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
“저 잠시 통화 좀 할게요.”
“급한 전화야?”
급한 건 아니지만 꼭 받고 싶은 전화였기에 나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내가 자리 비워줄 테니까 여기서 받아.”
“아, 감사합니다.”
유준은 잠깐 멈칫거리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는 혹여라도 전화가 끊어질까 봐 얼른 전화를 받았다. 지금은 내 앞의 사람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여보세요.”
- 하온아.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서러움과 분노가 햇살 아래의 얼음처럼 사르륵 녹았다. 불쾌한 듯이 빠르게 뛰던 심장이 안정되고 몸 안에서 들끓던 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너 혹시 연애하냐?”
뭐야? 아직도 안 나가고 있었나? 자리 비워준다면서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유준이 못마땅했다. 되지도 않는 오해까지 하니 더욱더.
“멤버예요.”
“아, 그래?”
나는 미심쩍다는 듯한 눈으로 날 보는 유준을 무시한 채 정이한에게 집중했다. 저런 사람한테 쓰는 것보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내 시간을 쓰는 게 더 나으니까.
“이한 형, 미안해요. 형이 말 걸어서……. 그런데 왜 전화했어요? 무슨 일 있어요?”
등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유준이 방을 나가고 없었다. 나는 훨씬 편안해진 마음으로 정이한의 목소리를 감상했다.
- 아니. 그냥 하온이가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
“네에? 아침에 형이 저 배웅해준 건 잊었어요?”
그런데 벌써 보고 싶다고 전화를 건 정이한이 마냥 귀엽기만 했다. 진짜 용건이 뭔지도 알 것 같고. 정이한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더니 이내 작게 웃었다. 내게 안정감을 주는 정이한의 낮은 웃음소리는 들을 때마다 기분 좋았다. 더구나 휴대폰 통화라 그런지 유독 귀에 닿는 선명한 느낌에 귓가가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 그래도 보고 싶은데 어떡해.
칭얼거리듯 보채는 투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몇 시간이나 됐다고 벌써 보고 싶어요. 솔직하게 말해 봐요. 용건이 뭐예요?”
- 하온이 목소리 들으려고 전화 건 거 맞는데?
“에이. 아니죠?”
- 맞는데! 억울하다. 왜 안 믿지?
정이한은 언제나 날 배려해줬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지금 이렇게 전화를 건 이유를 나는 알고 있었다.
“저 걱정했어요?”
- ……들켰네.
“왜 몰라요. 형 평소에는 전화 잘 안 하잖아요. 전 괜찮아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 정말 괜찮아? 사실 전화 걸지 말지 계속 고민했거든. 괜히 방해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전화 받기 곤란한 상황일 수도 있고.
조곤조곤 건네는 말을 듣고 있자니 내 앞에 마치 지금 정이한이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사나워 보이는 눈매를 내 앞에서 한껏 늘어트린 채 순하고 다정한 미소를 띠고 있을 정이한의 모습이 그려졌다.
- 그런데 작업실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꼭 하온이가 날 부르는 것 같더라고. 괜히 불안하고, 안절부절못해서 집중도 안 되길래 혹시나, 해서 전화해 봤지. 아무 일…… 없는 거지?
알고 보니 정이한한테도 뭔가 스킬 같은 게 있는 거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전화해서 내 마음을 안정시켜 줄 리 없었다.
“네. 아무 일도 없어요. 그래도 형, 전화 줘서 고마워요.”
- 너만 별일 없으면 됐어. 숙소에 언제 올 거야? 하온이 오는 시간에 맞춰서 끝내볼게.
“음. 그건 잘 모르겠어요. 출발할 때 연락할게요.”
- 어. 알겠어.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다. 나 다시 의욕이 좀 돌아온 것 같거든.
“잘됐네요. 이따 봐요, 형.”
- 그래. 내가 시간을 너무 뺏은 것 같다. 이따 보자!
나는 통화가 끊긴 휴대폰이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두 손으로 꼭 움켜쥐었다. 엄지로 액정을 쓰다듬자 꺼지려던 화면이 다시 환해졌다. 그때 미처 보지 못한 새로운 톡 알람이 상단에 떠 있는 게 보였다. 멤버들이었다.
다들 단체 톡이 아닌 개인 톡을 선택한 걸 보니 새삼스럽게 내가 참 멤버들을 잘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룹 내 치정사건이 생기긴 했지만. 뭐, 그래도.
[디아스-박유찬: 하온아 집에 잘 도착했어? 심심하면 언제든 전화해. 형이 데리러 갈게.]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게 딱 유찬 형다웠다. 심지어 데리러 온대. 면허도 없으면서. 나는 형에게 집에 잘 왔고, 출발할 때 연락하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디아스-백강현: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저녁에 해줄게.]
아하하. 역시 눈치 빠른 강현 형은 내가 가족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고생한 아이한테 기운 내라고 먹을 걸 해주려는 아빠 같기도 하고. 나는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강현 형에게도 답장을 보냈다.
[나: 치킨 튀겨줘요!]
[백강현: 어. 장 보러 간다.]
헐. 답장이 벌써……. 휴대폰 옆에 끼고 있었나? 강현 형도 나만큼이나 연락이 잘 안되기로 유명한데, 이렇게 빨리 답장을 할 줄이야.
