 있으니 앞으로도 쭉, 아버지가 아닌 사람으로 있어 줬으면 좋겠다. 그런 소망을 담아 말을 이었다.
“저는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지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도.”
중얼거리는 아버지의 얼굴이 일순간 풀어졌다. 날 것 그대로의 표정에 상처받은 사람 특유의 고통스러움이 엿보였다.
“우연히 화면 속에서 햇살을 받으며 웃고 있는 널 봤어. 그 순간 네 엄마가 오열하더구나. 네게 미안하고, 그런데도 보고 싶어서. 네 연락을 받고, 네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뒤 너희 엄마가 얼마나 설레했는지 모른다. 이제야 겨우 온 가족이 다 같이 모였는데, 앞으로는 잘 지내봐야 하지 않겠니.”
내가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지?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황당함에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숨이 가득 섞인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정이한의 도움으로 겨우, 나를 진정시켰는데 ‘이제야.’라는 단어에 속이 뒤틀렸다.
한 번 가라앉았던 감정이 끓어오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그대로 기도를 타고 목구멍으로 넘어왔다. 그래서였다. 수습하기 힘든 말을 뱉어버린 건.
“저는 힘들 것 같아요.”
“하온아.”
나를 설득하려는지 아버지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손을 피해 뒤로 물러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고 쳤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그렇게 내 입으로 말하고 나니 오히려 머리가 냉정해졌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그래. 말해 봐라. 무슨 말이든 다 들어보마.”
“저 고등학교 2학년에 자퇴한 건 아세요?”
“알……지. 그때의 너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는데…….”
“잘 보셨네요. 저 그때 죽었거든요.”
아버지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비웃듯 내려보며 말을 이었다.
“자살 시도했어요. 목을 매달았는데 제대로 못 묶었나 봐요. 눈을 뜨니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어요. 목도 아프고, 머리도 아팠어요.”
아버지는 눈과 입을 모두 크게 벌린 채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보니 속이 조금 시원했다.
“왜,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혼자였으니까. 울퉁불퉁한 바닥을 손톱으로 긁어대는 듯한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신기하죠. 죽다 살아서 그런지, 머리를 부딪힌 후유증인지 제 과거가 기억이 잘 안 나는 거예요. 하지만 한 가지만은 뚜렷했어요. 나는 세상에 혼자라는 거.”
“……미안, 하다.”
“그 사과를 받을 사람은 죽기 전의 저예요. 지금 제겐 가족이라고 한들 서류에 적힌 검은색 이름의 주인이라는 감정밖에 없으니까요.”
“…….”
아버지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푹 수그린 고개와 움츠러든 어깨가 무척 사람을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
“제게 가족은 저희 멤버들뿐이에요. 그런데도 이렇게 찾아온 건, 겁이 나서 왔어요. 절 싫어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 사람이 제 서류상 가족들에게 접근해서 제겐 기억조차 없는 과거가 날조될까 봐.”
“그럴 일은 없다. 우리는 절대 네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아.”
“평생 일해도 만지지 못할 돈을 준 대도요?”
“돈보다 중요한 건 가족이다. 가족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거야.”
“저도 가족이었어요? 언제부터요? 제가 죽고 난 다음? 죽기 전?”
“……그건.”
“정말 절 위한다면 지금까지처럼, 제가 없는 4인 가족으로 화목하게 살아주세요. 저는 태어난 순간부터 단 한 번도 가족을 가져본 적 없는데, 지금은 제가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더없이 소중하고 사랑하는.”
그게 당신들은 아니지. 아버지는 내 말뜻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방을 꽉 채우는 침묵이 유달리 무겁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