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
교주의 집에서 나와 회사로 가는 동안 비가 내렸다. 꽤 거세진 빗줄기 때문에 와이퍼가 뽑혀 나갈 듯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외면하고 싶은 현실과 마주해야 하는 내 발버둥처럼 느껴졌다.
밤새 내릴 것처럼 퍼붓던 비는 신기하게도 회사 근처에 도착하자 잦아들었다. 번거롭게 지하 주차장에 들어가지 않아도 뛰어가면 괜찮을 것 같아서 나는 회사 앞 도로변에 차를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교주의 매니저도 그게 편하다고 생각했는지 흔쾌히 나를 대로변에 세워줬다.
마스크에 모자, 후드까지 깊게 눌러 쓴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반쯤 뛰는 듯한 빠른 걸음으로 로비를 향했다. 시큐리티 게이트를 통과해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답답한 후드를 벗은 뒤 어깨에 달라붙은 물방울을 손으로 쳐냈다. 골치 아픈 일도 떨어져 나가는 물방울처럼 털어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떻게 가족을 만나야 할지 고민을 하다 보니 정이한의 작업실까지는 금방이었다. 나 지금 표정 괜찮은가. 괜히 정이한까지 걱정시키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들자 선뜻 문고리를 당길 수가 없어 머뭇거렸다. 멀뚱히 그 앞에 가만히 서 있던 순간,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온이?”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얼른 표정 관리를 하며 고개를 돌렸다.
“세화 형!”
“이야, 오랜만이다. 얼마 만이냐.”
세화 형이 활짝 웃으며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반가운 사람을 만난 덕분인지 내 우려와 달리 나는 잘도 방긋거리며 웃고 있었다.
“형, 진짜 오랜만이에요.”
“내 라디오 들었어? 우리 팬들이 너 아주 좋아하던데.”
“……아. 당연히 들었죠! 너무 과하게 절 칭찬한 거 아니에요?”
며칠 전 세화 형은 신곡 발표와 함께 라디오에 출연했는데, 거기서 데뷔 일화를 밝히며 나를 언급했다. 가족의 부양과 꿈이라는 두 가지 갈림길에서 오랫동안 고민했다던 세화 형은 나를 만났을 당시에 대해 이야기했다.
처음 들었음이 분명한 노래에 그토록 흠뻑 빠졌던 나를 보고 음악이 주는 즐거움을 다시 느꼈고, 콘서트 할 때 꼭 가겠다는 당찬 포부에 그렇게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고.
“하온이는 제가 가수의 꿈을 위해 한 발 내디딜 용기를 일으켜준 사람입니다. 이거?”
세화 형은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라디오에 했던 말을 똑같이 읊었다. 대본을 외운 줄 알았는데. 라디오에서 했던 말과 동일한 말은 내 얼굴에 불씨를 일으키기엔 충분했다.
“윽. 혀엉…….”
“전부 사실이었는데, 뭐. 우리 팬들이 너한테 은인이라던데?”
“……들었어요.”
이서호가 세화 형 팬들이 우리 팬카페에 넘어와서 내 가수 데뷔시켜줘서 고맙다는 감사 인사 릴레이를 하고 갔다며 보여줬었다. 거기에 또 우리 디어리들은 우리 애 예쁘게 봐줘서 고맙다고 좋아했었고.
그때는 우리 디어리가 좋으면 됐지, 하고 넘겼는데 막상 당사자를 만나니 얼굴이 화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뜨거운 뺨을 두 손으로 문지르며 새초롬한 눈빛으로 세화 형을 노려봤다.
“방송에서 막, 그렇게 거짓말해도 되는 거예요?”
내가 입술을 삐죽거리자 세화 형은 눈동자의 크기를 키우며 갸웃거렸다.
“누가 거짓말이래?”
“……아니에요?”
“아닌데. 진짜야. 내가 너한테 사진 찍자고 한 거 연락처 따려고 한 거였는데~”
“……그랬어요?”
전혀 몰랐다. 나는 그저 형과 찍은 투샷에 기뻐했었던 기억만 있는데……. 세화 형은 자연스럽지 않았냐며 뿌듯해했다. 더는 민망해서 안 되겠다. 화제를 빨리 바꿔야겠어.
“그런데 형은 여기 무슨 일이에요?”
“저녁 먹고 작업하려고 왔지. 그런데 하온이는? 여기 왜 멀뚱거리며 서 있었어? 이한이 작업실 아니야?”
세화 형은 짧은 턱짓으로 정이한의 작업실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맞아요. 이한 형 보러 왔거든요.”
세화 형은 턱을 치켜들고 높은 곳에 달린 창문 너머로 정이한의 작업실 내부를 살피듯 힐끔거렸다.
“이한이 있는데?”
“집중하고 있는데 방해할까 봐 고민하고 있었어요.”
“아아.”
세화 형은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더니 한 번 더 안쪽을 힐끔거린 뒤 편안하게 웃으며 말했다.
“들어가도 될 것 같은데? 이한이 집중력 빠졌네.”
“엥? 어떻게 알아요?”
“나 이한이랑 유찬이랑 일주일에 한 번씩 작업했잖아. 요즘엔 다들 바빠져서 못 모이지만 우리 작곡 모임 꽤 오래 했으니 딱 보면 알지.”
멍하니 허공을 보는 모양새가 딱 집중력 빠졌을 때라고 말해준 세화 형은 내 어깨를 두들긴 뒤 손을 흔들었다.
