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
“무, 무슨 그런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허둥거리며 떨어트린 포크를 주워들었다. 차마 정이한이랑 눈을 마주칠 수 없어서 고개는 푹 숙인 채였다. 진짜 방심할 수 없다니까. 하지만 내가 먼저 꺼낸 말이었으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입이 방정이라는 표현은 날 위해 준비된 말이었나. 나는 마구잡이로 떡볶이를 찍어서 입에 밀어 넣었다. 정이한이 무슨 말을 하든 나는 지금 먹느라 바빠서 대답할 틈이 없다는 걸 어필하기 위한 나름의 작전이었다.
“하온이가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 손대지 않을 거야.”
정이한은 연인과 언약을 맺는 사람처럼 무척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태도가 태도인지라 계속 무시할 수는 없어서 나는 눈동자만 위로 굴려 정이한의 얼굴을 재빠르게 살폈다. 정이한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푸흡.”
“뭐야. 왜 웃어.”
정이한은 뺨을 살짝 부풀리며 뾰로통한 얼굴을 했다. 눈매를 좁힌 채 나를 흘겨보는 눈이 새초롬해서 마냥 귀엽게만 보였다.
“형, 얼굴 엄청 빨개요.”
“나도 알지…….”
정이한은 목이 타는 듯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정말 나를 꼬시는데 필사적이구나.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어서 눈앞의 사람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지금까지는 그저 내가 지켜줘야 할 어린애로만 보였는데, 갑자기 그 어린애가 불쑥 커진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게 섭섭하거나 서운한 게 아니라 손가락 끝이 간질거리는 듯한 오묘한 느낌에 가까웠다.
“우리 더 어색해지기 전에 떡볶이나 먹어요. 팅팅 불겠어요.”
“……그러는 게 좋겠지?”
정이한은 경기 직전의 선수처럼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다시 눈을 뜬 정이한은 평소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이게 연기인지, 아니면 정말 마음을 정돈한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좋아. 먹자. 하온이도 많이 먹어.”
조금 전에 허겁지겁 주워 먹어서 그런지 벌써 배가 찼다. 애초에 배고프지도 않았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 탓에 나는 떡 하나가 먹기 아까운 고급 요리라도 되는 듯 이리저리 깨물어 먹었다.
“여기 튀김이 맛있는데 하온이 벌써 배불러?”
정이한이 떡볶이 국물에 푹 찍은 김말이 조각 하나를 내게 건넸다. 그거 맛있는 거 나도 알지. 나도 아는데…….
“하나만 먹을게요.”
“오징어 튀김은?”
“……김말이만.”
이게 최선이다. 미안하다. 그래도 이왕 먹을 거면 내가 좋아하는 김말이로 먹어야지. 입 안에서 퍼지는 달콤하고 매콤한 떡볶이 국물과 방금 막 국물을 묻혀 아직 아삭아삭한 튀김의 조합이 환상이었다. 맛있지만 더 먹으면 얹힐 것 같아. 나는 어쩔 수 없이 포크를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다 먹었어?”
“네. 재혁 씨네 집에서 갈비찜 먹고 왔거든요.”
“그런데 또 먹었어?”
내가 더 먹은 게 저렇게 놀랄 일인가? 정이한은 목소리 끝이 바짝 올라갈 정도로 깜짝 놀랐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혼자 먹으면 쓸쓸하잖아요.”
“……날 위해서였구나.”
정이한이 날 보며 배시시 웃었다. 자신을 배려해준 게 기쁘고 행복하다는 티를 대놓고 드러내서 보는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정이한이 먹는 걸 지켜봤다.
“물 더 줄까요?”
“부탁해도 돼?”
나는 곧장 의자를 밀며 일어나 정이한의 컵을 집어 들었다.
“당연하죠.”
정수기에서 냉수를 받아 정이한이 잡기 좋은 위치에 내려놓은 뒤 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한참 떡볶이 먹는 데 열중하던 정이한의 음식 먹는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슬슬 배가 차는 모양이네.
하지만 아직도 주문한 음식이 한가득이었다. 정이한은 마지막으로 순대를 한 입 먹고는 질린 듯한 얼굴로 남은 음식들을 바라봤다.
“왜 먹어도 안 줄지?”
“그것 봐요. 제가 많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떡볶이는 혼자가 아니잖아. 떡튀순. 그 셋이 모여야 완벽한 조합인걸.”
뭐, 그건 나도 동의하는 바지만.
“소화하면서 천천히 먹어야겠다.”
정이한은 말과 다르게 포크를 내려놓았다. 이제 저 포크 다시 안 집는다는데 내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 이서호가 탱탱 불어 터진 떡볶이 좋아하니까 잘 포장해 놨다가 내일 점심에 데워 주면 잘 먹으려나. 우리끼리 시켜 먹었다고 삐지진 않겠지?
“형, 그렇게 말하면 다 먹었다는 거잖아요. 남은 건 내일 점심으로 먹어요.”
나와 정이한은 떡볶이는 탱글탱글해야 한다는 파지만, 너무 많이 남은 걸 버리긴 뭐하니까. 이서호랑 같이 셋이 점심으로 먹어도 될 정도로 많이 남기도 했고.
“아, 서호가 흐물흐물한 거 좋아하지.”
“네. 일부러 남겨서 먹을 정도니까 좋아하지 않을까요?”
“……그으럴줄 알고 내가 대짜 시켰지.”
“어쩐지 많더라니.”
“배고파서 다 먹을 수 있을 줄 알았어…….”
“괜찮아요. 내일 서호 형이 해치워줄 거예요.”
