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
잠깐 소강상태를 보였던 비는 또다시 거세게 쏟아졌다. 차 천장을 두들기는 빗소리가 숫제 우박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칠었다. 오늘 이서호 촬영 괜찮은 건가?
“상주 형. 비가 이렇게 오는데 서호 형 촬영 괜찮은 거예요?”
“어어. 오늘은 세트장에서 촬영할 거라 괜찮은데. 천둥은 좀 그렇긴 하네.”
오디오에 잡음이 섞여 들어갈 테니까. 그렇게 중얼거린 상주 형은 하늘을 원망스레 올려봤다.
“숙소 들렀다가 다시 촬영장 가셔야 하죠?”
정이한의 물음에 상주 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꽤 피곤해 보이는 형의 얼굴을 보니 걱정스러웠다.
“비도 많이 오는데 운전 조심하세요…….”
“걱정하지 마. 너희는 안전하게 데려다줄 테니까.”
핀트가 약간 어긋난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 말고 형이요. 형 혼자 또 촬영장까지 가야 하잖아요.”
“……하온이가 내 걱정을…….”
다소 과장되게 감격을 표현하는 상주 형을 보니 어이없어서 웃음을 새어 나왔다.
“형,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에요?”
“나만 보면 딱딱하게 굳어서 형들 뒤로 숨기 바빴던 우리 하온이가……!”
내가 그렇게 티 나게 도망 다녔었나? 민망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어찼다. 아마 매니저 형이 상주 형과 둘이 있을 시간을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러고 있을지도 모르지…….
“……이제 안 그래요.”
“그러니까 감동이지! 걱정하지 마. 이 형아, 혼자서도 안전 운전! 너희 태우면 더더욱 안전 운전할 테니까.”
상주 형은 양손으로 핸들을 꽉 움켜잡으며 힘주어 말했다.
“아, 형. 저 내일 데리러 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응? 왜? 이한이 작업하러 안 가?”
“갈 건데 이서호 오면 가려고요.”
그때 회사에 내려주기만 하면 새벽까지 자유라면서 정이한이 눈웃음을 지었다. 피곤해 보이는 상주 형을 배려해 일정을 조금 조정한 것 같았다.
“나 때문이라면 그럴 필요 없어. 너희 서포트하는 게 내 일인데 반대가 되면 안 되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상주 형은 꽤 흐뭇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늦잠 잘 예정이라서요. 오늘 하온이랑 늦게까지 놀 거거든요.”
“아, 그래?”
나는 몰랐던 내 일정이다. 난 일찍 잘 건데? 체력 회복하려면 잠이 보약이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상주 형한테 구원 스킬 써줘도 되지 않을까? 남은 체력 상태도 괜찮고, 이제 쉬는 일만 남았으니 체력 좀 소모해도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정이한도 마침 옆에 붙어 있고.
그런데 상주 형과 자연스럽게 접촉할 방법이…… 있군.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숙소 주차장에 도착하면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가라고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끌어당기고 스킬 쓰면 되겠어. 하지만 책임감이 강한 상주 형이다. 잠깐 쉬었다가 가라고 한들, 촬영장에 혼자 있을 이서호 생각에 거절할 확률이 높았다.
허벅지를 툭툭 건드리자 곧장 정이한이 내 얼굴을 바라봤다. 나는 목소리를 한껏 낮춰 상주 형에게 들리지 않도록 속삭였다.
“이따 숙소 도착하면 형한테 커피라도 마시고 가라고 하면 어때요? 형 피곤해 보이니까.”
“숙소에 피로 회복제 있어. 그거 주면 되겠다. 나도 좀 걱정됐거든.”
오, 더 좋네. 정이한과 나는 서로를 마주 보며 눈을 빛냈다. 어쩐지 팔자에도 없는 힐러로 전직한 느낌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이왕 있는 스킬 유용하게 쓰면 좋잖아.
***
내 예상대로 상주 형은 들렀다 가라는 우리의 제안을 멋지게 거절했다. 그리고 나와 정이한은 그런 상주 형을 끌어내서 양팔을 꿰찼다. 힘으로 뿌리치면 될 텐데 상주 형은 우리에게 연행되듯 질질 끌려서 엘리베이터에 실렸다.
그리고 나는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상주 형에게 구원 스킬을 사용했다. 체력이 쑥 떨어지면서 순식간에 간당간당할 만큼 낮아졌다. 상태 이상까지 다이렉트로 갈까 봐 긴장됐던 순간이었다.
와, 이 형 진짜 피곤했었나 보네. 나는 바닥에 눌어붙듯 남은 체력을 보며 남몰래 식은땀을 훔쳤다.
“어? 나 갑자기 쌩쌩해진 느낌인데?”
상주 형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형의 등을 팡팡 두들기며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니야, 진짜야.”
형은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들여다보며 갸웃거렸다.
“봐봐. 나 다크서클도 없어졌어. 갑자기 뭐지?”
“그럴 리가요.”
시치미를 뚝 떼던 나는 내 얼굴을 뚫을 듯한 시선을 느꼈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겠다. 이거 정이한이다. 설마, 뭔가 수상쩍다는 걸 느낀 건 아니겠지? 정이한을 마주 볼 용기가 급격히 사라져서 나는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바뀌는 것만 올려다봤다.