“난 간다. 방금 떠오른 멜로디를 빨리 옮겨야겠어.”
“앗, 네. 다음에 또 봐요. 형!”
“그래. 또 보자.”
세화 형이 날 향해 손을 흔들어줬다. 그에 답신하듯 크게 팔을 흔들어 보인 뒤 나는 정이한의 작업실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형을 만난 덕분인지 꿉꿉했던 감정의 잔재가 흩어진 것만 같았다. 나는 훨씬 상쾌해진 마음으로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이한 형.”
“하온아!”
정이한이 나를 반기며 벌떡 일어났다. 그 기세에 의자가 바닥을 끌며 밀려나다가 기우뚱거렸다. 나는 허둥지둥 넘어지려는 의자를 붙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허어……. 깜짝이야. 왜 그렇게 격하게 환영해 주는 거예요?”
정이한은 민망한 듯 눈가를 긁으며 멋쩍게 웃었다.
“지금 집중 안 돼서 멍때리고 있었는데 하온이 봐서 기쁜 마음에…….”
세화 형이 정확했네. 나는 다리를 벌려 긴 의자 끝에 앉으며 앞을 두들겼다. 정이한이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그럼 오늘 작업은 끝이에요?”
“음. 아직 좀 더 해야 하긴 하는데…….”
정이한이 마우스를 잡고 딸깍거렸다. 어깨 너머로 화면을 훔쳐봤으나 작업을 한다기보다는 어째 정리한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다.”
“끝내려면 멀었어요?”
“각 잡고 하려면 밤새워야 하는데, 그러면 오늘 하온이 혼자잖아.”
“어? 서호 형 못 온대요?”
“응. 못 봤어?”
나는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의 존재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주의 집에서 나와 회사로 돌아올 때까지 생각에 잠겨 있느라 휴대폰을 들여다볼 생각도 못 했다. 그럴 수도 있다고는 들었는데, 정말 밤샘 확정인가 보네.
그러네. 이서호가 못 들어오고 형들도 없으니 정이한까지 없으면 나 혼자 숙소에 남겨질 판이었다.
“저 때문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애도 아니고 혼자서도 괜찮아요.”
“내 욕심이기도 해.”
정이한은 파일을 저장한 뒤 프로그램을 종료하고는 날 보고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뭔가 굉장히 부끄러워하는 듯한 눈치라서 새삼스럽게 왜 저러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하온이 독점할 수 있는 밤이잖아. 둘만 같이 있고 싶어.”
“…….”
나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관점이었다. 이걸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니……. 갑자기 정이한과 단둘이 숙소에 있어야 하는 상황이 미친 듯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왜 나까지 이러는 거야?
게다가 어째서인지 이서호가 ‘이한 형이랑 키스할 수 있어?’하고 묻는 소리가 갑자기 머릿속에서 재생되기 시작했다. 마치 무대 위에서 볼륨을 맥스로 키워 놓은 스피커가 옆에서 둥둥거리며 진동하는 듯한 커다란 소리였다.
그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정이한의 입술에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반듯하게 자리 잡은 모양 좋은 매끈한 입술이 움직였다. 벌어졌다가 다물어지고, 때로는 동그랗게 말렸다가 또다시 벌어진다.
“……아? 하온아?”
“아?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정이한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왜인지 모르게 화들짝 놀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스스로 보인 행동을 뒤늦게 자각했다.
이거, 피하는 것처럼 보였겠지?
정이한은 조금 놀란 듯 입술을 벌린 채 날 올려봤다. 그러더니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 내 생각 많이 했어?”
“……갑자기 그건 왜 물어요?”
“날 또 의식해 주길래.”
“누, 누가 의식했다는 거예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려고 했는데 처음부터 장렬하게 삑사리를 냈다. 첫 음을 제대로 못 잡아 엉망진창이 된 노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누가 봐도 어색하고 이상한…….
잠깐. 또? 또 의식했다고?
나는 날 향해 의뭉스럽게 웃고 있는 정이한을 보며 헛숨을 삼켰다. 오늘 정이한이 내게 앞치마의 허리끈을 매줬던 일이 지금 떠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설마, 형. 아까 앞치마 매줄 때 그런 거, 그거. 저 의식하라고 일부러 그런 거예요?”
정이한은 웃음 속에 의중을 숨기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눈매를 좁히며 사실대로 말하라고 시선으로 압박하자 정이한의 눈동자가 위를 향했다.
“……사실 처음엔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었는데 의식하길래 좋아서 더 했지.”
“윽. 너무해요.”
앙큼한 기회주의자 같으니라고. 정이한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신 방긋거리며 “오늘 내 생각 많이 했어?”하고 다시 물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많이 안 했다. 교주를 만나지만 않았어도 계속 신경 쓰였을 테지만……. 하필이면 교주를 만나서 말이지.
하지만 대답을 꼭 듣고 말겠다는 집념이 느껴져서 장난기가 동한 나는 생글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어? 뭐야. 대답이 왜 그래?”
“비밀로 할래요.”
나는 정이한을 남겨두고 나 혼자 성큼성큼 작업실을 벗어났다. 급하게 가방을 챙기는 듯한 달그락거리는 소리 뒤에 황급히 내 뒤를 따르는 정이한의 바쁜 발소리가 들렸다.
“하온이 너무해~”
칭얼거리는 목소리는 덤이었다.