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74화 (274/320)

274.

교주는 아직인가 보네. 아파트 공동현관에서 기다리기로 한 나는 가만히 서서 아파트를 올려봤다. 색을 다시 칠했음에도 연식이 오래되었다는 티가 났다.

경기도에 있는 아파트는 유연이가 자취하던, 그러니까 내가 처음에 눈을 떴던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 낡고 허름했던 빌라와 어깨를 견줄만한 연배는 되어 보였다. 그저 칠을 다시 해서 멀끔해 보일 뿐이지.

형편이 그렇게 넉넉하진 않다고 봐도 되겠지. 그런데도 무리해서 유연이를 분가시켰을 정도로 그 애가 싫었다는 거고. 그럼 형제들의 감정도 딱히 좋진 않겠네. 허리띠를 졸라매게 만든 원흉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여러모로 큰 금액을 미끼로 살랑살랑 흔들면 쉽게 이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아주 조금, 그런 내 확신의 발목을 잡는 건 며칠 전 통화했던 어머니의 예상치 못한 태도였다.

빨리 결론을 내고 싶은데 도대체 교주는 언제 오는 거야? 공동현관 앞을 서성거리던 나는 안쪽에서 나오는 한 가족과 눈이 딱 마주쳤다.

나를 수상쩍게 보던 젊은 아빠는 대번에 어린 딸을 번쩍 들어 품에 안고, 아내를 바깥쪽으로 끌어당긴 뒤 나를 경계하며 지나갔다. 공동현관을 벗어난 뒤에도 계속 뒤를 힐끔거리는 젊은 아빠를 보며 나는 찔끔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마스크에 모자까지 눌러 쓴 키 큰 남자는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일 거 아니야. 나라도 저렇게 경계하겠다.

나는 대신 교주에게 톡을 보냈다. 어디인지 묻는 독촉 메시지 옆의 ‘1’이 사라지질 않았다. 도배하듯 ‘ㅇ’만 한 자씩 쳐서 계속 올렸더니 ‘1’은 사라졌지만, 답장도 없었다.

뭐야, 왜 읽씹해. 난 뚱한 얼굴로 휴대폰 액정이 교주라도 되는 양 노려봤다. 문득 내 앞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적당히 하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짜증 섞인 얼굴을 한 교주가 모자 밑으로 비어져 나온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쑤셔 넣고 있었다. 그때 교주의 뒤에 정차되어 있던 차량의 창문이 내려갔다. 교주의 매니저가 내 쪽을 향해 묵례하는 걸 보고 나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재혁아! 선물 놓고 갔어!”

“아…….”

교주는 마치 나 때문이라는 듯 나를 한 번 흘겨보고는 차 문을 열었다. 선물? 설마 그 사람들 주려고 산 건 아니겠지? 교주는 커다란 쇼핑백 하나를 꺼내 들고 매니저와 인사한 뒤 내 쪽을 돌아봤다. 곧장 휴대폰을 들이밀길래 쳐다보니 내가 폭탄처럼 보낸 ‘ㅇ’이 잔뜩 보였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대답 안 했잖아.”

“당연히 자고 있었지.”

아, 그 생각을 못 했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좀 너무하긴 했지?

“미안. 사람들이 날 수상하게 보니까 조급해서 그랬어.”

“얼굴만 보여줘도 의심하지 않을 텐데 고지식하기는.”

“날 모를 수도 있잖아.”

교주는 가소롭다는 듯한 코웃음을 섞어 말했다.

“너도 참, 네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사는 것 같네.”

“나 잘생긴 거 아는데.”

그러니까 아이돌 하고 있지. 어이없는 소리를 하네. 날 향해 잘게 고개 젓는 걸 보니 대답의 핀트가 어긋난 것 같긴 한데…….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게 있다.

“괜히 목격담 뜨고 싶지 않아. 너도 제대로 얼굴 가려.”

나는 턱에 대충 걸려 있는 교주의 마스크를 가리켰다. 교주는 묵직해 보이는 쇼핑백을 들어 올리며 손이 없어서 못 한다고 했다. 잠깐 내려놓으면 되는걸!

그때 올라갔던 엘리베이터가 1층으로 내려오는 게 보였다. 누군가가 또 나오려는 게 분명했다. 나는 황급히 교주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내 불안한 속도 모르고 교주가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뒤로 뺐다.

“아, 누구 나오잖아. 나랑 친분 있다고 소문내고 싶어?”

“내가 할게.”

교주는 한 손으로 마스크를 제대로 고쳐 썼다. 할 수 있으면서 못 한다고 뻗대기는. 때마침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재활용 쓰레기를 한가득 안고 나오셨다. 공동현관문이 열리자 나는 얼른 교주의 팔을 잡아당겼다.

“가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나는 교주가 들고 있던 쇼핑백을 힐끔거렸다. 역시 저거 내 가족들한테 줄 선물인 건가?

“선물은 왜 샀어?”

“초면에 환심 사려면 물질적인 게 최고거든. 성품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고.”

“……아.”

내 일을 돕는 건데 괜히 돈까지 쓰게 했네. 뭔가 우리 관계에서 감사나 사과는 안 어울리는 것 같고……. 그렇다고 모른 척 입 닦고 싶지도 않았던 나는 지나가는 투로 툭 내뱉었다.

“경비 처리해 줄 테니까 영수증 보내.”

“푸흡. 괜찮습니다. 사장님. 저 돈 많아요.”

교주의 넓디넓은 펜트하우스가 떠올랐지만, 그건 그거고.

“그래도 내 일이잖아.”

