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71화 (271/320)

271.

내가 가면가왕에 출연했을 때 멤버들이 내겐 기적이라는 말을 한 적 있었다. 아마 그 말을 인용한 게 아닐까 싶어서 찔러봤더니 역시나. 나는 크게 웃는 정이한을 멀거니 바라봤다.

그러자 웃음이 전염이라도 된 건지 갑자기 내게서도 피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진짜 웃겨. 왜 웃긴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더 웃겼다.

“아으, 너무 웃어서 뺨이 아파.”

제 뺨을 찰싹찰싹 두들기는 정이한의 눈매는 여전히 휘어져 있었다. 우스꽝스럽게 얼굴 근육을 움직이며 스트레칭하는 걸 보고 있자니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배와 옆구리가 땅기고 볼이 뻐근했다.

“아, 형. 그마안, 흐흑, 웃겨요!”

웃음 때문에 발음이 엉망으로 샜다. 그런데도 찰떡같이 알아들은 정이한은 “웃기고 싶어서 웃기는 게 아니야!”라며 억울해했다.

그렇게 한참을 더 웃다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낼 무렵, 드디어 둘 다 진정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체력을 확인했다. 바닥을 기고 있던 체력이 아주 살짝 올라간 게 보였다. 웃느라 힘들어서 체력 빠졌을까 봐 걱정했는데 이건 또 회복으로 쳐주네.

“힘들었다, 진짜.”

정이한은 아직도 뺨이 땅기는지 손바닥으로 양 빰을 문지르며 숨을 골랐다. 이렇게 넋 놓고 웃어본 게 얼마 만인지.

“일단 씻어요. 형 저녁 먹었어요?”

“음. 아직 안 먹긴 했는데 하온이는 배부르지 않아?”

“그렇긴 한데 더 먹을 순 있어요.”

정이한을 굶길 순 없으니까. 그렇다고 혼자 먹는 처량 맞은 모습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많이는 못 먹어도 조금은 먹을 수 있을 테니 같이 앉아서 먹어줘야지.

“그럼 배달시켜 먹을까?”

“전 좋아요.”

각자 샤워하고 모이기로 정한 뒤 나는 형들의 방으로, 정이한은 거실의 욕실로 향했다. 젖은 머리를 말리며 나왔을 땐 정이한은 벌써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나는 대충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내며 정이한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뭐 먹으려고요?”

소파를 손으로 짚고 상체를 숙여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일순 휴대폰을 든 정이한의 손이 아래로 푹 꺼졌다가 잘게 떨리며 다시 올라왔다.

“뭐예요? 배고파서 팔에 힘이 없어요?”

고개를 들고 보니 홍시처럼 익어버린 정이한이 다른 손으로 눈을 가린 채 고개를 들고 있었다. 왜 저러냐. 나보다 일찍 나왔으니 현기증이 나는 건 아닐 테고……. 역시 배가 고픈가?

“떡볶이 먹을래요? 형 떡볶이 좋아하잖아요.”

내 몫으로 메뉴 하나는 좀 부담되지만 떡볶이라면 나눠 먹을 수 있으니 좋지. 내가 생각해도 완벽한 메뉴 선정이었다. 혼자 뿌듯해하고 있는데 정이한은 계속 묵묵부답이었다.

“이한 형?”

“……그, 하온아.”

가느다랗게 새어 나오는 소리는 우리밖에 없는 숙소와 어울리지 않게 가냘픈 목소리였다. 의아함에 고개를 기우뚱거리자 정이한의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이 스르륵 내려갔다. 이윽고 정이한의 눈동자가 내 쪽으로 또르륵 굴러왔다. 정이한과 나의 시선이 얽히고, 이내 정이한의 동공이 아래쪽을 향했다.

내 턱에 닿은 시선이 목을 훑고 내려간다. 어쩐지 정이한의 시선이 무척 적나라하다고 느껴져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내 몸이 긴장하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뭐, 뭐예요? 왜 그런 눈으로 봐요?”

나는 몸을 뒤로 물리면서 가슴 앞에서 팔을 교차해 가렸다. 상체를 살짝 비틀어 어깨가 방패라도 되는 듯 치켜올리며 정이한을 흘겨봤다.

“하아, 그러고 있으니까 좀 낫다. 뭐 먹자고 했지?”

“……잉?”

여기서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이어 간다고? 조금 전에 왜 그랬는지 궁금해서 묻고 싶은 마음이 뭉게구름만큼 커졌으나, 나도 학습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럴 때 물어봐서 내게 득이 될 게 없다는 걸 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낫지.

“떡볶이요.”

“아, 좋지. 튀김도 시킬까? 순대랑…….”

정이한이 다시 어플을 뒤적거렸다. 너무 많이 시키는 거 아닌가?

“형, 지금 양 괜찮아요? 너무 많이 시키면 남을 것 같은데.”

나는 함께 메뉴를 고를 요량으로 다시 정이한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어플을 보려고 한 순간, 갑자기 정이한이 내게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더는 접근하지 말라는 완벽한 단절 신호에 나는 입술을 벌린 채 황당한 마음으로 정이한을 바라봤다.

“아까부터 뭐예요?”

영문을 알 수 없는 태도에 짜증이 나서 내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그러자 정이한이 다급히 손과 머리를 휘휘 저으며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하고 변명했다. 뭐가 아니라는 건데.

이쯤 되면 후회할지언정 이유를 알아야겠다. 나는 팔짱을 끼고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요.”하고 물었다.

“……하온아, 너 오늘 셔츠가 좀.”