결국 상주 형은 자긴 정말 괜찮아졌다면서 기어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않았다. 형의 강한 힘에 나와 정이한만 오히려 떠밀리듯 엘리베이터에서 쫓겨났다. 아까는 정말 체력이 부족해서 우리한테 끌려 왔다고 증명하는 듯한 기세였다.
“그럼 얘들아, 적당히 놀고 일찍 자.”
상주 형이 상큼한 얼굴로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힘과 동시에 정이한이 나를 불렀다.
“하온아.”
“네?”
“이상하지 않아?”
“뭐가요?”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있었던 탓에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정이한은 무언가를 파악해 보려는 듯 내 얼굴을 관찰했다. 나는 순박해 보일 법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만 깜박였다.
“……하긴. 좀 과한 생각이긴 해.”
정이한은 혼자 납득한 것처럼 중얼거리면서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그런 정이한의 뒤에 얌전히 서서 기다리며 나는 정이한이 뭘 생각했든 그 생각을 접어서 다행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정이한의 뒤를 따라 들어가 신발을 벗고 있을 때, 앞서가던 정이한이 문득 걸음을 멈춘 채 뒤를 돌아봤다. 나를 보는 눈에 무언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빛을 띄고 있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정말 말도 안 되는 상상이고,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아서 이상하단 말이야.”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평소에는 쑥쑥 잘도 빠져나오던 발이 운동화에 붙잡힌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잘 됐다. 나는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운동화를 벗기 위해 용을 썼다.
시야에서 정이한이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잡생각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나 너무 생각 없이 스킬을 남발했던 걸까? 내가 스킬을 사용한다는 건 너무 비현실적인 일이라 그동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게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지난번에도 형들이 이상하게 여겼었는데…….
고민에 가득 찬 내 시야에 갑자기 까만 머리카락이 불쑥 들어왔다. 깜짝 놀라서 반 발자국 물러난 건 거의 본능의 영역이었다. 한쪽 발만 뒤로 물린 건 다른 쪽 발목을 정이한에게 잡혀 있기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궁금해했을 텐데 안 물어보잖아, 너.”
정이한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내 운동화의 끈을 풀어냈다. 헐거워진 운동화가 발에서 쏙 빠져나갔다.
“……뭐를요.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는데요?”
“내가 한 과한 생각. 평소의 하온이라면 그게 뭐냐고 궁금해하면서 물어봤을 텐데 그러질 않으니 이상하네.”
나를 올려다보는 정이한의 눈은 내 동의를 구하는 듯 보였다. 내가…… 그랬던가? 궁금한 걸 좀 못 참기는 하는데 매번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하지만 정이한이 내 태도에서 위화감을 느꼈다면 그게 맞겠지. 지금 내가 보여야 하는 모습은 궁금해해야 하는 거였다.
하지만 이미 궁금해할 시기는 지나갔다.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까. 정이한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확신하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상식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범주의 것이니까 여기까지 떠올렸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거지……. 아니, 편견이 없는 건가?
“형 때문이잖아요.”
나는 토라진 것처럼 고개를 휙 돌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당황한 정이한이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나?”하고 되물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뒤로 한 발 뺐던 발의 운동화 끈을 풀어내며 대답했다.
“저랑 단둘이라느니……. 형 생각 많이 했냐느니……. 자꾸 그러니까 막상 둘이 숙소에 들어가려니 신경 쓰여서 그랬죠!”
운동화에서 쏙 빠져나온 발을 성큼 집 안으로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정이한에게서 도망치듯 빠르게 거실을 가로질렀다. 사고 친 뒤라서 그런지 목이 타는 것만 같아 정수기에 컵을 올려놓았다.
“나 의식해 준 거야?”기쁜 듯한 목소리에 바로 뒤, 내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벌써 여기까지 쫓아왔냐. 나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내려 물을 받는 컵에 시선을 고정했다.
“푸흐흐.”
정이한은 여전히 내 등 뒤를 지키고 서서는 야트막하게 웃음을 흘렸다. 이제 끝인가. 조금 안도한 내가 컵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좀 말이 안 되긴 해. 하온이한테 남을 치유하는 힘이 있는 줄 알았다니까?”
정이한은 웹소설 좀 그만 읽어야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본질을 꿰뚫는 발언에 순간적으로 움찔한 건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었다. 내 손에 들린 컵의 물이 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게 정이한의 눈에 이상하게 보일까 봐 나는 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 빈 컵을 내려놓았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어요?”
“음. 유찬 형이랑 강현이에 이어 오늘 상주 형까지 그랬잖아. 거기에 너는 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 보이고…….”
정이한이 내 뺨에 손을 얹었다. 살며시 쓰다듬는 손길이 뺨의 솜털을 간지럽혀 오싹거렸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긴 해. 하지만 나한테 너는 기적이거든. 그래서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
이거 농담이야? 진담이야? 태도가 진지해서 조금 알쏭달쏭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는 짓궂게 눈매를 좁히며 정이한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건드렸다.
“형, 가면가왕 봤죠?”
정이한이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