“내 일이기도 하지.”

“만약 아니면 어쩌려고 그래?”빠르게 바뀌는 엘리베이터 숫자를 보던 교주의 심드렁한 눈이 내 쪽으로 향했다. 잠시 내 얼굴을 보던 교주는 다시 시선을 복구시키며 말했다.

“어쨌든 너한테 답이 있어.”

왜인지 모르지만 무언가 확신하고 있는 듯한 어투였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더 있는 걸까.

***

현관 앞에 도착한 나는 심호흡을 했다. 막상 만나려고 하니까 왜 이렇게 떨리지. 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을까? 유연이의 아버지는 한 번 본 적 있지만, 어머니를 대면하는 건 처음이라 괜히 긴장됐다. 손가락 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걸 느끼면서 바지춤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그렇게 긴장돼?”

날 보고 있었던 건지 교주가 대뜸 물어왔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천천히 해. 그 정도는 기다려줄 수 있으니까.”

교주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여상하게 말한 뒤 입을 다물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여기 가만히 서 있어봤자 도움 되지 않는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아니까.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쉬며 긴장한 몸을 풀어주려고 노력했다. 유찬 형이 긴장할 때마다 같이 해주던 건데, 이게 이렇게 도움이 되네.

막상 무대에 올라가면 날아다니면서 무대 전에는 항상 긴장한단 말이야. 테라피 해달라며 울상 짓는 유찬 형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후우-.

심장이 조금씩 본래의 속도로 돌아오고 있었다. 유찬 형 덕분이네. 멤버들은 내 옆에 없어도 항상 날 지켜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미소를 되찾은 뒤 씩씩하게 벨을 눌렀다.

“비번 몰…….”

- 누구……시죠?

교주와 인터폰의 대답이 섞였다. 교주보다는 이쪽이 먼저였다. 역시 몰라볼 줄 알았지. 나는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며 마스크를 내렸다. 혹시라도 얼굴만으로는 인지를 못 할까 봐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온이예요.”

- 어머! 하온아! 어휴, 너무 꽁꽁 싸맨 거 아니야? 아! 팬들 눈에 띌까 봐 그랬구나. 잠시만. 엄마가 금방 문 열어줄게!

인터폰이 끊기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하온아!”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환히 웃으면서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뭘 어떡하라고 저러는 거지?

아니, 나도 저게 어떤 제스처인지는 아는데. 아는데,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날 안아 주려고 드는 건 전혀 생각하지 못해서 굳어버린 내 등을 교주가 가차 없이 밀었다. 교주한테 떠밀린 나는 그녀에게 안기듯 부딪혔다.

“뭐 해요. 어머니한테 안기지 않고.”

“어서 오렴.”

가느다란 팔이 내 등을 감싸고는 연신 나를 토닥거렸다. 몸에 닿는 연약하고 여린 느낌에 나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든든하고 따듯했던 멤버들과 달라도 너무 달라 그저 낯설기만 했다.

“안, 녕하세요.”

나는 슬쩍 어머니의 어깨를 잡아 밀어내며 뻣뻣하게 인사했다. 그녀는 조금 서운해 보이는 얼굴로 날 올려봤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갈무리한 채 맑게 웃었다.

“빨리 들어가자. 배고프지?”

“어머니, 안녕하세요. 준재혁입니다.”

교주는 내 옆에 나란히 서서 생글거렸다. 어느새 모자와 마스크까지 정리해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머, 하온이가 데려온다던 친구가 재혁이였어? 엄마는 멤버 데려올 줄 알았는데!”

어라? 원래 두 사람 아는 사이였나? 교주에게 곧장 해명하라는 눈빛으로 쏘아 보자 교주는 내게 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유란아! 유란아! 네가 좋아하는 재혁이 왔다!”

아.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다. 유란이가 교주 팬이구나. 내적 친밀감이 많이 쌓이셨나 보네. 그때 집 안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악! 엄마아!”

아마도 유란인 듯한 여자아이의 원망 섞인 외침이 다급하게 뛰는 소리와 섞였다. 이내 쾅, 하고 문 하나가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아, 어머. 미안해요. 애가 부끄러운가 봐요. 그나저나 우리 딸이 하도 재혁 오빠를 입에 달고 살아서 나도 모르게 편하게 해버렸네요.”

“아닙니다.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하온 선배님 어머님이신걸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로 무장한 교주는 듣는 이의 마음을 녹일 듯 부드럽고 신뢰감이 느껴지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목소리와 어조만으로 이런 느낌을 만들어 낼 수 있다니.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새삼스럽게 놀라웠다.

“아유, 잘생긴 청년이 착하기도 하지.”

어머니는 생글거리며 우리를 안쪽으로 데려갔다. 거실과 베란다 곳곳에 작은 화분이 놓여 있고, 테이블 위의 꽃병에는 생화로 보이는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 향긋한 존재감을 뽐냈다. 밝고 따스한 느낌이 곳곳에 가득했다.

“그나저나 이 사람은 왜 안 와?”

어머니는 우리에게 음료수를 내어준 뒤 다시 부엌으로 가면서 전화를 걸었다.

“여보, 왜 이렇게 늦어~ 하온이 벌써 왔어. 이제 들어와요. 운전은 유준이한테 맡기고. 당신 요즘 피곤하잖아.”

도란도란 대화하는 걸 듣고 있자니 정말 평범하고 무난한, 사이 좋은 가족일 뿐이었다. 우리 집이랑 똑같네. 나만 빼면 그림으로 그린 듯한 화목한 가정이라는 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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