나는 처음 왔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떡볶이를 반찬통에 옮겨 담았다. 국물까지 싹싹 모아 담는 동안 정이한은 설거짓거리를 모아갔다.
둘이 함께 뒷정리를 끝내고 나니 뭔가 시간이 붕 떠버린 느낌이 들었다. 평소라면 왁자지껄했을 숙소인데, 정이한이랑 둘이 있으니 적막한 것 같기도 하고.
“숙소 되게 조용하다.”
정이한도 그걸 느꼈는지 우두커니 서서 거실을 휘둘러봤다.
“그러게요. 차라리 방으로 들어갈까요?”
원래 방에선 둘만 있는 게 익숙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정이한은 깜짝 놀란 듯 어깨를 움찔거렸다. 아직도 날 의식하고 있네……. 저렇게 티 내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겠다.
“어……. 그보단 영화라도 볼래?”
“그래요, 그럼.”
나는 우리 두 사람 모두를 위해 흔쾌히 정이한의 제안을 수락했다.
“응. 하온이 보고 싶은 거 있어?”
정이한이 먼저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들었다. 나는 그 옆에 자리를 잡으며 체력을 확인했다. 여전히 좀 간당간당하긴 해. 이럴 때 찰싹 달라붙으면 금방 해결되는데. 그러나 지금 그러기엔 위험하겠지.
“아무거나요. 형 보고 싶은 거 봐요.”
“하온이는 뭔가 욕심 같은 게 별로 없는 것 같아.”
“저 욕심쟁이인데.”
“아니야. 하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사고 싶은 거. 그런 쪽으로는 다 아무거나 좋다고 하잖아.”
정이한은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리모컨을 조작하면서 말했다.
“저는 형들이랑 같이 있는 게 좋아요. 그래서 형들이랑 하는 거는 뭐든지 다 좋…….”
평소처럼 대답하던 나는 내 말이 또 정이한을 의식하게 할까 봐 눈동자를 굴렸다. 정이한은 나를 향해 더없이 맑고 깨끗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요.”
“그건 그래. 나도 그렇거든.”
아무렇지 않아 보이네. 이 정도는 세이프인가? 도대체 정이한을 누르는 버튼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아, 하나는 확실히 안다. 내 살…….
“아, 이거 보자!”
정이한이 영화 하나를 콕 찍었다. 나도 아는 유명한 히어로물 시리즈였다. 이런 건 가볍게 보기 좋지.
“그래요.”
둘 다 배가 부른 탓에 간식거리 하나 준비할 필요 없이 영화 시청이 시작됐다. 처음부터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탓에 지루할 틈이 없어 우리 둘은 영화에 금세 빠져들었다.
영화는 어느새 클라이맥스에 도달했다. 주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이미 많은 힘을 소모한 히어로에게는 강해진 빌런과 대적할 힘이 부족했다. 빌런을 이기기 위해서는 오직 히어로가 제 심장을 뽑아 무기로 사용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히어로는 죽을 텐데. 그래도 이건 시리즈물이니까 죽진 않겠지?
설마 이게 마지막 시리즈는 아닐 테니까. 히어로의 심장과 필적할 만한 다른 광석이 발견되거나, 심장을 뽑아 싸운 뒤 예상치 못한 도움을 받아 심장이 재건되려나. 아니면 내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해결될지도 모르지.
어떤 결과를 맞게 될지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정이한이 내 손을 꾹 잡아 왔다. 무척 심각해 보이는 얼굴을 한 정이한이 입을 열었다.
“하온아, 만약에 너도 저런 힘이 있으면 어떡할 거야?”
“저한테요? 으음.”
나는 진지하게 내게 히어로를 대입해 생각해 봤다. 주변 사람들은 멤버로 바꾸고. 만약 내가 빌런을 잡지 못해서 우리 멤버들이 살아갈 세상이 사라진다면.
“저라면 제 심장 뽑아서 싸울래요.”
“그러지 마.”
“네에?”
“뭐가 됐든. 하온이 너한테 부담되는 일이라면 하지 마.”
이거…… 지금 영화 이야기하는 거 맞아? 왜 저렇게 진지해? 아니, 근데 영화 이야기가 아니면 뭔데. 다른 경우의 수가 없잖아. 나는 일부러 가볍게 웃으면서 내 손 위에 얹어진 정이한의 손등을 톡톡 두들겼다.
“뭘 그렇게 심각해요. 영화일 뿐인데. 실제로 저런 선택할 일이 있겠어요? 그러는 형은 어떡할 건데요?”
“나도 심장 뽑아서 싸울 거야. 하온이가 살아갈 세상을 위해서.”
……나는 입 밖으로 안 꺼냈는데! 조금 치사하게 느껴졌지만, 정이한 다운 대답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결같은 사람 같으니라고.
“그럼 같이 심장 뽑아서 싸우죠!”
“그러면 의미가 없잖아아…….”
“왜요. 디아스 멤버들도 우리 디어리도 있는데. 형은 나랑 같이 천국 가면 되겠다.”
“……같이?”
정이한이 그건 나쁘지 않은 것 같다며 턱을 쓰다듬었다. 나는 그런 정이한을 보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순간, TV에서 히어로의 연인이 고통스럽게 흐느꼈다. 지금 막 히어로가 제 심장을 뽑아 검으로 형태를 바꿔 들어 올린 참이었다.
<다녀오면 키스를 해줘. 영원히 끝나지 않을 키스를.>
지금 상황에 나온 대사치고는 로맨스에 치중되어 있었다. 결국 히어로가 목숨을 바친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