게다가 평소 튀김 요리는 번거로워서 되게 하기 싫어하는 강현 형이었다. 그런데 선뜻 장 보러 간다는 말을 보자 감동이 밀려왔다.
그냥 한 번 던져본 건데…….
저녁까지는 무조건 들어가야지. 강현 형이 튀겨준 치킨이 먹고 싶었다. 나는 형에게 이서호가 선물해준 이모티콘을 날려 보냈다. 귀여운 고양이가 허리를 꾸벅꾸벅 숙이는 이모티콘이었다.
[디아스-이서호: ㄱㅊ?]
[디아스-이서호: 잘 되고 있음?]
[디아스-이서호: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덜덜 떠는 호랑이 이모티콘)]
내가 가족 만난다는 말에 가장 좋아했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서호까지 걱정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나: 뭐야? 나 걱정하는 거야?]
[디아스-이서호: 답장 머선일?ㅋㅋㅋ]
[디아스-이서호: 집에 올 때까지 안 볼 줄 알았는뎈ㅋㅋㅋ]
[나: 나 놀리려고 톡한 거였어?]
[디아스-이서호: 아니! 걍 잘 되고 있냐고...]
[나: 그럭저럭 괜찮아.]
[디아스-이서호: 엉..그럼 다행이고. 너한테 좋은 쪽으로 잘 풀렸음 좋겠다.]
[디아스-이서호: (달을 향해 기도하는 달 토끼 이모티콘)]
멤버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내내 나는 디어리가 된 것처럼 연신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서호의 메시지에 ‘좋아요.’ 표시를 눌러 준 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멤버들과 계속 대화하고 싶지만 더 이상 교주를 혼자 둘 순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유준의 방을 나선 순간,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소파에 도란도란 앉은 네 사람은 잠깐 사이 친해졌는지 훨씬 편안한 분위기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심지어 가족들과 나의 중계를 맡은 것과 다름없는 어머니는 여전히 부엌에서 요리 중인데 말이지. 과연 교주답네. 교주의 인싸력이 여기서도 통하고 있었다.
나 없이 교주와 저들이 만나기는 어려우니 오늘 일을 끝내지 못하면 다음 약속이 필요했다. 그러니 저들과 교주가 친해진 건 오히려 나에게는 좋은 신호나 다름없었다.
“어, 통화 끝났어?”
유준이 제일 먼저 나를 발견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좋았던 분위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뻣뻣해진 아버지, 어색하게 웃는 유준, 날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곤란해 보이는 유란, 그런 가족들을 관찰하듯 쳐다보는 교주가 한눈에 들어왔다. 내가 자리를 비워주는 게 더 나은 걸까.
“이리 와. 여기 와서 앉아.”
유준이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제 옆을 툭툭 두들겼다. 잠깐 머뭇거리던 내게 아버지가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걸었다.
“그래, 같이 앉아 얘기 좀 나눠보자.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나는 어쩔 수 없이 소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자리에 앉는 동안 가족들이 전부 나만 보고 있어서 부담스러웠다.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도대체.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얼굴은 좋아 보이는구나.”
“……그때는 감사했습니다.”
아버지는 출장을 가기 전, 없는 시간을 쪼개 계약서에 사인하러 와줬었다. 그 덕분에 디아스로 데뷔할 수 있었으니 이것만큼은 몇 번이고 감사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아들을 위해선데. 당연히 가야지.”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하지? 감사하다고 또 해도 되는 건가? 아무 말도 안 하는 것보단 그게 나을 것 같아 ‘감사합니다.’하고 인사했더니 주변이 조용해졌다. 이거 아닌가 봐…….
“그러고 보니, 내 친구 중에 디아스 팬 있는데 사인 좀 해줄래?”
“어? 그럼 나, 나도!”
유준의 부탁에 유란이 숟가락을 얹었다. 유란은 완전히 내 쪽으로 돌아앉아 눈을 빛냈다. 이들이 내 가족이라는 걸 비밀로 하고 싶은데 사인해주면 곤란해지지 않으려나. 하지만 지금 거절하면 또 분위기가 얼어붙겠지?
“사인은 괜찮은데……. 저랑 가족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저희 팬들이 귀찮게 굴 수도 있어요.”
“그건 말 안 할게. 지금까지도 안 했고, 나도 귀찮은 건 질색이니까.”
“나도 말 안 했어! 우리 학교에서 디아스 인기 진짜 많은데! 사실 말해도 안 믿어주겠지. 오빠랑 나랑 생긴 게 너무 다르잖아. 아니, 우리 집에서 어떻게 하온 오빠 같은 사람이 나왔지? 이목구비가 그냥 다른 차원인데……?”
유란은 갑자기 말이 트인 아이처럼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외모를 언급하네. 유연의 가족들은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선하고 순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있으면 냉정해 보이는 나와 거의 대척점에 있다고 봐도 좋았다. 당연하게도 어머니와 아버지, 두 사람 중 나와 닮은 사람도 없었고.
“그건 그래. 하온이만 튀지. 심지어 엄마 아빠랑도 안 닮았잖아.”
유준이 가볍게 동의하며 웃었다. 나를 보는 교주의 눈이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어둑하게 빛났다. 이거 이대로 괜찮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