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실장실을 나왔다. 점심에 정이한과 이서호와 함께 먹은 불어 터진 떡볶이가 전부 소화되어 버린 것같이 후련했다.
가족을 만나서 서로의 감정을 풀고 싶다는 내 의사에 실장님은 우려와 반색을 동시에 표현하셨다. 전부 디아스를 걱정한 데서 기인한 마음이라는 걸 모를 수 없었다. 실장님도 가족들이 패악을 부리는 최악의 상황을 겪고 싶진 않으셨을 테니깐.
하지만 내가 풀고 싶다고 해서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되는 건 아니기에, 실장님은 오히려 일이 더 꼬이면 내가 상처받는 게 아닐까 걱정하셨다. 회사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테니 스트레스가 심할 것 같으면 피해도 좋다는 말에 가슴이 찡했었다.
나는 휴대폰의 액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제 남은 건 만나고 싶다고 연락하는 것뿐이었다. 낯선 연락처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저장된 걸 보니 기분이 되게 이상했다.
어머니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도 그렇지만, 내 어머니가 아닌 사람을 어머니로 저장해놨다는 것도 어색했고, 저쪽은 나를 아들로 여긴다는 것도 미묘해진 느낌에 크게 한몫하고 있었고.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내 기분 따위가 아니니까 이런 건 거뜬히 무시할 수 있었다. 나는 빈 개인 연습실을 찾아 들어가 문을 틀어 잠갔다.
이제 곧 갖가지 연말 시상식의 스페셜 무대 연습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나뿐만 아니라 교주도 바빠질 테니 역시 지금 이때 무지성으로 직진하는 게 정답이었다.
뚜르르, 뚜르르-.
딱딱한 통화연결음을 들으며 생각을 이어나갈 무렵, 연결음이 도중에 끊기며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어, 안녕하세요.”
낯설기만 한 목소리에 어벙한 대답이 툭 튀어나왔다. 목소리로는 날 구분할 수 없을 테니 내가 누군지 밝히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 누구시죠?
하지만 나보다 상대가 한발 빨랐다. 잔뜩 경계하는 목소리였다.
“아, 저…….”
진하온이다. 내가 그쪽의 아들이다, 하고 밝혀야 하는데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내 가족이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서 그런 걸까.
- 광고면 끊습니다.
통화연결음만큼이나 딱딱하고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이대로 전화가 끊기면 다시 걸어도 받지 않을까 봐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진하온입니다…….”
- …….
휴대폰 너머가 잠잠했다. 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한번 더 ‘저, 하온이에요.’하고 말했다.
- ……그래, 하온아. 엄마가, 엄마가 돼서 아들 목소리도 못 알아듣고……. 미안해…….
상당히 우울한 듯한 어조에 나는 다급히 괜찮다고 대답하며 상대를 달랬다. 어쩐지 내가 생각한 것과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
“제가 오랫동안 연락을 안 드린 거니까요. 어……머니 잘못이 아니에요.”
잘 나오지 않는 단어를 뱉기 위해서는 아랫배에 힘을 가득 줘야만 했다. 이게 왜 이렇게 힘이 드는 거지. 허공에 떠 있는 체력 수치가 조금씩 떨어지는 게 보였다.
나는 좁은 연습실 벽에 등을 기댄 채 턱을 들었다. 폭신폭신한 방음 재질의 벽이 내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줬다. 만나고 싶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이게 이상하게 벅차네.
진짜 가족이 아닌데도 가족과 통화하는 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내 정신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내게 가족이란 건 언제나 이런 느낌인 걸까. 이 세계의 하윤이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이랬었는데.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하윤이와는 최근까지도 이따금 안부 인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래, 뭐든지 시작이라도 해야 뭔가 바뀌는 거야.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는 건 없다. 막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 상대가 먼저 말을 시작했다.
- ……얼마 전에 네게 연락하고 싶어서 소속사로 전화했었는데, 네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더구나. 외부인에게 노출될 수 있어서 알려줄 수 없다고 하더라고. 네게 전화해 달라는 메시지를 남겼었는데 들었니……?
“아, 네. 듣기는 했는데……. 조금 바빴어요.”
- 그래.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이렇게 늦게 연락했는데 화도 안 내네. 제일 먼저 듣게 되는 말이 타박일 줄 알았는데, 내가 건강한지부터 물어보다니. 너무 이상한 느낌이라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좁은 개인 연습실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서성거렸다.
“네, 아픈 데는 없어요. 그, 제가 전화 드린 이유는…….”
만나고 싶다.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또 입이 안 떨어진다. 하지만 내 부모님은 단 한 번도 만나고 싶다는 내 말을 받아 준 적 없었다. 익숙한 거절에서 오는 절박한 외로움이 너무도 선명했다. 진짜 내 부모님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진짜 매 순간이 고비였다.
- 편하게 말해도 돼. 엄마잖니.
엄마잖니. 그 말이 내 숨통을 콱 틀어막았다. 나는 멍청하게 입만 뻐끔거리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내가 입을 다물자 상대방도 조용해졌다. 서로 먼저 말을 꺼내는 일 없이 불편한 시간이 흘러갔다.