정이한은 말을 뚝 끊고는 우물쭈물했다. 아, 왜 자꾸 이러는데. 오늘 내가 입은 건 며칠 전에 새로 산 잠옷용 셔츠였다. 나도 택배로 받고 처음 개시한 거긴 하지만, 그저 평범한 흰색 라운드 셔츠일 뿐인데 이게 뭐가 문제인데?

“셔츠가 왜요.”

날 선 내 반문에 정이한이 헙,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무척 쭈글쭈글해진 표정을 하고선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 모습이 꼭 주인한테 혼나서 기운 없어진 강아지 같았다. 쓸데없이 귀엽게 굴기는.

아, 안 돼. 화가 풀리려고 하고 있어…….

“그, 그러니까…….”

정이한은 내 눈치를 살피며 꾸물거렸다. 나는 풀리려는 표정을 꽉 붙든 채 묵묵히 정이한을 보기만 했다. 그러자 긴 한숨과 함께 정이한의 입이 열렸다.

“숙였을 때 안이 보여서…….”

“보였다고요?”

“으응. 거, 걱정하지 마! 나 애국가 부르고 진정했어!”

……아. 그럼 조금 전에 눈 가리고 있었던 게. 아니, 잠깐. 뭘 진정한 건데. 안 돼. 더는 생각하면 안 돼. 이건 평화로워야 하는 오늘 밤을 깨트리는 효시나 마찬가지였다.

“……옷 갈아입고 올게요.”

“어, 어어! 주문은 내가 알아서 할게.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뇨, 형 원하는 대로 시키세요.”

“응응.”

나는 정이한에게서 도망치듯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고 나서야 진득한 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보이면 얼마나 보인다고 그 난리인지.

나는 옷장에 붙어 있는 거울 앞에 서서 상체를 숙여 봤다. 하얀색 라운드 셔츠가 벌어지며 내 속이 훤히 비쳤다. 방송에서 보이면 안 되는 부위까지…….

“헐, 미쳤네.”

나는 황급히 허리를 세운 뒤 옷장을 뒤적거렸다. 평소 입던 셔츠를 꺼내 갈아입은 뒤 곧장 나가려던 나는 왠지 신경 쓰여서 다시 거울 앞에 섰다.

이건 괜찮겠지……?

슬쩍 숙여서 확인해 보니 쇄골 안쪽까지 보일 뿐, 그 너머까지는 보이질 않았다. 셔츠에는 죄가 없다는 건 알지만, 나는 갈아입은 셔츠에 유죄 판정을 내렸다.

사이즈가 큰 것도 죄라면 죄였다. 그렇다고 많이 크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차이가 난다고? 어쨌든 앞으로는 절대 꺼내입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옷장 깊숙한 곳에 처박았다.

옷장 문을 닫으려고 했을 때 바스락거리는 비닐 소리가 들렸다. 평소에도 항상 걸려 있었으나 신경 쓰이지 않았던 옷이 오늘따라 유달리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투명한 비닐에 곱게 싸인 유연이의 교복.

교복을 붙잡고 울던, 얼굴도 모르는 아이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선명하게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지금 이 교복이 눈에 띈 건, 내가 그 아이의 가족을 정리하려고 생각하기 때문인 걸까.

어쩌면 유연이는 나와 달리 가족에게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들을 놓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으니까. 아직 18살이었던 유연이가 포기하기엔 이르겠지.

그렇다고 내가 그들과 어떤 인연을 이어 간다는 것도 이상했다. 나는 유연이의 신분을 가져간 진하온이니까. 진짜 유연이가 아닌 내가 유연이를 대신할 순 없었다. 대신한다고 해서 유연이가 좋아할 거라는 보장도 없고.

나는 교복을 한 번 쓸어본 뒤 옷장 문을 닫았다. 굳게 닫힌 옷장을 보니 신기하게 생각이 정리되었다. 가족들을 어떻게 대면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언제나 나답게. 직구로 날리면 그만이다.

내일 실장님을 만나러 가야겠어.

나는 각오를 다진 뒤 방문을 나섰다.

***

떡볶이가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각자 역할을 나눴다. 나는 그릇을 세팅하고, 정이한은 포장을 풀어 헤쳤다. 나와 정이한 사이에 아주 크고 넓은 침묵의 골이 흐르는 것 같았다. 어째 옷을 갈아입고 나온 뒤에도 정이한이 계속 어색하게 굴더니, 지금까지도 그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형, 언제까지 그렇게 삐걱거릴 거예요?”

“윽. 티 났어?”

“당연하죠.”

나는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면서 정이한의 접시에 떡볶이와 라면을 담아줬다. 정이한은 머쓱한 듯한 얼굴로 날 보다가 두 손으로 얌전히 내가 내민 접시를 받아 갔다.

“고마워.”

“둘밖에 없는데 형이 삐걱거리면 분위기 이상해지잖아요.”

“나도 아는데…….”

정이한이 포크로 떡볶이를 깨작거리며 눈을 치켜올렸다. 동그란 까만 동공이 내 얼굴을 살피듯 잘게 흔들렸다.

“갑자기 너랑 둘이라는 게 의식돼서…….”

“……뭐, 저랑 선이라도 넘으려고요?”

“아니? 지금은 절대 아니야!”

정이한이 펄쩍 뛰어올랐다. 지금은 아니라니. 마치 미래의 언젠가를 염두에 두고 한 말 같았다. 놀라서 소리친 정이한은 제 볼륨에 놀란 듯 황급히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그러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나중에, 하온이가 허락하면 그때는.”

나긋한 목소리로 느리게 말하던 정이한은 이내 반듯한 시선으로 날 봤다.

“너랑 선 넘고 싶어.”

내 손에 들고 있던 포크가 식탁의 유리에 부딪히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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