- 요즘 바쁘지 않으면…….
먼저 침묵을 깬 건 휴대폰 너머에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도 말끝을 흐리며 우물쭈물했다. 나는 그저 지금 이 상황이 너무도 이상하고 불편했다.
- ……부담 주려는 건 아니고, 힘들면 거절해도 괜찮은데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을래?
“아…….”
- 아니, 진짜 부담 주려는 건 아니야. 정말 거절해도 괜찮아.
내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상대방이 허둥거렸다. 내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 지금까지 방치해 놓고, 이제 와 이러는 게 네 입장에선 웃길지도 모르겠다. 항상 네게 미안했어. 잘 해줘야지, 내 자식인데 잘 해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너만 보면 왜 그렇게 내 기분이 바닥을 쳤는지 모르겠어…….
그녀는 한 단어, 한 단어를 고르듯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 그런데 안 보니까 보고 싶네……. 아들, 엄마 얼굴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
우리 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까. 내가 안 보일 때 내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준 적 있을까.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 없지만,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웃었을까, 울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이 솟아났다. 나는 가끔 내가 충동적으로 군다는 건 알았지만, 지금도 그럴 줄 몰랐다. 꺼내려고 한 말이 아닌데 내 입이 내 의지를 벗어나 움직이고 있었다.
“만약 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어땠을 것 같아요?”
-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니. 멀쩡하게 잘 살아있는데.
“……그냥, 문득 궁금해서요.”
- 자식 먼저 보내고 아무렇지 않을 부모는 없어. 내 아무리 아프고 미운 손가락이었어도.
단호하게 대답한 그녀는 이런 건 묻지도 말라며 처음으로 목소리를 굳혔다. 그런가. 그럼 우리 엄마도 슬퍼했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내 마음에 남은 모든 앙금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울어줄 정도라면 그래도 나를 자식이라고 조금이나마 인정해줬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내가 영영 알 방법은 없겠지.
“만나러 갈게요.”
그렇게 어려웠던 말이 어째서인지 쉽게 나왔다. 내 대답에 그녀의 목소리가 환해졌다.
- 정말이니? 언제 시간 돼? 엄마는 언제든 괜찮아.
“다른 가족들도 같이 보고 싶은데 주말에 다들 집에 있어요?”
- 그럼. 어디 나간다고 해도 못 가게 꽁꽁 붙들어 놓을게.
살짝 신이 난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좋은가.
“스케줄 확인해서 정확한 날짜 말씀드릴게요.”
- 꼭 연락해 주기다?
“그럴게요.”
- 그래. 그리고 하온아, 어머니라고 부르니까 좀 이상해서 그러는데 엄마라고 불러주면 안 될까? 항상 엄마라고 했었잖니.
“……조금 어색해서요.”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래야 가족들이랑 만났을 때 내가 그전과 다르게 행동해도 괜찮을 테니까. 그들이 사람이 달라졌다는 걸 파악할 만큼 유연이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할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 ……그러니. 그래, 알겠어. 이번에 꼭 보자.
그녀는 섭섭한 듯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한 뒤에 심기일전하듯 목소리를 끌어 올리며 말을 마쳤다. 통화가 끝난 뒤 나는 왜인지 천근만근처럼 느껴지는 휴대폰을 내렸다. 교주한테 일정 확인해야 하는데…….
일단 지금은 떨어진 체력을 보충하는 게 더 시급했다. 지금 회사에 있는 사람은 정이한 뿐이었기에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정이한의 작업실을 향했다.
***
토요일 아침. 나는 일찌감치 숙소를 나왔다. 집에 다녀오겠다는 말에 멤버들 모두 티를 내지 않으려 했으나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유일하게 이서호 혼자만 해맑은 얼굴로 잘 다녀오라고 신나게 손을 흔들어줬을 뿐이었다. 멤버들에게 비밀로 하고 교주를 가족에게 보일 생각하니 싱숭생숭했다. 괜히 목격담 뜨지 않게 조심해야겠어.
[나: 출발했어.]
교주에게 보낸 메시지에 성의 없는 동그라미 하나가 틱 돌아왔다. 알아서 오겠지.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휴대폰을 내려 보다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통화할 때는 그렇게 어려워했는데 막상 만나려고 하니 신기하게도 불편한 마음은 없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교주랑 함께 가서 그런 것 같기도 해. 어쨌든 혼자는 아니니까.
난 진짜 나약한 인간이다. 의지할 사람이 있어야만 마음이 편해진다니. 예전엔 혼자서도 나름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니었던 것 같단 말이지. 이따금 과거의 기억들이 해묵은 상처가 불쑥 벌어진 것처럼 핏덩이를 쏟아내니까.
“하온아, 볼일 끝나면 바로 전화해. 마중 올게.”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그래.”
상주 형을 배웅한 뒤 나는 공동현관 앞에 멀뚱히 서 있었다. 교주는 아직 안 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